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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호12: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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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호세아 12장:1-14절
찬양: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아주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불순종할 때 징계를 하면서도 긍휼히 여겨 다시 일으키시는 사랑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땅, 애굽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기 이전 애굽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이라고 하십시다. 이미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시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 도다.’ 에브라임이, 하나님의 백성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 것을 보고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도 지금 장사를 하고 있는데, 우리 회사가 무역회사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상인은 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가나안 사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이라고 하면 페니키아인들을 가리키는데 성경에 나오는 베니게 즉 두로와 시돈입니다. 그들은 지중해를 오가며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과 상인은 같은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가나안사람들의 본거지인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을 미혹한 대표적인 우상인 바알종교의 발상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마음속에는 “저들은 상인이라”는 말속에 ‘저들은 가나안과 같은 자들이라’는 뜻이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은 유다와 이스라엘 둘로 나누어집니다. 남쪽 유다에는 유다와 베냐민, 2지파가 연합하여 왕국을 이루었고, 북쪽의 이스라엘에는 10지파가 합하여 나라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10지파 중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이 있는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을 부를 때! 어떤 때는 이스라엘! 어떤 때는 에브라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에브라임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의 그 부요함과 쾌락에 점점 빠져듭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물질이 차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에브라임이 가나안화 되어서 바알과 아세라 앞에 제물을 주고, 엎드려 제사를 드리면서 많은 소득의 기회를 얻었고, 그 불의한 소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불의함이 없다며 자만하는 모습을 주님은 보고 계신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큰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8절)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재물도 많이 얻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내리면서 부끄러움도 죄가 될 만한 일도 없다고 합리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느새 가나안화 되어서 물질을 자신의 신으로 알고 섬기는 에브라임에게는 당연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찹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선민들이 어떻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같은 수준에 놓고 숭배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전쟁의 신이니까 전쟁이 나면 부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때는 바알을 찾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들의 전공을 찾아 준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삶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에브라임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라”,“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세아는 하나님께 돌아와 인애와 공의의 하나님을 바람으로 바뀌어진 사람으로 이스라엘 이름의 주인공인 야곱을 예로 듭니다. 야곱은 오직 자기욕심을 따라 목적을 세우고 자신의 꾀와 술수로써 그것을 성취하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을까요? 축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욕심과 그 욕심 성취를 위하여 자신의 경쟁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본성은 아예 출생 때부터 타고났던 것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속입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성공은 그가 섬기는 우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계책을 의지하여 교만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장막에 거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2:9). 이것은 죄를 범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에서 쫓아내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범죄하고 40년간 광야에서 유리하던 그때와 같이 만드시겠다고 하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외견적으로는 징벌의 선언처럼 들리는 이 말씀 속에는 죄를 범한 자기 백성들과 만나서 그들과 다시 새롭게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2장14절). 즉 하나님께서는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하게 바알을 숭배한 이스라엘을 벌하실 것이지만, 그들을 광야(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써 타이르고 위로하여 이전의 첫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때때로 성도들이 세상에 취하여 살다가 어느 날엔가 광야와 같은 시련이 찾아올 때, 그것은 사실상 징벌이라기보다 우리를 단독적으로 만나 설득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물질을 주인으로 삼는 삶 아니 하나님과 물질을 모두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가나안의 삶을 포기하십시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요, 우리의 숙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과 동일하게 이 시대에 물질을 따라가는 가나안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에브라임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삶, 하나님을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그런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주님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주님의 기대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에브라임같이 야곱같이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가나안적인 삶이 나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장애물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 우리의 삶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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