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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호5: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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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호세아 5장:1-15절
찬송가 528장(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a)
여기서 ‘지식이 없다’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적 수준이나 이해능력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교육의 정도를 의미하는 표현도 아닙니다. ‘배우지 못했다’, ‘무식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분별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지식이 없다는 말은 교육이나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분별력’의 부재를 가리킵니다. 분별력이 없어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호 4:11)
이스라엘이 분별력이 없이 우상숭배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절절이 아파하시고 안타까워하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메시지의 첫 마디는 ‘들으라’입니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1절a)
한글 성경에는 번역상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로 나와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들으라”고 하는 명령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또한 ‘들으라’, ‘깨달으라’, ‘귀를 기울이라’로 번역된 동사는 각각 ‘솨마’, ‘카솨브’, ‘아잔’이라는 동사로 공통적으로 ‘주의 깊게 듣다, 경청하다’는 의미의 명령형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저버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미혹되어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며,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배역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귀와 눈을 막고 마음까지도 닫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해 마음 아파하시던 하나님은 결국 심판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메시지는 ‘돌아오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수도 없이 배역하고 멀어져가는 그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재앙과 심판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1절b)
‘미스바’와 ‘다볼’은 각각 요단의 동쪽과 서쪽에 있었던 우상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우상숭배의 성지가 이제는 그들을 잡는 올무이자 그물이 되리라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우상숭배를 일삼던 그 장소가 이제는 그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는 심판의 현장이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내용보다 더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구절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3절)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아니 야다티’ 즉 “내가 알고 있다”는 구문으로 시작합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히브리어 동사에는 그 동사의 주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다티’라는 표현 역시 ‘내가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진 ‘아니’라는 단어는 ‘바로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주어를 재차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뿐만 아니라 ‘알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는 인격과 마음으로 안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특별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알고 있다”고 하는 이 구절이 서글프고 가슴이 저며지는 이유는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표현 때문입니다.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언제나 특별했던 데 비해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그 특별한 사랑을, 그 애틋한 마음을 짓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결코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증언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기 바빴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아버린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드디어 최후통첩을 전해주십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15절)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은 ‘이제 헤어지자’는 하나님의 최후통첩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향해 열어두셨던 모든 구원의 가능성과 은혜를 이제는 거두어 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이혼을 앞둔 배우자가 “이제 나 갈 테니까 다시 보는 일 없도록 하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상대방을 향한 모든 기억과 기대와 연민과 사랑을 내려놓고, 관계를 끝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모든 관계를 끝내겠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오히려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라고 하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습적으로 외도를 하는 남편이 있다고 가정해보십시다. 아내는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도 그동안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남편의 외도가 심해지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드디어 아내는 짐을 싸서 친정으로 가버렸습니다. 친정으로 가면서 남긴 말이 이렇습니다. “우리 이제 헤어져. 아이들은 당신이 책임져. 당신 마음 정리할 때까지 나 찾지 마.”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들이 눈물로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독하게 결심하고 친정으로 가버렸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는 아내가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건, 결국 남편이 제 정신을 차려야 가정이 올바로 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아내가 떠나간 후 이 집안의 풍경이 그려지십니까? 다른 여자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남편은 아내가 없어지고 나서야 아내의 부재를 실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은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이기 시작했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옷은 꾀죄죄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습니다. 엄마의 부재와 아내의 부재로 인해 아이들과 남편의 정서까지도 황폐해지기 시작합니다. 일말의 지혜가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가정이 더 무너지기 전에 속히 아내에게 가서 무릎 꿇고 비는 것이 가정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미쉘원가족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면 인류는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지혜와 이성으로 인류의 역사를 보다 건설적으로 일구어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오만이며 자기기만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역사는 파괴와 파멸로 치닫기 마련입니다.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도, 소망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더욱 하나님의 긍휼만이 소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아셨고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셨으며,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의 삶이 오만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에 응답하는 삶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향한 그 부르심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음이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하셔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한 날이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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