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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욜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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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요엘 1장:1-20절
찬송 : 263장 이 세상 험하고
요엘은 다른 선지서들과는 달리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느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인지 알아낼 수 있는 자료가 매우 희박합니다. 그래도 많은 성경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합니다. 먼저는 요엘이 활동한 시대가 요아스 왕의 통치시대로 보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느헤미야가 성벽을 세우고 난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요엘이 활동하던 시대를 요아스 왕의 통치시대로 보는 근거는 요엘의 예언에 왕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아스가 왕으로 즉위할때의 나이는 7세이므로 정치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요엘의 예언에는 정권에 관여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대한 언급만 있습니다. 또한 유다의 대적을 블레셋과 애굽, 에돔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 앗수르와 바벨론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엘의 메시지는 아모스의 메시지와 많은 유사성이 있기에 아모스의 주 활동 시대인 요아스 왕의 통치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로 보는 견해 또한 타당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언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열방에 흩어졌다는 설명들,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는 약속으로 보건대 아마도 주전 587년의 예루살렘 파괴와 그로 인한 거주민 분산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2장 7절과 9절이 예루살렘의 성벽을 말하는 것이라면 요엘이 활동한 연대는 주전 440년에 있던 느헤미야의 활동 이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요엘이 활동한 시대를 요아스 왕 때로 보나, 느헤미야 이후의 시대로 보나, 요엘의 예언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과 크게 맞물려 있음은 분명합니다. 요엘의 시대가 요아스 왕이 다스리던 때라고 가정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요아스 왕은 아달랴가 남유다 왕국의 왕손들을 모두 죽여 버릴 때,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의 손길로 성전에서 6년을 숨어 지내며 자랍니다. 그리고 다윗언약을 기억하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으로 7세에 왕좌에 오릅니다. 요아스의 통치 초기에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선정을 베풀지만 여호야다가 죽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왕입니다.
요엘이 느헤미야 시대 이후라고 한다 하더라도 당시 정치적인 상황은 극도로 암울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터를 잡았던 문명의 땅을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용기를 내어 폐허가 된 이스라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회복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성전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도 세우고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세상의 흐름은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낙심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더 나아가 예배에 소홀하게 되었고, 통치자들은 서민들의 피를 빨기 시작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팔려가고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요엘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엘의 의미는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엘의 주된 예언은 농촌사회에 불어 닥친 위기가 곧 ‘여호와의 날’이며 곤충들에 의해 모든 농작물이 사라졌기에 모든 백성들은 회개해야 한다는 간략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을 선물로 허락하실 것이며 주의 날은 그토록 소망하던 구원으로 이스라엘에게 다가올 것을 예언합니다. 요엘은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은 시적이고 수사학적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방 나라를 메뚜기, 또는 흉포한 사자로 표현하며 가뭄의 상황을 소가 울부짖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신랑을 잃은 젊은 신부처럼 애곡하라고 요청합니다. 달의 붉은 모습은 핏빛같이 보이며, 하나님을 요새와 산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엘은 당시 이스라엘의 처절한 정치와 생활환경 속에서 남편을 잃은 신부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었고, 굶주리는 소의 울음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며, 전쟁의 상황에서 어린 아이들이 헐값에 팔려가는 것을 눈여겨보았기에 이런 표현이 가능했습니다.
요엘이 꿈꾸던 것은 온전한 예배 공동체였습니다. 한 세대에 일어난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들이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세대와 세대가 어우러져 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가 요엘이 꿈꾸던 공동체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이스라엘 안에 지휘고하, 남녀노소를 망라한 땅의 모든 거민들이 함께 이야기해야 할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채찍질입니다. 처절한 현실의 고난입니다. 모든 곡식들은 메뚜기 떼가 먹어버렸고, 포도주가 끊어졌습니다. 나무는 껍질조차 벗겨졌고, 밭은 황무하고 사람의 모든 즐거움이 말라버렸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 아픈 이야기, 감추고 싶은 이야기, 쓰러지고 피 흘리는 이야기를 계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엘은 그 이야기를 말하고 들으라고 예언합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반드시 고백해야 할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찾아온 심판은 내 죄악에 대한 결과이며, 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환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알아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물론이거니와 죄악과 불순종에 대한 처참한 결과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고백하고 전수하는 것이 예배 공동체가 가진 특징입니다.
신약 시대에 바울을 비롯한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죄에 대한 처참함과 우리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은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죄의 고리를 끊기 위함입니다. 철저한 죽음, 하나님께 버려짐까지 당하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침묵하던 입을 열어 주님의 부활을 고백하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을 전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은 물론 인류의 수치스러운 과거와 죄악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배 공동체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철저하게 죄악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노래했습니다.
