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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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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1.20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예수, 자폐적 구원체계를 넘어서다
눅5:21
우리나라의 어린 소년이 터키를 거쳐 시리아 북동부의 이슬람 신정국가인 속칭 IS(ISlamic State)로 넘어갔대서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 사회적인 우려와 걱정 속에는 그들이 격한 분리주의자 들이며, 자신들만이 구원받은 자들이고, 오직 세계에는 알라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자폐적인 의식체계에 대한 근심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외에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한다는 배타적 신념을 무서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이게 오늘 우리가 설교를 통해 나누고 이해하고 예수를 통해 정립해야 할 ‘구원의 유일성 혹은 자폐성’입니다. IS는 자기들만이 알라신의 보호를 받은 구원 받은 백성들이라는 믿음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외에 누구도 구원받은 생명체들이 아니기 때문에 악랄하게 죽이거나 고통을 줘도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저들이 이 세계사회에서 경계되어야 하고 사라져야 할 악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유일신 사상 그리고 구원이 하나의 통로 밖에는 없다는 이런 믿음 체계는 오늘날 IS들만의 것은 아니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유대인들에게 이런 믿음 체계가 있었습니다.
내가 보는 한, 예수님은 유일신 종교에 감염된 세계와 전면전을 벌인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여 인용한 본문에서 우린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의 문제로 등장한 이슬람 신정국가인 IS의 문제에 대한 접근방향이 오늘 예수에게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른바 ‘중풍병자를 고친 예수님 이야기’로 말할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 모두 등장하는 사건인데 이 사건에는 네 부류의 등장인물들이 나옵니다. 예수님, 군중, 중풍병자(일행), 바리새인들입니다. 여기서 맨 마지막에 나오는 바리새인 혹은 율법사는 마태, 마가에서는 율법사라고 하는데 누가에서는 넌지시 ‘예루살렘’과 관련된 인사들인 것을 암시하는 정도입니다. 즉 이 텍스트에서는 이 사건을 예루살렘의 종교와 예수의 종교, 예루살렘의 신앙체계와 예수의 신앙체계가 대결하는 구도를 갖는 다는 겁니다. 즉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유대교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줄거리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중풍병자입니다. 중풍 병이란 몸이 통제된 상태입니다. 몸은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통로입니다. 몸을 통해서 인간은 세상을 만나는데 중풍병자는 몸이 통제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만나는 일도 통제된 상태입니다. 몸을 통해서 세상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이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상태입니다. 중풍병자가 중풍 병을 고치는 일은 단지 병을 고치는 일을 넘어서는, 세상의 일원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 이미 몸으로 세상의 한 체계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뜻밖에 그는 예수에게 나아가는데 성공합니다. 새로운 문을 내고 그리로 갔기 때문입니다. 이 문은 세상의 건강한 누구도, 세상의 어던 체계도 생각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 길로 그가 들어가 예수를 만납니다.
그렇게 들어온 중풍병자를 본 예수는 말합니다. “네가 구원받았다.”중풍병자는 단지 몸의 병을 고치기만 바랐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사회가 규정해놓은 그 틀 안으로 들어가고, 유대인의 구원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사회의, 유대인의 구원을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몸의 병을 고쳤을 뿐 아니라 ‘유대인의 구원’이 아닌 예수의 구원 이를테면 그에게는 ‘낯선 구원’이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신체적인 통제를 당하는 그가 지붕을 뚫고 예수에게로 나아 간 것도 예외적인 일입니다만, 그에게 예수님이 유대인의 구원이 아닌 전혀 낯선 구원을 선언해 주시는 것도 그에게는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게 뭡니까? 예수님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유대인의 질서체계’를 해체하고 해방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체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유대인만의 질서’ ‘유대인만의 구원’이었습니다. 이 밖으로 벗어나는 일이나 사람은 모두 쓸모가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구원도 받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이 중풍병자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의 관습과는 ‘전혀 다른 길’과 ‘전혀 낯선 구원’을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바리사이 즉 ‘예루살렘 종교’가 등장합니다. 그들로서는 말이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들의 삶의 방식 외엔, 그들의 구원 외엔 어느 것도 존재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들만이 ‘길과 진리이며 구원’이었습니다. 그게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말인 즉 ‘그들이 유일한 길이고 구원이다’그런 뜻이었습니다. 그 말은 누구든 그들의 질서,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만 살아야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있는 겁니다. 거기에 순종하고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고 엉뚱한 길과 구원을 말하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라는 겁니다.
그들로서는, 유일신을 믿는 그들로서는 맞는 말 아닙니까? 또 유일신을 믿는 믿음을 가진 집단이라면 지금도 역시 이런 주장을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는 그들과 맞장 뜹니다.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운 일, 그건 그들의 믿음과 관습적 통제에서 그를 해방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배제관성을 거부하는 일이었습니다. 몸이 나았다는 것은 이제 세상의 일원이 되어도 손색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가 생각지도 않았던, 생각할 수도 없었던 새로운 구원, 예수가 주는 구원, 낯선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어떤 유대인의 종교적인 장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자신, 중풍병자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믿음 체계요, 완전히 낯선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네 믿음’이랬을 때 그 ‘믿음’은 ‘제도’나 ‘교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그게 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이 기존의 질서에 교란을 일으키고, 질서에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서의 이 텍스트 속에는 사람들 및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꿰뚫고 있는 질서관이 예수와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의 관념이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지배하는 종교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네들 식의 종교 교리 이외에는 다른 문을 결코 가설하지 않으려는 전체주의적 신념이, IS같은 신념이 바로 예수의 적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신학은 그것을 ‘유일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IS도 그들만의 유일신인 ‘알라’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닙니까?
예수는 바로 당시의 유대인들이 독점했던 ‘유일신’과 대결했던 것입니다. 하나의 길만을 주장하는 집착과 대결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까지 지배하면서, 다른 것은 없다고 설파하는 교조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유일신 신앙을 해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이교주의자’였습니다. 그것은 신 없는 세계, 구원 없는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자폐적인 구원체계를 넘어서는 신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각 종교의 문제, 종교를 삶의 가치체계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제는 예수님처럼 ‘자기 신앙의 자폐성’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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