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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하나님

창세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574 추천 수 0 2015.04.02 16: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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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9:8-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02701 

jys.jpg 정용섭 목사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사순절 첫째 주일, 2015년 2월22일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노아 홍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대충은 압니다. 그 이야기는 창 6-9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 이야기를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40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가 내렸습니다. 세상이 온통 물로 가득했습니다. 물고기 외에는 모두 몰살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노아는 큰 배를 만들어서 가족과 여러 동물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배를 가리켜 방주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에 논란도 많습니다. 노아 가족 외에 모든 인류를 몰살시킨다는 게 말이 되냐, 거꾸로 그건 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거라고도 합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분분합니다. 진화론을 부정하는 창조과학 유에 속한 사람들은 몇 가지 지질학과 고생물학에 근거해서 이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합니다. 노아 방주의 잔해를 찾겠다고 터키 지역으로 탐사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논란은 성서읽기에서 무의미합니다. 대홍수 이야기는 구약만이 아니라 다른 고대 문헌에도 자주 나옵니다. 고대인들에게 대홍수 경험이 많았고 강렬했다는 의미입니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벨론 사람들도 대홍수를 일상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고대인들이 그런 대홍수 앞에서 얼마나 큰 두려움에 빠지고 충격을 받았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수백 년 살았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유대인들은 이런 대홍수 이야기를 그들에게서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자신들의 신앙에 적용시켰습니다. 오늘 우리는 노아 홍수가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소모적인 논쟁에 머물지 말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기자가 말하려는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오늘의 교회니까 모두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뜻으로 노아 홍수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핵심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관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홍수의 불가피성에 대한 신학적 동기입니다. 창 6장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노아를 불러 인류를 멸망시킬 대홍수 심판을 예고하시면서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방주에 끌어들여야할 날짐승과 들짐승의 종류까지 다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홍수와 방주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에 앞서 창세기 기자는 세상의 악에 대해서 준열하게 비판합니다. 창 6:5,6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세기 기자는 멸절당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을 정도로 사람의 악이 극에 달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 지은 것을 후회했다는 발언은 창조 행위에 대한 부정으로, 일종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으로 들립니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창세기 기자가 인간의 악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악할 수 있을지, 저렇게 몰염치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인류를 파멸시킬만한 큰 악으로부터 시작해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악행까지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현대신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신학이 가능한가?’ 전쟁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도 끔찍하지만,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살해당한 일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명이 어렵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 모든 인간 종이 지구에서 멸종당하게는 게 낫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는 여러 토속 언어와 경구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렸으면 좋겠다.’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죽겠지요. 일본의 식민지배와 거기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과 그로 인한 불행 앞에서 조선의 민중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고대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의 창조를 크게 긍정하면서도 인간들에 의해서 벌어지는 악행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부정당하는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대홍수 이야기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관점은 대홍수로 인한 대참사 이후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노아 설화가 끝나는 창 9:8-1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노아와 맺으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나님이 언약을 세운다고 번역되었다. 루터는 Bund(계약)라는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약속, 언약, 계약은 다 비슷한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 언약, 즉 약속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1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와 비슷한 문장이 본문에서 지루할 정도로 반복됩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런 글쓰기 방식으로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겁니다. 약속의 증거는 무지개였습니다. 13절에 이르기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영롱한 빛을 내는 무지개를 사람이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무지개는 히브리어로 전쟁 무기인 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의 손을 초월해 있는 무지개처럼, 또한 권위를 상징하는 활처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약속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약속, 또는 계약의 조건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과의 약속, 모세와의 약속과 비교할 때 노아와의 약속에 나타나는 특별한 점입니다. 다른 약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계명에 충실해야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습니다. 율법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인간 세상의 원리도 이런 조건에 기초합니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그만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노아와의 약속에서 하나님은 그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대홍수로 인한 멸망은 없다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노아 대홍수는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홍수가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약속은 인간이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벌어진 노아 홍수도 하나님의 큰 실수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왜 마음이 변덕스러운 인간처럼 생각을 자꾸 바꾸는 걸까요?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창 8:20-22절에는 홍수가 끝난 뒤에 노아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은 21절에서 당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대홍수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9장의 약속은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8장의 약속과 연장선 속에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도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건 교정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자 본질입니다. 그것을 이유로 인간을 심판하면 인류는 지구에서 존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악과는 상관없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은총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것 외에는 인간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노아와 맺은 약속의 두 번째 특징은 약속의 대상이 노아나 노아 가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더 나아가서 모든 생물이라는 사실입니다. 9,1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오는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고대 유대인들의 영성이 심오하다는 걸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사람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관심의 대상입니다. 부엉이, 까치, 여우, 고라니, 개미, 벌, 거미 등, 살아있는 모든 것이 약속의 대상입니다. 지구는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지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사람도 지구의 손님이고, 독수리도 손님입니다. 손님으로서 모든 생명체는 지구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지구라는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책무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약속은 기본적으로 생존의 확실성에 대한 것입니다. 창 8:22절이 가리키는 대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고 거두는 일이, 추위와 더위가, 여름과 겨울이, 낮과 밤이 쉬지 않고, 창 9:11절이 가리키는 대로 더 이상 대홍수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생존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신앙을 40년 광야시대에 확실하게 경험했습니다. 척박한 광야에서 유목민으로서 살아가면서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풍요롭지는 않으나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되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 광야시절에 가장 풍성한 신앙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사회과학적으로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생존의 확실성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과 다툼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 생존의 확실성에 천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생존, 또는 존재(be)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실제로는 옛날에 비해서 훨씬 풍요롭게 살면서도 오히려 더 불행합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좀더 근원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존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생태적 생존 조건이 보장되면 구원이 완성될까요?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멋진 세상이 그대로 이뤄졌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동양에서는 고대 중국의 요순시대를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백성들이 자유롭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태평성세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성취되는 때를 그런 세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을 정도로 모든 생존 조건이 갖춰진 그런 세상은 오기도 힘들거니와 설령 왔다고 해도 구원이 완성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여긴다는 우리는 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입니다. 그것은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주어진 것과는 완전히 다른 약속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제2 독서인 벧전 3:18-22절이 전합니다. 이 본문에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 홍수의 물은 기독교의 세례와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노아 홍수 때는 여덟 명만 구원받았습니다. 노아 부부와 세 아들 부부를 가리킵니다. 이에 반해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구원받습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벧전 3:22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런 설명이 복잡하게 들리거나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부활이 뭐며, 승천이 뭐고, 하나님 우편이 뭐란 말이냐, 천사와 권세와 능력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신약성경은 2천 년 전의 문서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실감 있게 들리던 말들도 오늘 우리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시공간의 차이만이 아니라 영적인 깊이의 차이로 인해서 본문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를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렇게 묶어서 정리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의 비밀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서 단순히 생존을 보장받는 데에, 즉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잘 먹고 잘 사는 데에 머무는 게 아니라 종말에 밝히 드러날 궁극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약속도 노아와의 약속에서처럼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조건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일천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만 요구합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은 어떤 조건이 아닙니다. 히 11:1절이 말하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reality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이 아직 결혼 날짜는 오지 않았지만 결혼을 리얼리티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둘째, 노아와의 약속에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짐승이 포함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도 역시 일부만이 아니라 전체 인류를 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벧전 3:19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옥에까지 내려가서 구원을 선포하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능력이 우주론적이라는 뜻입니다. 태양이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구별하지 않고 비추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종교적 명상의 대상이거나 철학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과 운명에 개입해서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과의 약속만으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데,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할 하나님과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래서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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