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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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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경희 자매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35520 |
죽 음
(누가복음 20:38, 로마서 14:8)
2013년 5월 19일 주일예배
강경희 자매
(121st 미군병원, 정신과 의사)
지난 가을, 저희 부부는 가능한 한 추수감사절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려고 보스톤에 있는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세 사람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어 충격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우리 아파트 단지의 젊은 매니저입니다. 그는 제가 도착하기 2주 전에 사무실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난해에만 해도 우리 집의 수선할 곳곳을 살피며 친절하게 도와주었던 분입니다. 몇 년 전 심장마비로 죽은 저의 조카가 37살이었는데, 제가 보기에 그 죽은 아파트 매니저는 제 조카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로 보였습니다. 또 한 분은, 보스톤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던 한인 이비인후과 의사인데, 그의 자살 소식도 의외였습니다. 그 전 해, 2011년에도 제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곳 교회의 한인 의사께서 자살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슬픔을 오래 경험하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분은 정말 선하고 사랑이 많으셨습니다. 교회에서도 수 년 동안 중남미 단기 선교단을 이끌며 많은 정열과 시간, 물질로 앞장서 헌신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신앙 또한 하나님 앞에 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번민하고 노력하셨던 분으로 제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저희가 아파트를 사서 짐을 옮겨놓고 오기 전, 저희와 17년 반을 마주보고 살며 친교를 나누던 길 건너 노부부의 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허허벌판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본 순간이었습니다. 그 집 부인께서 돌아가신 후 상황이 허락하는 한 종종 들렸고 한국에서도 전화통화를 하곤 했습니다. 저는 전화기를 붙들고 우셨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전 해에, 빈 집 앞을 서성이는데 우리에게 지나가는 우편배달부가 ‘할아버지께선 병환이 심해지셨고 결국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비록 두 분이 없는 곳이지만 그래도 한 번 다시금 모퉁이를 돌아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옛 집 앞이 평평한 공터로 변해버린 것 아닙니까. 이 경험은 순간적으로 네바다 주의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어느 부분에 서 있는 듯, 모든 것이 텅 빈, 그대로 정지되어버린, 그래서 나 자신의 존재마저도 없어진듯한 느낌이었습니다.
90년대 후반, 죽음의 병으로 알려졌던 에이즈(AIDS,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성 면역 결핍증) 치료에 깊이 관여하고 공헌이 컸던 Jerry Groopman 이라는 하버드 의과대학 부속병원인, Deaconess Beth Israel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가 에이즈를 앓고 죽어가는 이 병에 걸린 계기와 연령이 각기 다양한 8명의 환자들의 이야기를 그분들의 허락을 받고 출판하였는데, 그 책의 제목이 시편 39편 4절 말씀에 나오는 “the measure of our days"(우리의 날을 세는 법)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절규합니다.
“주님 알려주십시오. 내 인생의 끝이 언제입니까?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구약 성서에서 무드셀라는 969세까지 장수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는 자신의 불멸을 믿고 있을지 모르지만,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살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를 모를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면 죽음의 상황, 고통, 고독, 사후 내세에 대한 공포, 방어능력과 컨트롤(control)을 상실하는 공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직접적으로는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간 경험을 한 사람도 있고, 간접적으로는 가까운 친지나 가족 혹은 지인들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뿐만 아니라 뉴스나 인터넷을 통해 늘 죽음의 소식을 우리는 접하고 있습니다. 자살, 타살, 자연사, 병사, 재난사, 전사, 테러사, 사고사, 순교자적인 죽음, 정의를 위한 죽음, 목소리를 내기 위한 죽음, 억울한 죽음, 슬픈 죽음, 고통스러운 죽음 등등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끔찍한 주제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하는 사실에 억울해 하고 분노합니다. 마치 경쟁에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대 문화,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 역사에 남은 철학자, 종교학자, 신학자들이 이 죽음의 주제를 다루어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서 그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각기 피력해왔습니다. 책상위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강의 하는 Shelly Keegan 교수는 이 주제로 17년간 연속 예일대 최고의 명 강의로 유명합니다. 그의 책, “Death"(죽음이란 무엇인가)의 번역판이 최근 한국에도 출판되었고 그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열린 예일 강좌 웹사이트에 그의 책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셸리 케이건 교수가 1995년부터 예일대에서 진행해온 교양 철학 강좌를 새롭게 구상한 것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영원한 삶은 가능한가?’,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가?’, ‘죽음은 나쁜 것인가?’, ‘영생은 좋은 것인가?’, ‘자살은 합리적 선택인가?’ 