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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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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3절-8절: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다. 주님이 보낸 종은 반드시 광야에서 외친다. 도시 안에서 외쳐도 광야의 사상 정신을 외친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그 사상 정신 신앙을 외친다. 반면에 지역적 광야 지형적 광야에서 기도원을 한다고 해도 그 소원 목적이, 그 집회의 성격과 소원 목적이 세상 것을 구하고 가르치고 있다면 그 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아닐뿐더러 역시 주님이 보낸 종은 아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보낸 사자는, 인도자는 세상을 구걸하고 세상을 자랑하는 소리를 한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볼 때는 엘리사벳 아들로 보이나 그가 외치는 소리는, 그 내용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전하는 사자다. 사자란 보냄 받았다는 것이다. 종이란 천국복음, 그 분 일에 수종드는 의미로서 종이라 한다. 그러니까 일반 이방세상이 말하는 주인의 종 그런 의미하고는 그 성격 성질이 다르다.
인간 자기의 것은 아무리 좋아도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고 변색되고, 아무리 존귀영광이 좋아도 그것은 임시성이요 가견적이요 세상이 끝나면 다 끝나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영원히 가는 것이다. 말씀으로 인격화 되고 성품화 되고 진리 실상화 된 그 속성은 영원히 간다. 이 세상에서도 그런 사람을 보면 사람이 참 고상하다고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이 됐어도 세상은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이건 종교적인 존귀 명예 영광과는 다르다. 속성이 성품이 질적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종교적 세계의 명예스런 그런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독교 천국복음의 질은 본질을 염두에 두고, 그 다음에 아무리 종교적 존귀 명예 영광 지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못됐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세상은 외모 껍데기 외형 무슨 배후 그런 걸 가지고 자랑하고, 그게 자기의 힘인 줄 안다. 세상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알아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할런지 모르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알아주는 영광이다. 그 질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보게 되면 기독교 종교적 세계의 조직이나 존귀 명예 영광을 얼마든지 자기 발아래 밟을 수가 있다. 인격적 성품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 무장이 돼 있다면 그건 밟을 수 있는 거다. 자기 배짱으로 밟는 게 아니고. 질적인 면에서 무엇이 잘못됐다고 하는 걸 밝힐 수 있다면 밟을 수 있는 거다.
광야에서 외치는 참 종 참 사자는 자기자랑 인간자랑 세상자랑 학벌자랑 재물자랑이 전혀 없다. 이걸 자랑하고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오직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 세상에는 없는 오직 영적인 면에서의 그 진리이치, 사람 속의 소원 목적을 다 가르쳐 주고 ‘그게 틀렸다. 옳다’ 하는 걸 이치에 의해서 가르쳐 주고, 사람들이 생각을 품는 그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성질까지 복음에서는 밝혀진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심령골수를 쪼갠다. 자기가 갖고 있는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시간적으로 영원히 가는 건지, 임시성적인 건지? 바람에 불려 다니는 것을 붙잡고 있는 건지, 그걸 이용할 수 있는 정신 사상 지혜지식을 갖고 있는 건지 밝혀준다.
세상은 자기 홍보를 한다. 정치세계에서 이걸 많이 본다. 그리고 자기의 경력과 이력과 업적과 자기의 배경을 자랑한다. 세상은 그렇다. 세상은 원래 곳이고 세상은 그렇게 해야 알아준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그런 거 자랑했다가는 큰일 난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은 예수 믿고 진리이치로서 말씀이치로서 자기가 인격화 된 것밖에 없다. 그런 것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중심을 해서 세상을 돌린다.
팽이를 칠 때 팽이의 중심을 세우려고 팽이의 겉을 몸뚱이를 친다. 팽이의 중심이 서 있으면 안 친다. 그러다가 팽이가 도는 게 힘이 약해서 삐뚤삐뚤 하면 또 팽이의 겉을 친다. 이치는 그와 같다. 다시 말하면 너라고 하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진리중심으로 서지 않으면 너는 얻어맞는다. 사건적으로 환경적으로 병적으로 사업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로 얻어맞는다. 그러니 바로 서라.
자기에게 가정에게 사회적으로 혹은 직장에 어떤 바람이 불면 사람을 먼저 세워라. 돈부터 따지지 말고 사람부터 먼저 세워야 한다. 그래야 일이 된다. 사람이 비뚤어지면 얼마 못 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보내신 사자가 나의 인생의 목적관을 바로 깨닫게 해주고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준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때도 노는 사람을 불러다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주면 그렇게 고맙다. 그런데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하지 못하고 전혀 모르는 나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대로 바로 놓여지게 하는 것이니 이 사실이 얼마나 귀한 건지?
