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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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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86023320 |
2009년 8월 2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설교제목 : 멍에의 영성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세상 이야기>
요즘 들어서 세상이 자꾸만 ‘사나워진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깐깐해지고’ ‘영악해지고’ ‘똑똑해지고’ 있습니다. 빈틈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바늘 끝처럼 각박해지는 세태입니다. 뭔가 편안하고, 허술해 보이고, 바보스러운 이는 찾아보기 힘든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고, 비극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즉 모든 이가 피곤하고 힘겨운 인생살이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요즘 며칠 동안 제 마음 가운데 떠오르는 풍경 하나는 ‘느티나무 아래의 평상’이었습니다. 시골의 마을마다 대개는 ‘평상이 놓여져 있는 느티나무 공원’이 하나씩은 있습니다. 그 작은 공원에서 시골마을 사람들은 더위를 식히곤 했고,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제가 자란 시골마을에도 나무의 나이가 300년은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 작은 공원에서 우리는 자주 놀았고, 농사일에 지친 마을 사람들이 피곤한 몸과 마음을 쉬곤 했습니다.
요즘 들어서 ‘느티나무 같은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그 그늘 아래서 편안하게 쉴 수 있을 만큼 ‘관대한 사람’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리 까다롭지 않고, 그래서 이런 저런 예의를 차려도 되지 않는 사람,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평안한 친구’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안진 씨가 쓰신 시 중에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은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나도 괜찮고 ….” 요즘 제 마음이 조금 그렇습니다.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편안한 친구 같은 사람이 그리운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요즘 들어 제 마음 가운데 묵상한 성경구절은 ‘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의 말씀은 참 매혹적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태 11:28). 하루하루 힘겹고 노곤한 삶을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무나도 반가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로 가면 ‘쉼’을 얻을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소식입니까?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비신앙의 백성들을 유인했습니다. 특히 순복음 계통의 교회들이 ‘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를 자주 애용했습니다. 그만큼 쉼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은 매혹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음 말씀으로 내려가면 우리는 머리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예수님께서는 분명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멍에’라. ‘멍에’란 무엇일까요?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쉼을 원하는 자들에게 ‘멍에’를 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순과 역설을 어찌 풀 수 있을까요?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부족하지만 제 나름으로 한 번 풀어보겠습니다.
<성경의 해석>
‘멍에’는 말이나 소를 그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장치입니다. ‘멍에’를 멘 소는 그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지만, ‘멍에’를 메지 않은 소는 주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얼핏 생각해보면, ‘멍에’를 메지 않은 소가 더 자유롭고, 더 평화롭고, 더 행복할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 어쩌면 정반대입니다.
‘멍에’를 멘 소는 소아(小我)의 뜻대로 사는 이가 아니라 대아(大我)의 뜻대로 사는 이입니다. 멍에를 멘 소는 사사로운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혀서 사는 겉껍질의 나(我)가 아니라 본질적인 생명과 하늘의 섭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알맹이의 나(我)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멍에를 멘 소가 그 마음 가운데 참다운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결론적 말씀이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예수님의 짐은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예수님 일 개인의 소아(小我)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대아(大我)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적용>
참다운 안식이 깃든 ‘쉼’을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나의 소아를 버리십시오.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열정, 나의 욕심, 나의 꿈, 나의 희망 … 즉 나의 겉껍질적인 것들을 다 버리십시오. 그 대신 참 나의 생각, 참 나의 마음, 참 나의 열정, 참 나의 욕심, 참 나의 꿈, 참 나의 희망 … 즉 참 나의 알맹이적인 것들을 찾으십시오. 나의 대아를 회복하십시오. 그러면 행복한 안식의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 나의 멍에를 스스로 어깨에 걸머지고, 그 참 나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에게 참다운 행복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오늘 메시지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멍에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멍에의 영성’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언제나 어디서나 자비의 마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넓으신 은총과, 진리의 동반자로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여기 고개 숙인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어디서나 풍요로우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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