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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팽개쳐진 기도,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456 추천 수 0 2015.04.25 23: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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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11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내 팽개쳐진 기도,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마6:11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하나님’을 말하고 후반부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 통합하는 주제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 주기도문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구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인간들의 사는 땅에는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길’구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들이 지금 겪고 있는 삶의 질곡 반대편에 있었던 겁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누가 점심을 후에 제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지구 밖 그 어디엔가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하늘’이란 추상적 지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질곡 속에 눌려 사는 이들이 표상할 수 있는 염원의 극대치가 바로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주기도문 속에서의 ‘하늘’은 그렇게 이해됩니다. 그런데 그런 추상성의 기호가 현실로 만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주기도문 두 번째 부분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기원했던 걸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 구절은 이 추상적인 진리가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현실화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뜻은 다름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주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현실적인 공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배고픔은 예수님 시대 사람이 겪는 일반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앞에 나왔던 ‘아버지’가 당시 버려진 사람들의 종교적인 공감대였다면,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은 버려진 사람들의 생존의 공감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각기 다른 고통의 공감대를 갖고 살지만 당시의 사람들, 고대로 갈수록 사람들의 고통은 누구나 같은 것들입니다. 대중들의 굶주림은 예수님과 마태, 누가, 디다케 공동체 주변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을 표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 텍스트 즉 마태, 누가, 디다케는 예수의 말을 두 가지 점에서 조금씩 다르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옵소서’혹은 ‘주다’라는 동사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디도미]인데 마태나 디다케에서는 과거명령형인 [도스]로 쓴 반면, 누가복음에선 현재형 [디두]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을 뜻하는 부사 ‘세메론’-마태, 디다케-과 ‘날마다’라는 단어의 ‘토캇 헤메란’-누가-의 차이입니다.

이 말을 요약정리하면, 누가는 하나님이 빵을 주는 행위를 그야말로 매일매일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마태, 디다케는 받는 시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지속성 즉 계속 달라는 것이라면 마태, 디다케는 ‘지금 당장’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같은 이야기를 세 공동체는 다르게 하는 걸까요? 그들이 처지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와 디다케 공동체 사람들은 내일은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다음에 주시는 건 안 됩니다. 지금 주셔야 하는 겁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닌 사람들에게 시간은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시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겁니다. 마태나 디다케 공동체는 지금 하루하루가 인생의 끝이요, 예수님이 재림해야 하는 종말론적 희망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간절하고,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를 보세요. 이들은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도 있고 내일도 기약할 수 있는 형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빵이 있게 하소서’하는 겁니다.

마태는 회당에서 쫓겨나 산으로 올라간 예수님 앞에 모여든 군중에게 이 기도문은 가르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주기도문이 산상설교의 일부분이 되는 겁니다. 반면 누가는 예수님이 모처에서 기도하면서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걸 좀 살펴봅시다.

