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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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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2.27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빚’을 탕감해주겠으니, 내 ‘죄’를 사면해주소서.
눅11:4
오늘날 교회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예식용 주기도문’에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면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면해 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주의 기도를 담고 있는 세 개의 성서 텍스트에 준한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개의 성서’라 함은 마태, 누가, 디다케를 말하는 것임을 지난 시간부터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기에는 문장 구조는 같지만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엇비슷하면서 약간씩 다른 것은 이 각각의 구절이 예수님과 각 성서를 만든 공동체간의 시공간적 차이의 결과물이라고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글들은 그 공동체가 처한 상황과 연관시켜 살피는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빚진 자를 탕감하듯 우리의 빚도 탕감해 주세요’라는 기도문에서는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당시 기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오늘날 우리가 이 기도문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 기도문은 어떤 공통된 기억을 담고 있었을까요?
얼른 눈에 띄는 것은 ‘죄를 지은 이들’혹은 ‘빚진 이들’이라는 표현일 겁니다. 우리 성경에는 ‘죄를 지은 자들을’이라고 되어 있지만 성경 밑에 있는 각주를 보시면 헬라어에는 ‘빚’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초기 공동체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빚을 진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돈을 꾼 사람, 채무자 말입니다. 이 ‘빚진 자’란 말을 ‘죄지은 사람’이라고 번역하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의식구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죄 짓는 일이 하나님께 ‘빚을 지는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기도문을 받고 있는 이들은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면 이 단어는 ‘죄’일리는 없습니다. 이 단어들은 말 그대로 부채를 의미했습니다. 소작의 현실이나 날품팔이의 삶 등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바로 빚을 지는 일이었습니다.
어디 이게 그 옛날만의 일입니까? 요즘 사회 각처에서 빚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나 가족의 목숨을 포기했다는 뉴스를 듣지 않습니까? 죄를 지어서 그 자책감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는 경제적인 빈곤으로 인한 부담감으로 죽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은 게 오늘날 우리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도 ‘죄’의 무게보다는 ‘빚’의 무게가 훨씬 위협적이고 무겁습니다. 만약 우리가 죄던지 빚이 던지를 사면할(탕감)수만 있다면 그 우선순위는 죄가 아니라 빚이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여하간 이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면해 주는 것처럼’이라는 기도는 예수 시대의 수많은 대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특히 복음서에 등장하는 채권자와 채무자는 오늘날처럼 대등한 관계에서 출발하는 게 아닙니다. 양반 상놈 하던 시대의 채무자와 채권자 관계가 오늘날과 같으냐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채권자와 채무자는 뚜렷한 권력의 차별 속에서 설정이 되는 겁니다. 당연히 채무자의 권리라는 게 있지 않습니다. 그 무권리 중에 하나가 이자를 채권자가 맘대로 정한다는 겁니다. 채무의 기한도 채권자가 제멋대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채무자들은 애초부터 상환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빚을 지는 게 상식입니다. 그건 뭘 의미 합니까? 자기의 땅, 가족, 자심의 몸도 언제든지 내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빚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시대의 기준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런 혹독한 현실 한가운데 빚을 사면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자가 타인의 빚에 대해서 한 사면의 행위를 전제로 ‘나-기도자’의 죄를 사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빚진 자를 사면해 주면 하나님은 나의 죄를 탕감해 주세요.’라고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빚을 사면해 주고, 그걸 바탕으로 하나님은 나의 죄를 사해 달라고 구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문 속에는 내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밀접한 연관성 속에 있다는 의미이기고 합니다.
이 기도는 나의 실천을 전제조건으로 하나님이 실천을 해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나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는 일과 하나님이 나의 죄를 사해 주는 일’의 대등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일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문의 앞 문장은 ‘빚’이 되어야 하고 뒤 단어는 ‘죄’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이 문장은 판결문이 아니라 기도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판결문은 결과의 시점에 원인을 묻지만, 기도문은 원인의 시점에서 결과를 묻는 겁니다. 뭔 말인가 하면, 이 문장이 기도문이라는 것은 이 문장이 원인에서 결과로 의미가 구성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사면 실천을 조건으로 해서 기도자는 자신의 실천(빚진 자의 빚을 없애주는 것)을 다잡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이리 했으니 당신도 이리 하시오가 아니라, 당신의 그리 하셨으니 나도 이리 하겠습니다 뭐 그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려면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야 되겠지요’라고 기도자가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기도문에 나오는 빚의 탕감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통기억은 타인, 특히 나보다 가난한 사람, 나보다 더욱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사람, 나보다 훨씬 무능력한 사람, 이런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일종의 신앙적 실천윤리의 기능으로 작동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사회규범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 당시에 기도문을 주문받은 당사자들의 시선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시선 즉, 지금 예수님의 기도문을 수여받고 있는 이들을 인간 이하로 판결한, 죄인으로 판결한 유대적인 시스템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전복의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외에는 빚을 없애주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의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으로 판결하는 체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쫓겨 난 ‘죄인’들로 하여금 과감하게 ‘빚도 탕감하고 죄도 사하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우리가 이 기도를 되새기는 데는 한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언질을 드렸듯이 예수님 시대에 발생하는 빚은 극심한 비대칭적인 위계관계에서 발생한 반면, 오늘날의 빚이란 그런 경우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대등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오히려 돈을 꾸는 사람이 꿔 주는 사람보다 상위의 위계관계를 가지기도 합니다. 사기를 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이럴 경우 사기 당한 사람이 사기 친 놈에게 돈을 받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이 기도문을 되새기는 일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사람에게 빚을 지기도 하고 무수한 사람에게 빚을 지우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사소하게 빚을 탕감해 놓고는 하나님에게 ‘내 죄도 사해 주세요’하면, 이건 은혜가 값싸진다는 본회퍼의 말과 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개인주의가 발전하고 서로가 사로에게 쿨해 지려는 요즈음, 요컨대 빚진 것에 대해서 덜 민감한 것이 유행이 되는 사회에서(빚도 능력이고 재산의 일부라는)이 기도문은 아주 시시한 것처럼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문이 일러주는 ‘빚’과 ‘사면’에 대한 감각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각을 강조한다는 말은 뭡니까? 고통의 근원을 가로지르는 신앙의 실천을 상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고통의 체계는 무엇입니까? 이 고통의 체계가 세상을 소경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시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체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전복시키고, 그리고 자신을 갱신하겠다는 치열한 자기 투쟁이 기도 속에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이 기도문 속에 들어 있는 ‘빚과 죄의 사면에 대한 감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기도문을 다시 읽고 새긴다는 것은 이러한 치열함을 간직하는 신앙적 인식과 실천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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