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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욘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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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요나서 1장:1절-17절/작성자:주께하듯하라!
찬송 : 229장 아무 흠도 없고
하나님께서 요나를 찾아왔습니다. 일부러 찾아 온 것입니다. "요나야, 니느웨로 가서 내 말씀을 좀 외쳐야겠다. 요나야, 내가 알지, 잘 알고 말고. 니느웨 사람들이, 그 앗수르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아픔을 안겨준지 내 잘 안다. 그래도 요나야, 그래도 한 번은 외칠 것이 있다. 외쳐다오."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매몰찹니다. 등을 돌립니다. 얼굴을 획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멀리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 항구로 내려갑니다. 마치 춘천으로 가라 했더니, 저 멀리 백령도로 도망치려고 인천항으로 내려가는 모양입니다. 단호한 불순종이며 강렬한 반항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니느웨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악의 축인 저들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니느웨가 이스라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들은 아니에요. 말도 안돼요. 이건 하나님이 틀린거에요. 왜 그러세요. 정말.."
요나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거친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은 실은 단순한 불순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반항도, 객기도, 자기 성질머리도 아닙니다. 요나의 '자기 고집'입니다. '자기 옳음'이며, '자기 의' 입니다. '이건 내가 맞다. 나만 옳다. 하나님까지도 틀린거다.' 이 수준까지 간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소품이었죠. 친히 큰 폭풍을 연출하셨습니다. 배가 거의 깨어져 좌초 일보직전입니다. 벌써 배가 30도나 기울여져 있습니다. 사공들도, 선장도, 사람들도 난리입니다. 야단법석이죠.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서 쿨쿨 잡니다. 고집피우느라 피곤했을까요? 멀미가 심해 앓아 누운 것일까요? 잠귀가 어두워 난리법석을 못알아챈 것일까요? 아닙니다. 요나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12절에 요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풍랑은 내가 하나님께 등돌려서 그런거야. 나 때문에 너희가 이 풍랑을 만난거야." 지금 요나는 풍랑도 알고, 풍랑을 보내신 하나님도 압니다. 그런데 잡니다. 이건 고집입니다. 요나의 독한 고집. '할테면 해보라. 될 때로 되라. 무서울 거 없다. 차라리 죽여라. 그럼에도 나는 절대 고집 못 꺽는다.' 이것이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선원들 모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 요나에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자기 고집만, 자기 옳음만 서슬퍼렇게 살아있을 뿐입니다. 요나는 뱃 사람들에게 차라리 자신을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외칩니다(12절). 이는 회개도 헌신도 희생도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끝까지 완고합니다. 자기 죽음으로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 옳음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입니다. 던져지면 던져졌지, 죽으면 죽었지, 결코 무릎굻지 않겠다는 독한 고집입니다.
우리 인생의 고집이, 우리의 독한 자기 숭배가 이를 꼭 닮았음을 부인 할 수 있습니까? 세살 어린아이의 고집은 귀엽고 유치하기나 하지, 우리의 고집은 끈덕지고 집요한, 도저히 스스로는 끊어낼 수 없는 '자기 우상' 아닙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고집보다 더 집요한 고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고집입니다. 고집불통 요나를 하나님께서 결코 놓아버리지 않습니다. 저 멀리 도망치는 요나에게 풍랑을 보내시면서까지 막아서는 하나님의 고집. '요나야, 그만. 이제 멈춰야지.' 차리리 죽어버리겠노라고,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악다구니를 발하던 요나에게 큰 물고기까지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고집. '요나야, 이리로 오거라. 나 너 못 놓는다.' 그리고 물고기 입으로 품어버리시는 하나님의 그 고집.
요나가 언제서야 회개하는지 아십니까? 풍랑을 만나고, 환란을 만나고가 아닙니다. 바다에 던져지면서도 아닙니다. 물고기 뱃속에 삼켜지자마자도 아닙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이 지난 후에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보다 강하고 크신 하나님의 고집과 집요함에 두 손을 들고 만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질려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여기까지 찾아오십니까? 이런 나까지도 포기치 않으십니까? 이 못난 나도 품어 버리십니까? 내가 졌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지 '나 잘못했어요.'하는 후회와 뉘우침, 반성문이 아닙니다.
떠나 버리고 싶은데 떠날 수도 없는,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는, 내 맘대로 등지고 박차고 뛰쳐나갔으나 결국은 돌고 돌아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하나님 품 안 임을, 나를 그렇게 끝까지 집요하게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확인하며, "하나님, 정말 하나님 아버지이시군요..." 그 탄성과 무릎꿇음이 회개입니다.
'내가 정말 이런 수준 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구나' 를 매번 확인해가며 한숨과 신음, 불만족스러움과 못마땅함, 때로는 절망스러움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꼭 끌어 안아버리시는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이 회개의 시발점이며 신앙의 본질입니다.
처절하리만큼 나 자신의 모자람과 부족함, 완악함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동행하기를 부끄러워 하시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얘가 내 아들이에요. 얘가 내 딸이에요." 하고 자랑스럽게 목소리를 높여 외치시는 그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진짜 신앙이라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집요한 긍휼과 자비 앞에 우리는 항복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 자리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이끄시고 끌고 가십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죠. "내가 뛰어 들게요. 이 한 몸 희생하여 모두를 살리겠나이다. 이 몸 불살라 순종하여 영광을 돌리겠나이다." 그런 그럴듯한 미사어구가, 어줍잖은 흉내내기가 신앙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여러분? '내 고집을 내려놓아야지...' 그런 결단도 다짐도 하지 마십시다. 우리에겐 그런 실력과 수준이 모자랍니다. 한참 모자랍니다. 나 자신의 고집불통과 나 자신의 옳음과 평판을 집요하게 챙겨먹는 자기 우상에 능한 '나'임을 인정하십시다. 그리고 이런 못난 인생을 나보다 더 강한 고집과 집요함으로 나를 찾아오시고, 심지어 십자가 죽음까지도 마다치 않으시고, 나를 붙드시는 그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기대고 또 기대어 오늘 한 날도 살아내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요나의 지독스러운 고집,
탕자의 못난 고집이,
우리의 고집을 꼭 닮았음을
어찌 우리가 '아니다'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의 고집보다 더 강하고 집요한
하나님의 고집으로
요나를, 탕자를, 아니 나를,
끝까지 품어버리시는,
결코 우리를 피곤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만 기대고 또 기댑니다.
그렇게 우리는 은혜만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사오니,
주님 부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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