예수를 따라 산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일까요? 처음에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충돌을 하고 그 이후로는 바닷가, 산등성이, 공터, 같은 곳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이런 곳으로 예수를 따라 온 사람들이니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부류들이었습니다. 지금 밥 한 그릇 배불리 먹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의 표현을 빌면 이들은 ‘오클로스’, 요즘으로 치면 ‘홈리스’, 이런저런 이유로 가정과 사회를 떠나 길거리에서 생존하는 이들입니다. 당시의 오클로스들도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공동체에서 추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마태나 누가에서는 이런 계층적 지시성이 모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하는 이들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태나 디다케는 남부 시리아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였습니다. 여기는 주후 40년 대 말 이후, 잇따른 기근, 전염병, 저항폭력과 지배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66-72년까지 계속된 반로마전쟁의 참화를 겪다 못해 고향을 떠나온 피난민들이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이곳은 유대사회에서 추방당한 사람들로 들끓었던 곳입니다. 예루살렘을 괴멸시킬 당시 로마군은 시리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군사로 징발을 했습니다. 그 군인들은 자기네 영토에서 부랑자로 살던 이들에게 살벌했습니다. 그 군인들은 이들에게 무자비하게 테러를 감행합니다. 그런 일을 당해도 국가 없는 떠돌이 부랑자들인지라 그들을 보호 해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력의 대상이 된 그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공동체가 겪었던 이야기 하나를 더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자 성전만 무너진 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던 가옥들도 모두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집만 탄 게 아니라 사람도 타 죽었습니다. 사회가 붕괴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이런 잿더미를 털어내고 재건을 해야 하겠지만 사회 지도층은 죽고 끌려가고 노예로 팔렸습니다. 씨가 말랐습니다. 그 때 등장하는 집단이 바리사이입니다. 그들은 로마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학교를 열고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후의 황폐한 상황에서 바리새인들이 국가재건 프로그램으로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고자 할 때 자율적으로 했을까요, 아니면 반 강제성을 띠고 강력하게 했을까요? 거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율법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런 교육을 시키려면 이질적인 거,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방식과 다른 집단이나 교육방식들은 제거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가장 걸리적거리는 요소들이 누구였겠어요? 예수 도당과 세례 요한의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회당에 머물고 있었던 예수운동의 맴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추방을 했던 겁니다. 이것은 유대 본토도 그랬지만 이방지역일수록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도 누가 공동체는 얼마간 재력이 있고, 기댈만한 권력을 가진 이들도 있었던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마태 공동체는 살기 어린 칼날이 항상 조여오던 공동체였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당시 회당은 유대인들에게 안전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공동체는 그곳마저 쫓겨 난 것입니다. 호랑이가 사는 정글에 던져진 사람들이 바로 마태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었던 말입니다. 그래서 마태 공동체는 그 어떤 복음서보다 폭력적인 묘사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마태공동체는 하루하루 절박한 나날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의 기도가 가르쳐진 것입니다.

마태공동체를 살펴 본 김에 누가 공동체도 한 번 봅시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기도문 수용자들입니다. 여기서 ‘제자’라는 뜻은 그저 예수를 따라 다니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제자’는 ‘사도’입니다. 공동체에게 음식을 배급해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함께 굶주리는 이가 아니라 굶주리는 이들을 구휼하는 존재들이라는 말이죠. 을이 아니라 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 주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하는 것은 굶주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예수의 시선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의 이 기도는 나눠 줄 것을 걱정하는 분배자의 기도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 공동체가 이해하는 주님의 기도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는 하나님의 편에서 보다는 인간의 편에서, 통치자의 편이 아니라 백성의 편에서 구하고 있다는 공동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뭡니까? 마태, 누가, 디다케에 실린 이 기도문은 당시 새로운 유대 사회를 건설하려는 권력자로 등장하는 유대교, 바리새인들에게 배척당한 이들의 입장에서 예수와 연결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형편에 따라 재해석하여 삶의 실존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주님의 기도문을 내팽개쳐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여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삶으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 기도문은 절대 빈곤을 겪고 있는 이들 외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비만을 걱정하고, 다이어트를 입에 달고 사는 우리, 영양결핍보다 과잉을 우려하는 우리가 이 기도를 어떻게 예수의 마음으로 공유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물론 아직도 세계의 구석에는 굶어 죽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기도문은 가감 없이 유효합니다만, 우리에게 이 기도는 어떻게 재해석 되어야 하는 걸까요? ‘양식’을 단지 음식에만 국한하지 말고 ‘절박하게 요청되는 실존의 양식’으로 확대하는 겁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공동체처럼 ‘나눠 주기 위한 양식을 매일 매일 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여하튼 유대인들처럼 실전의 고통을 제거한 기도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외부에서 그 위에 서 있는 자의 기도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고통, 타인의 고통을 자신에게 옮겨와서 기도 속에 담아내야 한다는 거죠. 어떤 이들은 이 기도를 ‘매일매일 신령한 진리의 깨달음’을 위한 기도라고 해석합니다.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은 뭣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선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의 말씀을 오늘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생활의 고통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필요 언어로 번안해야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생명과 진리에 근접한 시점에서 다른 언어들로 다르게 말해야 합니다. 다르게 말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나아가 이웃의 고통을 담아내는 언어로 애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서의 주의 기도를 다르게 읽을 뿐만 아니라 다르게 쓰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기도를 다르게 써야 합니다. 다르게 읽고 쓴다는 것은 고통을 활용하는 사회의 메커니즘을 들춰내는 삶을 수반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담아내는 기도로 살려내야 한다는 겁니다. 더 이상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죽은 말로 쳐서 내 팽개쳐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의 기도가 우리에게서 외면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의 신앙과 삶을 통해 새롭게 그리고 항상 고백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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