그런데 이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만 귀결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셰리 케이건 교수는 이 책의 서두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말을 인용합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 분이 서문에 강조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는 증거나 주장은 책에서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결론이라기보다는 출발점이라는데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케이건 교수는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와 과학적, 역사적, 철학적인 찬반양론을 모두 열거하여 이야기한 다음 자신의 의견을 기술하였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그리고 서구 기독교 영향을 받은 이원론적인 생각, 즉 인간은 육체 이상의 존재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비물질적인 영혼의 형태가 있음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끝이며 우리의 삶은 단 한 번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귀중하가를 깨달아야 하고, 더불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도록 “동기”와 “근거”를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충만한 삶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보스톤에 사는 동안,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 하버드대학에서 하는 학회 중 “Spirituality and Healing in Medicine”(의학에서의 영성과 치유)이 인기가 좋았습니다. 3일간 진행되는 모임인데, 한 해는 영성 혹은 믿음의 요소(Faith Factor)가, 병에 대하여 예방, 치유, 재활, 또는 생명 연장에 얼마나 두드러지게 긍정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느냐에 중점을 두고, 그 다음 해에는 죽음의 과정에서 영성 혹은 믿음의 요소가 주는 효과를 다루는 모임이었습니다. 각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시간을 할애하여 발표를 했는데 각 종교 지도자들뿐 아니라 많은 의사, 간호사, 치료사들이 임상 속에서 경험하는 사건들을 증인들로써 간증 했기에 그곳의 분위기는 마치 부흥회와 같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짐작하시고 아시겠지만 기독교의 영향이 큰 미국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성, 기도, 중보, 믿음과 같은 것들이 얼마나 치유에 중요할지 공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헬레니즘 세계로 들어와 헬라 철학과 섞여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 되어버린 심신(영육) 이원론적인 그리스 철학의 영혼불멸론과, 묵시문학에서 볼 수 있는 종말부활론을 믿기 때문에 육체는 없어도 어떤 형태든 혼이 여행을 다시 계속 할 것이며, 통계적으로 볼 때 10명 중 7명은 천당을 믿고, 56%는 지옥도 있다고 믿지만, 단지 4%만이 자신이 지옥에 갈 확률이 많다고 생각한답니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종교를 갖고 영성과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생명을 너무 연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 같은데, 오히려 이들은 통증이나 고통을 달게 받더라도 생명 연장을 더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생명의 연장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외의 답변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임하면 다음의 4가지의 걱정을 하게 됩니다.
1) 실제적인 문제로 누가 나를 돌볼 것인가?(practical matter)
2) 작별인사를 하고 떠날 수 있을까?(emotional matter)
3) 의학적인 면으로, 통증을 해결하는 것, 혹은 식물인간으로 남으면 어떡하나?(medical matter)
4) 사후문제? 혹은 용서받지 못 할 죄인인가?(after death)
2년 마다 의사면허를 갱신해야 하는데, 제가 있었던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죽음에 대처하는 강의(end of life)를 수료해야만 면허를 계속 허락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이 분야는 중요한 이슈입니다.
1997년 갤럽(Gallup International Institute)의 통계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그 때 벌써 1/3의 응답자가 의사가 도와주는 자살을 법제화하기를, 1/3은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찬성하는 법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반면 31%는 강한 반대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아무튼 응답자의 95%는 신 혹은 Super Power를 믿는다는 답변 속에 나온 응답이었습니다. 그 만큼 양질의 삶이 아닌, 고통의 생명연장에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2009년 2월, 한국 종교학회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판했더군요. 부제로는 “여러 종교에서 본 죽음의 문제”로 하고 여러 챕터(chapter)에서 무속, 유가철학, 증산교, 불교, 힌두교, 도교, 가톨릭, 기독교, 이슬람교를 대표하는 다양한 저자들이 죽음에 대한 그들의 종교학적 이해를 담았더군요. 이 책에는 새길교회에 말씀증거 하러 매년 오셨고 또 저희들이 참 좋아 하는 정양모 신부님과 김경재 목사님의 글이 실려 있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맺음말에 황필호 교수가 죽음에 대한 한국인의 견해를 묘사하였는데 ‘복수 철학’ 내지 ‘복수 종교’ 현상이 있는 “종교 백화점”, 즉 유교, 불교, 도교 이른바 삼교와 전통적으로 내려온 무교, 풍수지리설, 거기에 기독교까지 공존하는 한국에서 한국민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많은 한국민에게 1) 이승과 저승은 구별되나 분리되어있지 않고 하늘, 바다, 땅, 신 등은 모두 이승의 “확대된 공간”이라고 합니다. 2) 이승과 저승의 이런 공간적인 비 단절성은 다시 산자와 죽은자의 연속성 혹은 지속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산자와 죽은자를 서로 분리시키지는 않더라도 서로 구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국인들의 답변은 그들의 종교적 입장에서 혼육-이원론, 혼백육-삼원론, 삼혼칠백-다원론 등 상이하고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한국인은 무교인 이며 동시에 유교인 이라고 쓴 것이 기억됩니다.
