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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호13: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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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호세아 13:1-16
찬양: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하나님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였습니다. 핍박으로 저물어 가던 이스라엘의 괴로움의 소리를 들으시고, 또 아픔의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또 광야 길을 가는 동안 그 백성의 눈과 발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메마른 광야를 걸었지만, 주님의 함께 하심으로 그 광야는 부족함이 없는 푸른 풀밭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얻게 하셨고, 그로 통해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아 섬기고 따르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위해 싸워 승리케 하심을 경험으로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어려운 역경 속에 처한 이스라엘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치 않고 들으셔서 친히 그들을 먹이고 입히셨는데 배가 부른 그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1절과 2절을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에브라임이 말만 하면 모두 떨었다. 온 이스라엘이 그렇게 에브라임을 우러러보았는데, 바알 신을 섬겨 죄를 짓고 말았으므로, 이제 망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듭 죄를 짓고 있다. 은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서 우상들을 만든다. 재주껏 만든 은 신상들, 그것들은 모두 세공업자들이 만든 것인데도, 그들은 이 신상 앞에 제물을 바치라고 하면서, 송아지 신상들에게 입을 맞춘다.”
에브라임지파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매우 주목받는 지파였습니다. 여호수아, 사사 드보라, 사무엘이 이 지파 출신이었고, 북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 역시 에브라임 출신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이라는 명칭은 보통 북 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일 정도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스스로 자랑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다고 자부할지 모르겠지만, 바알을 숭배하는 그들의 실상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마치 우상이 생명을, 더 풍성한 삶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더욱더 우상에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죄악을 향해 더 깊은 걸음을 내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은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마치 자신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인생의 최후 결정권은 인간에게 있는 것도, 이 세상 그 무엇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면 종말은 순식간에 들이닥치게 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또 본문 7~8절에서는 네 가지 동물을 비유로 삼아 아주 혹독한 심판이 올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8절에 나오는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라는 말이 하나님의 심정을 잘 대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새끼를 잃은 암곰이 이성을 잃어버린 채 닥치는 대로 찢고 파괴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이가 없습니다.
본문 9~11절 역시 이스라엘이 의존했던 자가 설사 왕이라 할지라도 절대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구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그 어떤 소망도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2~16절도 결국 죄에 의해 참담한 종말을 맞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죄를 미워하셔서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강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 주고 있지만, 동시에 죄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 즉시 심판하신다면 당장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죄로 가득한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또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고, 여러 선지자를 보내 권고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원함은 인생을 살리기 위함이지 죽이기 위함도 괴롭게 하기 위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기다림의 시간은 주님께 돌아올 시간임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결국은 멸망임을 알고 그때가 되기 전에 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여 죄에서 돌이키기 위한 시간이었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도 인생이 순조롭게 느껴진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죄를 용납해 주시거나, 내가 철저히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가 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여 죄로부터 돌이키기 위해 주어진 기회의 시간이고, 주님께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지 본문 4절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아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눈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부터 한 비유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진 어떤 종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 정도 되었고, 1데나리온은 성인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으니 일만 달란트는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을 엄청난 큰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산 때가 되어 임금은 그 빚진 종을 불러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빚을 다 갚도록 명령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그 종은 임금 앞에 엎드려 반드시 갚을 테니 자비를 베푸셔서 조금만 참아주시기를 간곡히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갚을 수 있는 기간만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을 뿐인데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빚 전부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임금의 은혜죠.
그런데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그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자 당장 빚을 갚으라 요구하며, 자비를 간곡히 구하는 그 동료의 간청을 묵살하고 오히려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임금은 자신의 빚을 탕감해 준 그 종을 불러 악한 종이라 부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기도록 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았던 그 종은 임금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상태와 처지가 어떠하였으며, 그런 자신에게 베풀어준 임금의 진정한 은혜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원래 어떤 존재였었는지, 그런 자신들을 향한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기적적인 은혜였는지도 당연히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 내가 어떠한 존재였으며, 그런 나를 찾아오신 주님은 어떤 분이시며, 값없이 베풀어 주신 그분의 은혜는 어떠한 은혜인지를 늘 말씀으로 배우고,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의 헛된 우상으로부터, 죄의 어떤 모양으로부터도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늘 인식하고, 혹여라도 내 안에 세상의 우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는 부분은 있진 않은지 늘 말씀가운데 살피고, 주님 알기를 더 힘쓰는 오늘 하루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 기도>
주님은 나를 죄로 인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죄의 유혹 속에 허덕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내 마음 한켠에 주님보다 더 소중하고, 안정감 있게 여기는 우상을 만들어 두고 주님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단단한 벽을 쌓아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나를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나’라는 존재는 오직 주님이 아니면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존재임과 주님의 은혜가 산소망을 주셨음을 늘 잊지 않게 하시고, 시간이 갈수록 주님과 더 깊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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