이런 걸 대학원에서 배우느냐? 그건 안 된다. 세상 어떤 학박사가 할 수 있느냐? 그건 안 된다. 오직 교회에서 신실한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렇게 인도하는 수종을 드는 것이다.
목사를 신격화 시키지 말라. 그건 이방종교요 이단자들이요 그건 기독교가 아니요 사교다. 아무리 기독교라도 인간을 목사를 무슨 능력이 있다고 해서 신격화 시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광야외치는 자의 소리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너희는 주의 길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한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너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으로 지은 그 분이 오신다. 그러니 우리가 그 분을 만나자.’ 이걸 한 번 생각을 해 봐라. 어느 종교가 인간 자기를 지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만능의 능력자를 만나라고 하느냐? 세상 그 어떤 이방종교가 그런 게 있느냐? 없다. 그러니까 이방종교 귀신단지 그런 건 발아래 밟아라. 그런 건 신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이 되니 그 모양으로 잡신을 믿고 있다. 잡신을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의 정신과 사고방식이 정확하지 못하다. 그러니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건전하지 못하고.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오시면 너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쉽게 만날 수 있도록 마음과 정신바탕을 옥토 밭처럼 잘 닦으라는 것이다. 가시밭 같은 마음, 돌짝밭 같은 마음, 다져진 길바닥 같은 굳은 마음, 모나고 구부러지고 비뚤어지고 썩은 냄새나는 마음,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 받은 지식을 모두 바꾸자 그 말이다.
1절에서 말씀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시작이면서 먼저 거기에 사자가 나온다. 한국에도 옛날에 왕이 먼저 나가는 게 아니라 왕 앞에서 ‘비켜라. 왕이 나가신다’ 하며 신하들이 먼저 나간다. 도로에서도 구급차가 환자를 싣고 달려가며 사이렌을 불면 다른 차들은 피해준다. 그 환자를 위해서 차가 동원된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당신의 사자들을 먼저 보내서 길을 닦게 한다. 이게 신앙의 이치다.
우리는 예수님이 마지막에 오실 때까지 신실한 종을 찾고 그 메시지를 받아야 주님이 오시면 그 주님을 맞을 수 있다. 그 다음에 현재적으로 개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도 역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잘 가르쳐 주는 교회로 가서 그런 종을 만나면 인격적 결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돼 있다. 신앙의 이치가 그렇다. 자기 혼자 예수 믿겠다고? 그건 평생을 가도 잘 못 믿을 수 있다.
구약시대부터 마지막 시대까지 신실한 종을 만나야 바로 믿을 수가 있다. 아무 교회나 함부로 발을 디뎠다간 큰일 난다. 교회란 원칙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들어가야 구원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화 되는 게 나오는 건데 아무 교회나 잘못 들어가면 큰일 난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옳은 말씀을 들음으로 해서 신앙이 깊어지고 믿음이 생긴다. 왜? 살아있는 말씀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말씀의 역사는 바로 자기 속에서 인격의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사람을 바꾸어 놓기 때문에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보냄을 받은 생명과를 먹은 광야사상은 무슨 말을 하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말이다. 역시 설교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것이라야 설교다. 모든 교회가 성경을 가지고 말씀을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만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감화 감동이 되는 거다. 이게 성령님의 역사다. 다시 말하면 이게 자기가 참 사람으로 되어지는 과정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참 사람이고 뭐고 소용없고 돈만 많고 부자로만 살면 된다. 그러나 기독교 예수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잡아 돌리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참 사람, 참 하나님의 자녀, 실속 있는 알곡처럼 여무는 성도로 만들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마귀가 보낸 사자는 선악과 따먹은 인간기준 자기기준 세상기준 사람들 뜻에 맞춰서 외친다. 세상의 뜻에 맞춰서 외친다. 그런 교회 인도자를 만나면 미래적으로 보면 영인성장 면에 저주와 멸망을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낸 사자는 반드시 광야사상으로 광야에서 산다. 이건 은둔생활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정신이 들어있다. 신앙 인격 면에서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낸 종은, 사자는 도시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광야사상에서 사는 거다. 그리고 교회를 성도를 광야사상으로 인도해 낸다.