이제 기독교에 대해 쓰신 두 분의 말씀을 참조하여 저의 생각을 나누고자합니다. 정양모 신부님의 글 중에는 영혼불멸을 확신하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소크라테스와 대조되게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막 14:34-36) 하고 하느님께 간구한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막 15:34, 시 22:2) 라는 절망적인 절규와 마지막으로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막 23:46, 시편 31:5) 라는 신뢰와 수락하는 예수의 모습이 있습니다. 또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으소서”(행 7:59)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처음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스테파노의 죽음도 있습니다. 도무지 죽음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도 바울은 예수의 그리스도 재림이 곧 도래할 것으로 믿었고 초창기 여러 서신에서도 바울은 죽지 않고 산 채로 구원받을 줄 믿는 대목이 많습니다. 그러나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 주둔 로마군 부대 감옥에 갇혀 순교 당할 처지에 놓인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24절에 처음으로 사후 저승에 대해 언급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며,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육신으로 남아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늘 바울 서신에서 강조되었던 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는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서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5장의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사람의 부활, 몸의 부활에 대한 성서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는 각자의 믿음과 이해와 해석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구약에 쓰여 있는 이스라엘에 성행한 묵시문학의 여향을 받은, 역사의 종말에 육신이 부활하리라고 믿는 종말 부활론, 즉 유한한 인간생명의 영원화를 믿는 신앙이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리스 철학의 영혼불멸을 믿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 신앙을 강조하게 되고, 장례식과 추모 찬송가 가사에도 반영이 되어 남겨진 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어릴 때, 죽으면 요단강을 건너 황금마차를 타고, 앞서간 사람들과 예수님의 영접을 받으며 보석이 찬란한 천국에, 부활한 육신으로 도착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할머니들의 신앙이 기억되고 또한 저희들 중에도 그런 믿음과 꿈이 있는 분들이 있겠습니다. 정양모 신부님의 결론은 죽음에서는 육신은 소멸되지만 자신의 인품, 인격, 사람됨을 거두어 가시는 영원하신 분을 뵈러가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영생을 향한 삶의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김경재 목사님께서는 구약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넘어 누가복음 20장 38절에 예수가 말씀하신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 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느니라”를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서 영원한 생명은 생명자체인 은혜로운 하나님의 생명과의 사귐이며, 교통이며, 참여이며,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의 창조됨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며, “날마다 죽음”으로써 새 생명을 입는 은총의 신앙 안에서 생명 부활 체험이 현실화 되고 ”죽음“을 상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김경재 목사님 역시 고린도후서 15장 4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하늘에 속한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는 말씀을 인용하며 영육이원론에 기초한 영혼불멸설이나 영혼윤회설의 입장에 대해 본인의 입장은 분명히 다름을 밝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영원한 생명에로 초청하는 은혜로운 하나님이 계신다는 신앙 안에서 유한한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혀지고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는 기독교의 신앙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바티칸 시스틴 성당, 천장화에 그려진 불후의 명작, 성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라는 그림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 그림을 말씀증거에 나누고자 생각하던 중에 우연히 “내게 찾아온 은총” 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김경재 목사님은 이 책에 짧은 수필을 쓰셨는데 그는 이 명화가 작품성을 떠나 수 백 년 동안 서양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에게 부정적 영향, 곧 “초월적 유신론”, “유신론적 인격신” 개념을 주었다고 하며, 이점에 대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초월적 유신론과 유신론적 인격신의 개념의 기본 원리는, 1)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이층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2) 하나님은 시공간적으로 초자연적인 세계 곧 천국에 계십니다. 