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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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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추응식 형제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34454 |
나는 왜 ‘착한장터’를 만들었나
(고전12:21-22, 마태복음 6:24)
2013년 4월 14일 주일예배
추응식 형제(신구대학교 산업디자인과 교수)
바닥에 깨어진 유리조각이 흩어져 있습니다. 일견 위험하고 거칠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리의 입장에서 보면 깨어질 불안이 없어진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를 찾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관적인 관점일지 모르겠습니만, 오히려 저 유리창에 달려 있는 저 유리는 언젠가 깨어질 불안을 안고 매달려 있습니다. 더 이상 부서질 위험이 없어진 유리의 상태는 죽음과 같은 안정일지 모르겠습니다.
종교는 존재의 근원을 찾아 간다지만, 기독교는 이런 죽음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죽음조차도 삶의 수단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고, 죽은 자는 세상에 끼어 들 자리가 없다고 전도서 9장은 명료히 말하고 있습니다. (9장 4-6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으로 함께 모인 여기 형제자매님들이 늘 생각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십 몇 년 전, ‘너희 집 잘 사니?’라는 제목으로 이 자리에서 말씀 증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잘 산다"라는 말은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이 말이 여전히 ‘돈 많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가 돈에, 자본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성서는 욕망의 절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1:15)’ 같은 성경구절을 목사님을 따라 얼마나 많이 읽었습니까? 또 어떤 분은 ‘인간은 절제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현세가 제공하는 욕망거리를 충족하는 정도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을 성취하는 것이 곧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세뇌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 구조이자 이데올로기입니다. 이 속에서 하늘법에 따라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사실 어렵습니다. 하늘법은 욕망을 절제하라하는데, 시장은 소비가 미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늘법과 땅의 현실 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있기 때문에 예수따르미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여기에 관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정치홍보 일을 할 때, 소위 운동권 출신의 국회의원 후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와 정의를 위해 깨끗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번 선거도 공명정대하게 치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한마디로 말했습니다.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 여기는 지금 하늘법과 땅의 법이 다릅니다. 상대방이 다리를 하나 놓겠다고 하면, 우리는 근거를 만들어 2개를 놓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소위 손해보고 판다고 하는 시장관행을 여기서는 더 강하게 말해야 합니다. 어느 법을 따를지 여기서 선택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후보는 한참 후에 말했습니다. “땅의 법을 따르겠습니다”
다음은 과거 진보 잡지 말지에 제가 썼던 내용입니다. 기독교가 삶을 말하듯 그림이라는 것도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입니다. 그렇지만,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을 위하겠다던 민중미술은 민중의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핍박받는 민중은 그림의 소재를 제공하였을 뿐 정작 그 그림의 대부분은 돈 많은 사람의 것이 되었습니다. 시장이 이념도 구매한 격이죠.
세 번째는 일반시장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5만원짜리 슛돌이 신발을 사달라고 졸라댑니다. 엄마는 만원짜리 왕자표신발도 품질이 비슷하니까 그걸 사자고 해도 아이는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때를 씁니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비슷한 품질의 운동화를 비싼 값으로 사주게 됩니다.
이제 아이는 슛돌이 신발을 신음으로써 왕자표를 신은 촌스러운 아이와는 차별화됩니다. 이 차별화가 아이의 행복이 되고, 아이의 행복은 가정의 화평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결국 시장이 욕구(불안정)을 만들고 돈이 해소한 것입니다. 이 시장은 늘 신상품이라는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 화평은 일시적인 것이며, 욕구와 여기에 대한 해소는 반복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장은 성장할지 모르지만, 행복은 결코 신장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장의 욕구는 대부분 이기적이며, 그것은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장의 유혹은 참 강합니다. 그것은 시장의 현란한 제품이 재물의 모양으로 오지 않고, 갖가지 우상으로 변신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슛돌이 신발은 신발이 아니라 이미 신분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몰고 온 빨강색 스포츠카는 자동차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코카콜라는 젊음이며, 박카스는 피로해복제입니다. (피로회복이 됩니까?) 큰 교회는 안정된 교회고, 작은 교회는 늘 개척 중입니다. 돈 많은 교회는 하나님 일 많이 하고 돈 적은 교회는 적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재물은 신분으로, 사랑으로, 때로는 성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이 힘이 얼마나 강했으면,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극한의 배고픔 속에서도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으심으로 우리가 선택할 길을 명료히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시장의 홍보 일을 하고, 또 가르쳐왔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비싼 슛돌이 신발 안사주면 보채라고 부추기는 일을 해 왔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현재 자본주의 하에서 하늘법과 땅의 법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각 지체들의 고유한 형상과 신성한 역할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마음대로 재편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 지체들의 고유한 형상과 역할은 서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하나님 질서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의 도구를 교환하는 시장은 애당초 이런 역할을 모조리 돈의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창녀나 세리, 문둥이까지 가까이 하시면서 사람의 높낮이가 없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셨고, 그것은 윤리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원리라고 가르쳐 주셨건만, 시장은 이 원리를 사람보다는 돈, 돕기보다는 경쟁, 절제보다는 욕망, 나눔보다는 소유, 사랑보다는 이익, 희생보다는 성취, 평등보다는 차별, 병든자 보다는 건강한 자, 가난한 자 보다는 부유한 자가 대접 받는 시장의 원리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고유성을 잃고 수직적으로 서열화 되었습니다. 