구약적으로 보면 말씀을 받고 하나님과 만나고, 그 다음에 광야생활을 하면서 훈련 연단을 받으면서 가나안을 향해 가게 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삶이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천국을 향해 가는 것이 바로 광야생활이다.
이 세상은 영원히 가는 곳이 아닌 임시적인 곳이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은 광야 같은 세상이다. 그러니까 이런 세상에 살면서 사람을 만나고 훈련 연단을 받으면서 말씀을 붙잡고 가는 것이다.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면서 광야 같은 세상을 거쳐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도원 같은데 갈 필요가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 성경 보고 기도하고 싶어서 조용한 장소를 찾을 수는 있지만 굳이 꼭 그런 곳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종은, 마귀의 종은, 거짓 종은, 이단자들은 성경구절을 이용을 하면서 성도들을 애굽 같은 세상 안으로 끌고 간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소원 목적하게 만들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이루라고 하는 것은 세상 길 넓은 길 사망 길 멸망 길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사람이 더 악해진다. 왜 악하냐? 하나님 앞에 영적인 사람으로 영인성장이 잘 되도록 해야 하는데 그 면을 죽이니 그렇다. 마음을 빼앗아서 세상 쪽으로 향하게 하니 말씀 깨달음으로 속사람이 자라는 그 면은 싹 죽는다.
우리의 중생된 영은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세상을 구하는 세상 부요성은 못 먹는다. 육은 물질을 먹는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다.
우리 속에 중생된 영이 있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을 들을 때 이 영은 자기 인격의 주체성으로서 이 영을 새사람 또는 속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새사람이 이성과 몸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촉구하고 권고 권면을 한다.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는 이 영인성장은 이 속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이성도 생각도 마음도 전부 새사람을 따라 움직이면 몸은 의의 병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대로 사용이 되는 것이니 이 때 우리의 영은 성장을 하는 것이고, 이성과 몸은 성화가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면을 목적을 하고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직장도 나가고 해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은 그건 없고 그냥 눈으로 보이는 현실적인 것만을 보고 소원 목적하고 나간다. 소원 목적이 완전히 세상이다. 이들은 영인은 없고 모르고 자라는 것도 없다. 그러니까 물질 이해 타산적으로만 자꾸 소원 목적하고 산다. 사람이 그렇게 되면 사람이 못써져 버린다. 하나님 앞에서 몹쓸 사람이다.
자기를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만든 것이 분명하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게 믿는 거다.
4절: 회개의 세례가 무엇이냐? 회개는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아 세상을 하나님처럼 소원 목적하고 살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자의 말을 듣고, 그러니까 사자의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자의 말을 듣고 이제는 천국을 소원 목적하고 살아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소원 목적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그 소원 목적대로 바로 잡았다면 그 증거로 물세례를 받는 것이 세례다.
요단강가에서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주었다. 그러니까 이 물세례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서 세상을 향하던 소원 목적이 잘못된 줄 알고 세상 쪽이 아닌 하나님 쪽으로 천국 쪽으로 소원 목적을 가지는 것이 들어있다.
우리가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살면 전부 부자가 되고, 천국 목적으로 살면 전부 빌어먹느냐?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인격 면에서 망했다. 부자로 살고 잘 먹고 잘 살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머리가 망가졌다.
사람의 머리는 왜 위에다 달아놨느냐?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이다. 돼지는 왜 머리를 옆에다 달아놨느냐? 돼지는 머리가 옆에 있어서 땅만 자꾸 쳐다보게 돼 있다. 짐승의 모든 눈이 그렇다. 그러면 사람의 눈은 왜 앞에 달았느냐? 뒤를 보라는 거냐, 앞만 보고 가라는 거냐? 하나님을 머리로 삼고 앞만 보고 나가라. 그러면 눈이 밝으면 모든 것이 분별이 된다. 신앙의 뜻을 가르쳐 주려고 인간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
회개를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된다. 사실 나의 소원 목적을 땅에서 천국 쪽으로 돌렸다면 여기에는 이미 죄 사함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믿어가면서 과거 믿기 전에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는 거다. 모든 사상 정신 소원 목적, 지식적으로 잘못된 거, 성품적으로 잘못된 걸 낱낱이 고쳐가는 게 죄 사함이다. 하나님 앞에 비뚤어지고 잘못된 건 다 죄다. 이걸 바로 잡으면 사함이 되는 거다. 공부 못하는 것에서의 회개는 공부 잘하는 것이 회개가 된 것이다.