그런가하면, 3) 하나님은 인격적 신으로 사람의 형상과 비슷하며 천군 천사에, 또 앞서간 성도들에게 싸여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4) 복음적 구원― 죄악으로 물든 지구만의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해서 초자연적 천국으로 올라감 ―입니다. 한 마디로 이러한 개념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김경재 목사님은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들도 새겨서 각자의 믿음에 반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그림에는 하나님은 오른쪽 위에 위치하며, 천을 걸치고 있고, 남성적으로 생겼으며, 근육이 좋은 이미지로 그려져 있습니다. 꽃미남의 아담은 왼쪽에 위치하며, 조금 낮은 곳에 그려졌습니다. 저도 남성적 하나님과 여성적 아담이 별로 탐탁찮긴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모습으로 왼쪽 손과 인지 손가락을 뻗어 하나님께 다가가려 합니다. 하나님은 오른팔을 뻗어 인지 손가락으로 아담에게 닿으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의 영감을 Veni Creator Spiritus라는 중세의 찬송가에서 “아버지 오른손의 손가락” 부분에서 받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 그림에서 하나님과 아담은 마치 거울에 반사된 (좌우대칭의 상) 두 모습으로 각각의 손가락이 서로 닿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아담에게 도달하려고 하고(reach out) 아담은 그 손가락을 팔을 뻗어 잡으려합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맞닿으려는 처절한 순간입니다. 많은 분들의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아담의 창조 이후 선악과 사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분리되는 죄인의 모습으로부터 아빠 아버지 하나님께서 마치 탕자를 맞이하는 듯 구원의 절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손가락이 맞닿으려는 부분이 주는 의미는 너무나 귀중하고 마음을 흔드는 부분입니다. 이 절절하고 처절한 순간은 영원한 생명의 주님께 영원히 부착(attach)되는 또는 접착되는 그리하여 하나(wholeness)가 되는 절대적 생명,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결코 누구도 끊지 못하는 은총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관계입니다. 물론 이러한 경험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매 순간마다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그 죽음의 순간에 이 그림이 더욱 위로가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주님과의 부착(attachment)이 바로 치유(Healing)입니다. 화해와 용서입니다. 주님과의 부착으로 하나됨이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말씀을 끝내기 전에 1997년에 미치 앨봄이라는 작가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특별히 6일째 된 날, 모리교수와 나누었던 emotional detachment(감정 분리)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드리려 합니다. 이 책은 한국에도 번역판이 나와 많은 분들께 감동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스톤에 있는 브랜다이스 대학, 사회학 교수인 Morrie Schwartz 교수가 루게릭병으로 서서히 전신이 마비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 제자, 미치가 화요일마다 이 분을 찾아와 담소한 기록을 중심으로 죽음을 향한 여정에서의 삶에 대한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모리 교수는 자기같이 죽어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제자 미치에게도 삶의 모든 경험들에서 감정을 떼어내는(detach) 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을 끊는 것과 비슷할까요? 제자가 반박합니다.
“교수님은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을 삶에서 다 경험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리 교수가 대답합니다.
"Detachment doesn't mean you don't let it penetrate you. On the contrary, you let it penetrate you fully. That's how you are able to leave it." (분리한다는 것이 감정이 당신을 꿰뚫어 지나지 못하게 하는 의미가 압니다. 반대로 당신이 당신의 모든 감정을 충분히(온전히) 깊이 스며들어 관통하게 하세요. 그리하여야 그 감정을 떠날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어떻게 죽을지 아는 사람이 어떻게 살지 안다고 합니다.
"When you learn how to die, you learn how to live."
모든 감정을 전부 쏟아 부어 열정을 다해 살았다면, 그는 모든 감정에서 해방되고 자유케 될 수 있고 진정한 자기 초월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죽음의 때에 그 죽음 자체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진정한 자기 초월을 이루어서 주님과 하나 되기를 기원해야 할 것입니다. 산자의 부활과 죽은자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 음악 : 슈베르트 연가곡 중 “밤과 꿈” - 미성의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 >
거룩한 밤, 네가 내려오면
꿈도 너의 달빛처럼 공간을 질러 떠내려오네
사람들의 조용한 마음속을 통해 내려오네
그들이 즐겁게 듣다가
아침이 밝아오면 그들은 울음을 터뜨리네
“돌아오라, 성스러운 밤이여!
달콤한 꿈이여, 돌아오라!“
< 기도 >
죽음과 부활을 함께 보여주셔서 영생을 약속하신 주님을 믿고,
우리가 삶의 여행을 하는 동안 믿음대로 열심히 살게 하시고,
언젠가 홀로 영원한 거처로 돌아가는 때가 되면,
위로와 평안이 우리 마음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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