요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처참한 상황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해주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까지 노래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상황에 처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우리 인생에도 메뚜기 떼와 같은 상황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암사자의 어금니와 같은 원수의 공격과,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내의 울음과 같은 눈물이 내 안에서 솟아날 때가 찾아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 현실에 반창고만 붙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치유가 될 수 없습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썩은 살을 도려내고 불순물을 제거하시도록 온전히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자라는 것은 내 삶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 자임을 의미합니다. 먹고 마실 것도 없고, 영적인 기쁨을 잃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현실을 안고 이제 하나님과 이야기합시다. 고백합시다.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될 것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편18:6)
< 기도>
환난 중에서 반드시 찾아야 할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건만, 우매한 우리는 환난에서도 입술을 벌리지 못하는 먼지 같은 존재임을 발견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이 있듯이, 환난이 있어야 구원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는 새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암담하고 어둡던 사회적 현상에서도 요엘이 꿈꾸었던 예배 공동체가 또한 우리의 꿈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나라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현실의 아픔을 고스란히 내어드리는데 헌신하는 미쉘원가족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예배자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송 : 263장 이 세상 험하고
요엘은 다른 선지서들과는 달리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느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인지 알아낼 수 있는 자료가 매우 희박합니다. 그래도 많은 성경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합니다. 먼저는 요엘이 활동한 시대가 요아스 왕의 통치시대로 보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느헤미야가 성벽을 세우고 난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요엘이 활동하던 시대를 요아스 왕의 통치시대로 보는 근거는 요엘의 예언에 왕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아스가 왕으로 즉위할때의 나이는 7세이므로 정치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요엘의 예언에는 정권에 관여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대한 언급만 있습니다. 또한 유다의 대적을 블레셋과 애굽, 에돔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 앗수르와 바벨론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엘의 메시지는 아모스의 메시지와 많은 유사성이 있기에 아모스의 주 활동 시대인 요아스 왕의 통치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로 보는 견해 또한 타당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언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열방에 흩어졌다는 설명들,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는 약속으로 보건대 아마도 주전 587년의 예루살렘 파괴와 그로 인한 거주민 분산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2장 7절과 9절이 예루살렘의 성벽을 말하는 것이라면 요엘이 활동한 연대는 주전 440년에 있던 느헤미야의 활동 이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요엘이 활동한 시대를 요아스 왕 때로 보나, 느헤미야 이후의 시대로 보나, 요엘의 예언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과 크게 맞물려 있음은 분명합니다. 요엘의 시대가 요아스 왕이 다스리던 때라고 가정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요아스 왕은 아달랴가 남유다 왕국의 왕손들을 모두 죽여 버릴 때,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의 손길로 성전에서 6년을 숨어 지내며 자랍니다. 그리고 다윗언약을 기억하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으로 7세에 왕좌에 오릅니다. 요아스의 통치 초기에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선정을 베풀지만 여호야다가 죽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왕입니다.
요엘이 느헤미야 시대 이후라고 한다 하더라도 당시 정치적인 상황은 극도로 암울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터를 잡았던 문명의 땅을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용기를 내어 폐허가 된 이스라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회복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성전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도 세우고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세상의 흐름은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낙심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더 나아가 예배에 소홀하게 되었고, 통치자들은 서민들의 피를 빨기 시작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팔려가고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요엘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엘의 의미는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엘의 주된 예언은 농촌사회에 불어 닥친 위기가 곧 ‘여호와의 날’이며 곤충들에 의해 모든 농작물이 사라졌기에 모든 백성들은 회개해야 한다는 간략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을 선물로 허락하실 것이며 주의 날은 그토록 소망하던 구원으로 이스라엘에게 다가올 것을 예언합니다. 요엘은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예언은 시적이고 수사학적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방 나라를 메뚜기, 또는 흉포한 사자로 표현하며 가뭄의 상황을 소가 울부짖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신랑을 잃은 젊은 신부처럼 애곡하라고 요청합니다. 달의 붉은 모습은 핏빛같이 보이며, 하나님을 요새와 산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엘은 당시 이스라엘의 처절한 정치와 생활환경 속에서 남편을 잃은 신부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었고, 굶주리는 소의 울음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며, 전쟁의 상황에서 어린 아이들이 헐값에 팔려가는 것을 눈여겨보았기에 이런 표현이 가능했습니다.
요엘이 꿈꾸던 것은 온전한 예배 공동체였습니다. 한 세대에 일어난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들이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세대와 세대가 어우러져 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가 요엘이 꿈꾸던 공동체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이스라엘 안에 지휘고하, 남녀노소를 망라한 땅의 모든 거민들이 함께 이야기해야 할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채찍질입니다. 처절한 현실의 고난입니다. 모든 곡식들은 메뚜기 떼가 먹어버렸고, 포도주가 끊어졌습니다. 나무는 껍질조차 벗겨졌고, 밭은 황무하고 사람의 모든 즐거움이 말라버렸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 아픈 이야기, 감추고 싶은 이야기, 쓰러지고 피 흘리는 이야기를 계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엘은 그 이야기를 말하고 들으라고 예언합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반드시 고백해야 할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찾아온 심판은 내 죄악에 대한 결과이며, 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환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알아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은 물론이거니와 죄악과 불순종에 대한 처참한 결과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고백하고 전수하는 것이 예배 공동체가 가진 특징입니다.
신약 시대에 바울을 비롯한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죄에 대한 처참함과 우리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은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죄의 고리를 끊기 위함입니다. 철저한 죽음, 하나님께 버려짐까지 당하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침묵하던 입을 열어 주님의 부활을 고백하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을 전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은 물론 인류의 수치스러운 과거와 죄악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배 공동체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철저하게 죄악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노래했습니다.
요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처참한 상황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해주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까지 노래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상황에 처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13~14절입니다.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우리 인생에도 메뚜기 떼와 같은 상황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암사자의 어금니와 같은 원수의 공격과,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내의 울음과 같은 눈물이 내 안에서 솟아날 때가 찾아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 현실에 반창고만 붙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치유가 될 수 없습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썩은 살을 도려내고 불순물을 제거하시도록 온전히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자라는 것은 내 삶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 자임을 의미합니다. 먹고 마실 것도 없고, 영적인 기쁨을 잃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현실을 안고 이제 하나님과 이야기합시다. 고백합시다.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될 것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편18:6)
< 기도>
환난 중에서 반드시 찾아야 할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건만, 우매한 우리는 환난에서도 입술을 벌리지 못하는 먼지 같은 존재임을 발견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이 있듯이, 환난이 있어야 구원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는 새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암담하고 어둡던 사회적 현상에서도 요엘이 꿈꾸었던 예배 공동체가 또한 우리의 꿈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나라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현실의 아픔을 고스란히 내어드리는데 헌신하는 미쉘원가족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예배자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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