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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1: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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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92264974 |
2009년 11월 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사도행전 11장 19절~26절
설교제목 : 그리스도인, 그 이름에 걸맞는 인생으로
<나실인 수도원 이야기>
몇 해전 충청도 옥천 지방에 있는 나실인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 계신 분들이 하셨던 말씀 중에서 지금도 기억나는 말은 ‘예수인’이라는 용어입니다. 오래 된 일이라 흐릿하지만, 제가 기억하기에 그분들이 사용한 ‘예수인’이라는 말은 조금 더 ‘육화된 기독교인’, 그러니까 관념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예수님을 좀 더 확실하게 닮아가는 사람의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물론 학술적인 차원에서 ‘예수인’이라는 용어가 가능한 것인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 ‘예수인’이라는 용어가 참 좋았습니다. 제게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닮는다고 했을 때, 관념화되거나 철학화된 예수상을 생각하기 쉬운데, ‘예수인’이라는 말은 그런 허황된 예수상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예수상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살아있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에게도 말을 붙여서, 주 예수를 전하였다. 주께서 그들을 돌보시니, 믿게 된 수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듣고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해서,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께로 나아왔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사도 11:19~26)】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서 운영되던 안디옥 교회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록이 오늘 성경말씀에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기록이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참으로 중요한 영성적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어떤 특정한 이름을 얻을 만큼 인정받는다는 일이 굉장히 어렵고도 힘겨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차원에서 다시 말씀드리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2천년 역사 동안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목수 이야기>
제가 건축현장 일을 하면서 느끼는 바는, 사람들에게 기술자로 인정받기가 참 어렵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인색한 점수를 줍니다. 여기 한 사람의 목수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사람을 글자그대로 ‘목수’라고 인정하게 되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사람이 목수다운 재능과 역량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 사람을 ‘목수’라고 인정해 줍니다. ‘목수’라는 이름을 얻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디 ‘목수’뿐이겠습니까? 다른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지역의 토착민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웬만큼 잘해가지고는 인정받지 못하는 풍토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있습니다. 보통 철저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서 우리의 궁금증이 시작됩니다. 안디옥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길래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던 것일까요? 무엇이 그 비결이었을까요?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 이야기>
저는 그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오늘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제가 보기에 그들이 “박해 때문에 흩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약에 이스라엘 땅 본토에서 편안하게 잘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씩 참고하면서 별 고민 없이 살았더라면, 그들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낯설고 물 설은 이방 땅에 흩어져 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놀라운 하느님의 진리를 붙잡고 처절하게 씨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책 이야기>
저는 최근에 『예술가로 산다는 것』(박영택 지음, 마음산책)을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숨어 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을 부제로 택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전국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미술가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미술가는 그냥 평범한 미술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이 택한 미술의 세계에서 괄목상대(刮目相對)한 진보 혹은 일생일대(一生一大)의 창조를 열어젖히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고독한 투쟁의 길로 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여 마침내 그들은 비전문가가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너무나도 탁월한 예술적 경지를 개척해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얻어낸 ‘화가’라는 이름, 혹은 ‘예술가’라는 이름은 쉽게- 심심풀이 땅콩식으로 얻어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거는 수행적 도전을 통해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적용>
이제 우리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함부로 쓰고 있습니다. 정녕 그대들이 ‘그리스도인’이신가요? ‘예수인’이신가요? 저 역시 이 질문 앞에 커다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찬찬히 묵상해 보십시오. 잘 탐구해 보십시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란 결코 심심풀이 땅콩식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무거운 것이었고, 깊은 것이었고, 높은 것이었고, 좁은 것이었고, 드넓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 혹은 ‘예수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워지려면 그에 걸맞는 ‘무게와 깊이, 높이와 넓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그리스도인, 그 이름에 걸맞는 인생으로’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그리스도인에 걸맞는 인생으로’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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