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출3:7-10 |
---|---|
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86767809 |
2009년 8월 16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출애굽기 3장 7절~10절
설교제목 : 광복의 대장정
<영성적 혁명 이야기>
이른 바 ‘영성’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분들 중에서 역사적인 현실에 대해서 애써 무관심한 경향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현실과는 담을 쌓고 그들 자신의 심리적 혹은 내면적 신비체험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현실이 곧 영성적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두 발이 서 있는 땅, 그 역사적 현실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영성적 현실인 것입니다. 역사적 현실이 영성적 삶의 소재이며, 또한 그 동시에 역사적 현실이 곧 영성적 삶의 최종적 목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현실에 애써 눈 감고, 그의 내면적 신비체험에만 몰두하는 영성은 크게 잘못된 것이고, 너무나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정신세계사’ 이야기).
그런데 이런 경향과는 정반대로, 영성을 말하는 이들 중에서 역사적 현실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도 보게 됩니다. “역사적 현실을 ‘정의롭게’ 개혁해야 한다”는 명분론에 사로잡혀서 모든 영성적 삶의 에너지를 그곳에 쏟아 붓는 이들이 있습니다. 1970년대 소위 민중신학에 입각해서 목회하던 분들과,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만행에 분노한 나머지 그를 암살하려 했던 본 훼퍼 목사가 그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잘못된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내면의 영성을 무시한 채 오로지 외면적인 상황변화에만 몰두하는 방식은 결국 그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간디’식의 대안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간디의 방식이 맞다고 봅니다. 간디는 인도 사회의 개혁을 위해서 온 몸을 바친 사람입니다만, 그는 언제나 한 사람의 위대한 영혼으로서 그 스스로의 내면 닦기를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간디에게 있어서 인간내면의 닦기와 인도사회의 개혁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 스스로의 내면을 닦는 일을 통해서 인도사회를 개혁하려했다는 점이 간디의 지혜로움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간디가 인도를 무력으로 통치하고 있던 영국에 대해서 대항한 방식은 비폭력 무저항운동이었습니다. 즉 영국의 제국주의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간디는 인도인들이 ‘진리’에 합당하게 사는 삶으로서 영국 제국주의 사회에 대항했습니다. 영국의 제국주의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이 진리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리파지운동(眞理把持運動)이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간디의 제자였던 비노바 바베는 부유한 인도인들을 설득해서, 그 땅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비노바 바베가 선택한 방식은 폭력혁명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도의 부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했습니다. 즉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토지를 나눠 쓰는 일이 진리에 합당한 일임을 설득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방식이 영성적인 혁명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광복절 이야기>
어제는 광복절(光復節)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민족의 현실은 어떤가요? 빛된 나날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깊은 어둠 중에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와중이고, 우리 민족을 둘러싼 제국들, 즉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의 눈초리는 여전히 매섭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우리 민족의 현실은 조선조 말엽과 별 차이 없고, 우리 민족 5천년 역사의 비극적 상황에서 별반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둠의 나락에서 고통 받고 있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저는 간디식의 민족운동을 생각하면서, 이와 아울러서 모세의 개혁운동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 이야기>
성경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출애 3:7~10) 】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안하신 ‘대안’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대장정의 길’이었습니다. 즉 폭력적 혁명으로 이집트의 제왕들을 몰살시켜버린 후, 개혁적 왕조를 세우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개혁은 뿌리부터 새롭게 세워나가는 근본적인 것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애굽을 탈출하는 대장정의 길을 시작하는 것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개혁적인 왕조를 세운다고 해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는 달라질까요? 죄송하지만 크게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이집트 제국의 구조상 누군가는 그 피라미드식 사회의 맨 아래 계층을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개혁왕조가 들어선다고 해도, 그 왕조는 피라미드식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고, 피라미드식 사회를 만드는 한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 피라미드의 맨 아래 계층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개혁은 곧 대장정의 개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출애굽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설교의 결론>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광복의 대장정’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광복의 대장정’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