구매력에 의해 재편되었습니다. 돈 없고, 못 배운 사람은 이 사회의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됩니다.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이것이 지금 우리 시장의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이런 것을 애써 부정하려하지만, (오히려)시장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이 교회의 따스함을 배우는 것보다는 교회가 시장의 발전된 차가운 기술을 더 많이 원용하지 않을까요? 라고 임영관 형제님과 같이 교회 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주체적으로 만드시고, 그 고유한 역할을 창조형상 속에 넣어주셨습니다. 누구는 코의 역할, 누구는 귀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의 역할에 의지하여 평등하게 살라 하셨습니다. 자기가 완전한 한 몸이 아니니 겸손할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의 역할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기 때문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사람이나 쓸데없는 물건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의 쓸데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1절)
근래 우리 교회에서는 의사결정을 위해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상반된 것도 있고, 채택되지 않은 소수 의견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도 지금 당장에는 쓰이지 않지만, 언제, 어디에선가 다 교회를 위해 소용 있게 쓰이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의견들 자체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 22절에서는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 쓸데없는 물건이 이렇게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우리사회가 쓸모없는 것을 만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소유를 위한 세속적 자기규정을 그만큼 많이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탐욕이 만들어낸 우상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맘몬주의죠. 우리 욕망의 부스러기 들입니다.
저는 기독인의 출발점은 지체로서의 신성한 역할을 알 수 없도록 만든 자본주의적 우상들을 걷어내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천태생 역할을 겸허히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자기 생의 운명으로 삼는 것이 예수교인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와 내가 한 몸 이뤄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전부터 이익의 절충점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 교환이 이루어지는 그런 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생각하던 것을 2011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남어린이 착한장터>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착한장터의 내용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성남어린이착한장터는 중고용품 시장입니다. 필요가 없어진 물건을 집에 두면 애물단지가 되지만,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가면 보물단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밀히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모두 중고품입니다. 포장을 뜯어서 사용하는 순간 그것은 중고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익을 위해서 만드는 신상품에 비해 우리사회에 쏟아져 나오는 중고용품은 누군가를 위하라는 하나님의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중고용품이 또다시 이익시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해주는 나눔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성남에서 장터를 열었습니다. 성남이라는 도시는 아시다시피 청계천 빈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조성된 도시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빈민비율이 높습니다. 반면 신도시 분당구는 강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남시는 기존시가지와 신시가지가 경제적으로, 이념적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있습니다. 신도시의 물품을 구시가지의 어려운 분께 전해드리면 도시가 보다 따듯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남어린이착한장터는 어린이가 주체가 되어 만드는 국내 최대 장터입니다(15,000명). 이 장터를 위해 성남 66개 초등학교 어린이대표들이 모였고, 이들이 장터의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였습니다.
장터의 모든 문제는 어린이들 스스로 해결함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 공정거래위원이 장터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고 조정해 줍니다.
이 장터는 이익이 아니라 나눔 장터입니다. 장터가 열리기 전, 어디에 가장 어려운 분이 계시는지를 먼저 찾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필요 없어진 물건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참가자들은 물품과 판매금액의 10% 이상을 기부합니다.
이 장터에 파는 물건은 모두 깨끗하게 해서 가져옵니다. 때가 묻었다고 싸게 파는 것은 마음이 떠난 것입니다. 착한장터에서는 물건과 마음을 함께 교환합니다.
이 장터의 공연에는 스타와 관객이 따로 없습니다. 친구가 공연하고, 친구가 관객이 되며, 친구가 심사하고, 친구가 시상합니다.
이 장터는 <이윤 없는 상점>을 운영합니다. 이 상점은 나눠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서비스 센터입니다.
이 장터에서는 음식은 신성한 것으로서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운영하는 30여개의 별미식당이 있지만, 이윤을 챙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요리솜씨를 나누어주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이 어린이착한장터의 정신에 따라 지난 12월, 어른들의 공동체 <사회적협동조합 착한장터>를 만들었습니다. 돈 대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이 공동체에서 하나님께서 각 지체들의 역할을 얼마나 정교하게 배분해 주셨는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쓸데없는 것을 만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을 증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일반시장에서 쓸모없다는 사람, 쓸데없다는 물건, 그리고 버려지는 생각들, 거들떠보지도 않는 작은 마음들이 얼마나 귀하고 의미 있는지를 함께 느끼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이름도 없으신 주님, 이제 저희들이 말을 적게 하고 잘 살겠습니다.
모양도 없으신 주님, 이제 저희들이 종교적 형식은 적게 하고 잘 살겠습니다.
이미 사는 본을 보여 주신 주님, 어렵지만, 그 본을 따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용기도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메마른 가슴에 사랑을 주시옵소서.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결법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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