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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11:2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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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93803769 |
2009년 11월 22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신명기 11장 26절~28절
설교제목 : 성인(聖人)의 길, 소인(小人)의 길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며,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길을 떠나,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신명 11:26~28)】
<기독교의 하나님 상(像)>
“너희들 내 말 잘 들으면 살고, 내 말 안 들으면 죽어!!!” 어렸을 때, 마을마다 약간 껄렁거리는 ‘동네깡패들’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이 동네 후배들 앞에서 잔뜩 폼 잡고 하는 말이 곧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들 내 말 잘 들으면 살고, 내 말 안 들으면 죽어!!!” 그런데 이 유치하고 졸렬한 말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인의 전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마치 동네깡패들이 힘없는 어린 애들 위협할 때 말, “너희들 내 말 잘 들으면 살고, 내 말 안 들으면 죽어!!!”를 되뇌이고 있는 존재가 하나님이었습니다. “너희들 하나님 말씀 잘 들으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 정말 유치하고 졸렬한 말, 극도의 이기주의적 발언, 배타주의의 극을 달리는 저질스러운 말씀 … 이게 소위 전통적 기독교가 힘주어 주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유치하고 졸렬한 존재일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며,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길을 떠나,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신명 11:26~28)】
이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어보면, 앞서 말씀드린 동네깡패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무수히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이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심한 노릇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회에서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설교되고 있고, 이를 받아들인 무수히 많은 전도대원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어”라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온당한 것일까요? 정상일까요?
<해석의 중요성>
이 대목에서 저는 ‘해석’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신구약 성경이 펼쳐져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 거룩한 책을 읽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움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 책은 별로 쓸데 없는 이야기만 가득찬 이야기로 읽혀질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그냥 읽으면 졸린 책으로 생각될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반감만 잔뜩 일어나는 책으로 읽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책이 은혜로운 감동이 책이 될 수 있는 조건은 그 사람이 오직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일 경우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주 여러 차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태 11:15)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 먼저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들을 귀’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들을 귀 없이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동네깡패의 말씀처럼 해석되는 것입니다. 죄송하고 애석하게도, 그게 한국교회의 성서해석 수준입니다.
<들을 귀를 마련하는 일이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들을 귀’를 마련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일찍이 기형도 시인이 이야기한 바(시 ‘우리 동네 목사님’ 참고) 있는 “성경에 밑줄을 긋기에 앞서서 생활에 밑줄을 긋자”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해석될까요? 그건 생활, 즉 삶에 밑줄을 그으면서 신중하고 지혜롭고 올바르게 사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에 신중하게 밑줄 그으면서 사는 사람만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해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글쎄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습니다만, 진실된 이야기니까 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성경을 별로 읽지 않습니다. 일부러.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은 성경이 해석한다”면서 성경읽기를 강권합니다만, 저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제대로 해석해 내는 키워드는 ‘삶’이라고 봅니다. 삶을 제대로 살아야만 성경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일부러. 요즘은 그냥 생활에 밑줄을 그으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성경 읽기는 조금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동양 고전으로 성경읽기>
제가 요즘 주력하게 되는 일은 동양의 고전들을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 입장에서 보았을 때, ‘들을 귀’를 마련하는 일이 곧 “동양사람(한국인)으로서 동양사람들(한국인들)의 생각과 지혜를 앞서 배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그냥 해석하면 동네깡패 이야기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리학의 말씀으로 오늘 성경 말씀을 해석해보면, 그 의미가 더 깊고 넓고 높습니다. 제가 요즘 퇴계 이황 선생이 쓰신 『성학십도』(聖學十圖, 풀빛출판사)을 읽었는데, 그 책을 통해서 배운 바는 “인간의 길에는 세 가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즉 성인(聖人)의 길, 군자(君子)의 길, 소인(小人)의 길입니다.
제 나름으로 소화해서 말씀드리면, 군자로서 태어난 인간들은 그 인생 걸음마다 두 가지 길 앞에 섭니다. 성인의 길과 소인의 길입니다. 그런데 소인의 길은 가기 쉽고, 성인의 길은 가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소인의 길로 가면 등 따습고 배부른 인생길이 열리는데 반해 성인의 길로 가면 외롭고 고독한 인생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 육체적인 차원에서 그렇고,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그 반대의 길이 열립니다. 정신적인 맥락에서 보았을 때, 성인의 길은 대자유(大自由)의 길이고, 소인의 길은 한 마디로 배부른 돼지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로 가시길 원하십니까? 대답은 쉽지 않지요!
오늘 성경말씀은 성인의 길과 소인의 길, 두 갈래 길에 서게 된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자꾸만 소인의 길로 갈려고 하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대가 등따습고 배부른 돼지의 길, 즉 소인의 길로 가려하는가? 아니다. 그 길에는 자유가 없다. 구원이 없다. 진정한 기쁨이 없다. 평안이 없다. 사랑이 없다. 힘들고 고생스럽더라도 성인(聖人)의 길로 가라. 그 길에 참다운 구원이 있다.” 이게 오늘 성경말씀의 제대로 된 해석입니다. 얼마나 깊고 높고 넓은 메시지입니까!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며,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길을 떠나,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신명 11:26~28)】
<참고 사항>
앞서 말씀드린 『성학십도』(聖學十圖, 풀빛출판사)에는 성인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이 마음 가운데 새겨야할 삶의 자세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선현들의 생각을 모아서 정신을 집중하고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는 주일무적(主一無適), 몸가짐을 단정하고 가지런하게 하며 마음을 엄숙하게 유지하는 정재엄숙(整齋嚴肅), 언제나 맑은 상태로 깨어 있어야 하는 상성성법(常惺惺法), 마음을 잘 거두어 들여서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기심수렴(欺心收斂).” 참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성인(聖人)의 길, 소인(小人)의 길’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인의 길, 소인의 길’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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