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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4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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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시편(61) 깨달음이 축복입니다
(시편 40편 1-8절)
<
깨달음이 축복입니다 >
성도를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집념과 추적은 대단합니다. 때로는 고통을 통해 돌아오게 합니다.
그 하나님의 집념과 추적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양떼들은 자기 뜻대로 가다가 가끔 구덩이에 빠지지만 그래도 목자는 양을 추적해서
구덩이에서 발견한 후 책망도 없고 조건도 없이 그 양을 구덩이에서 건져내고 준비한 먹을 것을 줍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신을 고통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고백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기도 응답을
얻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기다림이 헛되지 않고 마침내 때가 되어 하나님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하시고 탄탄한 반석 위에 두셔서 안전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다윗과 같은 은혜가 넘쳐 있습니다. 문제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전쟁이나 재난이 아니라
‘깨달음이 없는 것’과 ‘깨달은 것을 쉽게 잊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큰 대가를 치르고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는데 그 깨달음을 너무
쉽게 잊고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고통당하는 고통의 악순환이 없어야 합니다.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을 잊지 않는 것이 축복입니다.
또한 깨달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깨달은 바를 행하지 않을 때,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기는 내면의 갈등이 결국
불행을 초래합니다. 생명의 길을 깨달았는데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은 없습니다. 축복은 가시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고
정신적이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지만 무작정 사람의 물질적인 욕망을 채워주시는 물주는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따라 고통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 좋은 친구를 사귀십시오 >
다윗은 고통의
순간을 지나 결국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고백합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이 구절에서 ‘새 노래’는 ‘새로 만든 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부르는 노래’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은 과거에도 은혜를 주셨지만 또 새로운 은혜 체험하게 하심으로 새롭게 감사 찬송을 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극적인 은혜의 역사로
다윗의 탄식이 찬송으로 변하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운행과 관련해 하나님이 써두신 각본은 항상 결말이 승리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납니다. 무협지나 서부영화를 보면 아무리 주인공이 큰 시련을
당해도 마음을 놓고 보게 됩니다. 반드시 주인공이 이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으로 각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각본도 그렇게
되어있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살기만 하면 됩니다. 광야를 너무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물론 광야를 지나는 길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광야 길에 함께 할 좋은 동행자가 있는 것도 복된 인생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4절). 사람들은 가끔 기독교의 사랑을 혼동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다 돌아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의인은 돌아보고 악인은 돌아보지 않는 것이 참된 사랑에 더 가깝습니다. 사람을 외양과 편견으로 차별하면 안 되지만 나쁜 친구를 멀리하고 좋은
친구를 가까이 하려는 것은 결코 차별이 아닙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가 나쁜 친구와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듯이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가 나쁜 친구와 어울려 다니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외모나 학벌이나 능력이나 물질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교만과
거짓이 습관이 된 사람도 가까이 하는 것은 차별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진실하고 인품 좋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교만하고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외적인 모습과 편견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되 좋은 사람을 친구로
두려고 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교만하고 거짓된 사람까지 친구로 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좋은 친구 및 좋은 교우를 가까이 하십시오.
반대로 교만이 넘치고 거짓이 몸에 배인 사람은 과감히 멀리하십시오. 나쁜 친구를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좋은 친구를 주시지 않습니다. 나쁜 친구를
과감히 멀리할 때 하나님이 좋은 친구를 붙여주십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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