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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위가 4월 15일 오후에 제암리 마을에 들어와 유시와 훈계를 한다고 기독교도들을 모두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32명이 교회당에
모였으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때 그 중위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예배당에 있던 한 부인은 갓난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내고 병사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 했으나 병사들은 내민 어린아이의 머리를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는 민간인 학살현장인 화성 제암리교회의 참사
현장을 목격한 전동례 할머니의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군은 학살 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두 번 죽인 셈이지요. 이때 갓난아이를 업은
김씨 부인 (1899 ~ 1919. 4.15)도 현장에서
참혹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씨 부인은 남편 강태성과 함께 화성 출신으로 제암리교회 참사가 일어나기 전인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냈으며 일부 양심 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 등에서는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여 일본군의 만행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남편 강태성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한 김 씨의 나이는 꽃다운 21살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이러한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일본은 반성은커녕 또다시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정권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깨고
있습니다. 오늘 화성 제암리 교회 민간인 학살 사건을 되돌아보며 우리의 마음가짐을 다시 추슬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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