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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암3: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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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아모스 3장:1-15절
찬송 322장
<대천덕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라는 책에서 대천덕신부는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대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는 예후의 혁명으로 많은 지주들이 숙청되었으나, 예후의 4대손 여로보암 2세가 장기 집권하면서 (표면적으로) 번영을 구가하는 동안, 그 이전 오므리 치하에서 맛보았던 사치 생활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되살아났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에 의해 뒷받침되었던 상류 계급의 모든 생활 방식-상아 궁전, 주연(酒宴), 과식, 향락과 음악에 대한 탐닉-은 농부 출신 선지자 아모스에 의해 성경에서 가장 신랄한 언어로 정죄 당했다. 글을 쓰는 선지자는 아모스가 처음이었지만, 그를 뒤이어 호세아, 미가,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 같은 뛰어난 선지자들이 나타났다.”
이스라엘이 번영의 한 복판에서 실패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은 특별히 유사 이래 최고의 풍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 중에 오직 이스라엘만 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셨다는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고 교통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만민가운데 이러한 대접을 받은 민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그들이 뛰어났거나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만민 중에서 가장 작은 족속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다른 민족의 노예로 살던 민족이었습니다. 창세기 18장 18절,19절에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18:18-19)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셨다고 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기 위해 택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의롭고 공의롭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 보좌의 초석이기 때문입니다(시97:2).
‘정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는 이웃을 참소하지 않으며, 이웃에 대해 악을 행하지 않고 훼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리고 어려운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기꺼이 그들을 도울 때 그는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결국 ‘정의’는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삶과 긴밀히 연관 되어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이러한 진실한 자세는 경제적인 거래에서도 일관되어야 합니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추를 넣어서는 안 되며, 공평한 저울과 추, 그리고 공정한 되를 사용해야 합니다.(레19:36,신25:15,겔45:10)
‘공의(공평)’는 부당하고 불의한 강자와 유력한 자들을 견제하고 약자들을 보호하는 사법적인 정의를 말합니다.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진행하면 안 됩니다(신27:19). 탈취당한 사람을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합니다(렘22:3). 뇌물을 받지 말고,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그 사회는 ‘공의’가 실행되는 사회가 됩니다. 사실 ‘정의’와 ‘공의’가 담고 있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와 ‘공의’의 핵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긍휼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정의’와 ‘공의’를 잃어버렸다고 질책하십니다. 그것은 곧 죄악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에 대해 보응하시겠다고 합니다(2절). 하나님은 아스돗과 애굽사람들로 하여금 사마리아 성중에 횡횡한 ‘요란함’과 ‘학대’를 보게 하라고 합니다(9절). 이 말은 법과 질서가 파괴된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서로 떠드는 모습이며,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하여 빼앗거나 권력이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공갈하고 협박하며 괴롭히는 상황을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위정자들은 폭력과 강탈로 탈취한 재물을 자신들의 성 안에 쌓아놓고 있다고 하나님은 지적하고 계십니다(10절).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받은 율법 속에는 예배의 형식에 관한 조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법’과 ‘도덕법’에 관한 조항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이웃을 대하는 삶의 태도와 방식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인 가치를 지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의 범위도 매우 좁게 개인적인 영역으로만 제한하였기에 ‘정의’와 ‘공의’를 잃어가는 사회와 그 속에서 억울한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에 대하여 점점 할 말을 잃어가고 있으며, 그 역할 또한 점점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풍요와 부요함, 성공에 대하여는 모든 설교와 기도와 공부 속에서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아모스의 외침 앞에서 우리는 화려함과 풍요는 얻었지만 정작 중요한 ‘정의’와 ‘공의’는 잃어버렸기 때문에 ‘포학’과 ‘겁탈’을 용납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정의와 공의,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 그리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불의에 대해 무감각하며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다면 우리 사회는 아모스가 겪었고 외쳤던 대상과 동일한 사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개인적 신앙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 또한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영적 가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예배와 기도 속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삶이 회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로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녀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특히 피해를 당하기 쉬운 약한 이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참된 ‘정의’와 ‘공의’를 우리의 언행과 태도 속에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학대와 포학과 겁탈에 침묵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옵시고, 부요와 풍요만을 쫓아가는 죄악 된 걸음에서 날마다 돌이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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