죄 사함의 기준은 하나님이 기준이니 이것을 기준을 해서 앞으로 나가면 된다. 그러면 이제 그거는 죄가 사해진 것이다. ‘뭘 잘못하고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것보다 더 빠르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면 된다. 그러면 내가 잘못한 건 하나님께서 생각을 안 하신다.
시험에서 0점을 맞았느냐? 그러면 부모님보고 ‘아이고, 앞으로 100점 맞겠습니다’ 그 소리 안 해도 100점만 맞아 와라. 그러면 0점짜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이미 사함이 된 것이다. 틀렸으면 바로 잡아라. 그러면 죄 사함이 된 거다. 이제 앞으로만 가면 성장이 되고 실력화 되는 거다.
죄 사함의 기준은 하나님이 기준이다.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고 타락된 일반세상의 윤리 도덕적 기준에서 보는 죄 사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서 이탈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 죄 사함이다. 이것을 바로 잡지 못하면 죄 사함이 안 되니 형벌이요 멸망이요 심판이 되는 거다.
회개의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려면 어디로 나가야 하느냐? 목사 앞으로 나가야 하느냐, 광야로 나가야 하느냐? 이 말의 의미를 알겠느냐? 광야. 광야로 나가려면 문화 예술도시 과학도시 정치도시 종교적인 도시를 등 뒤로 하고 나가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살고 있다면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이 없는 애굽백성과 같은 정신으로 사는 것과 같다. 결국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형벌로 죽게 된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효력이 없는 거다.
예수를 믿어도, 충성봉사를 열심히 해도 자기 속에서 영인성장이 안 되면 세상 것으로 소원 목적을 하고 있으니 이건 광야생활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바로 믿는 본질적인 생활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도 왜 그렇게 헛되게 믿느냐?
세상 것을 달라고 안 하면 하나님이 세상 것을 안 주느냐? 예수 안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를 안 해도 저렇게 잘 사는데 믿는 자가 세상 것을 달라고 하면 좀 팍팍 주지 달라고 해도 왜 안 주느냐? 네 마음대로 주면 네가 그 날로 죽는다. 죽을까 싶어서 안 준다. 아닌 말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몇 억을 턱 안기면 그 날로 죽는다. 세상 사람들이 가만 두지를 않는다.
믿는 사람이 일반적인 생활은 일반상식 면에서 살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로 믿고 가는 여기에는 네가 존귀 영광자가 된다. 참 사람이 된다. 참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세상 것은 이용 활용 사용물이다. 사람이 바로 됐으니 세상 것을 사용 활용이 적중적으로 바로 들어간다. 그러니 그 생활이 얼마나 반듯하고 그 가정이 반듯하고, 그러니 어찌 밥을 빌어먹겠느냐? 사람이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자기를 다스려 나가는데 왜 밥을 빌어먹겠느냐?
믿는 자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생활은 그냥 자동적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 부자로 살고 가난하게 살고 그건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바로 됐느냐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네가 영모의 미모의 사람으로 얼마나 잘 가꾸어졌느냐’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에스더가 영모의 미모성을 잘 닦아놓으니 하나님이 막 올린다. 그런데 인간의 머리가 좁아터져서 이게 안 믿어진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나간다. ‘애굽에서 교회 합시다’ 하지 않고 광야로 데리고 나간다. 왜 광야로 데리고 나가느냐?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참 사람으로 훈련 연단을 받게 해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통째로 그 유업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애굽백성은 이건 없다. 역사로 통해서 보여준다.
거짓된 종은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꾀어서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받은 애굽으로 자꾸 돌아가자고 반역을 일으키다가 광야에서 하나님이 형벌에 다 죽는다. 그러니까 다 모세를 따라 나온 것 같으나 따라 나와서 광야에서 무슨 운동을 하느냐?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이게 오늘날 이단자들이요 거짓된 종들이다. 교회에서 세상 부자 되게 해 달라는 그런 정신을 가르치는 것은 주님의 반역자들이다. 오늘날 그런 교회가 많다. 그런 인도자도 많다.
사람을 자랑하면 안 된다. 말씀의 이치만 바로 깨닫고 그 말씀의 이치를 자기 실상화 시키고 인격화 시키고 하라. 그게 참 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걸 종교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전도서에 있듯이 여호와 하나님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게 네 본분이다. 본분이란 하나님을 섬길 존재로 인간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살 길은 어디에 있다는 거냐? 자기의 살 길은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이 15년 이상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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