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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1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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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95327270 |
성경말씀 : 고린도전서 1장 18절~21절
설교제목 : 하느님을 섬기는 바보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고전 1:18~21)】
<바보 이야기 세태>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한 동안 ‘바보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바보스럽게 산 사람’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참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세상적으로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적으로(?)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화가 김병종은 ‘바보 예수’라는 시리즈 작품들을 발표한 적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바보였다고 보았고, 그래서 바보 같은 표정의 예수상이 가장 예수님의 실체에 가까운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의미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제 마음 가운데 “뭔가 부족하다” 싶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야기인즉은 맞는 말인데, 뭔가 실감있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뭐랄까요? 피부에 와 닿지 않고 공허하게 떠도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러시아정교-역사 신학 예술』(석영중 지음, 고려대출판부)을 읽으면서 ‘바보 삶의 실체’랄까, ‘바보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바보로 살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영성적 맥락에서 바보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한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책 이야기>
그 책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유지로비’의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지로비’란 성자 바보, 혹은 바보 성자라고 번역되는데, 바보짓과 광대짓, 미치광이 짓을 하면서 정상인들이 들을 수 없는 신의 음성을 듣고, 이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색적인 성인남녀를 의미합니다. 책 내용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러시아 유지로비는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혹은 스페인 문학의 돈키호테 등에 비유되고는 하지만 민족성과 밀접한 관계, 유구한 전통, 그리고 폭 넓은 대중성 등의 측면에서 볼 때 그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로지비의 유래는 성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고전 1:18~21)】 러시아어 성서는 이 구절들에서 ‘어리석은 생각’과 ‘어리석다는 복음’을 모두 ‘유로드스뜨보’(iurodstvo)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렇게 구원을 가져오는 어리석은 생각과 어리석은 행위의 주체로 유로지비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로지비는 세상의 지혜나 지식을 거부하고 그보다 무한히 높은 하느님의 예지로써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존재라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통상 유로지비에게서 보통의 기도나 보통의 설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신비하고 초월적인 기적을 기대하고는 했습니다.
지저분한 몰골,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 덮수룩한 수염, 누더기 옷, 일부러 몸에 걸친 쇠사슬 같은 것들은 유로지비들의 외적 표징이었는데, 그들은 지상으로 내려와 갖은 수모를 다 당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처형당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모욕을 자초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욕설이나 재담을 통해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지만, 그러는 와중에 진리와 예언의 말을 내 뱉었기 때문에 민중들 사이에서는 그들에 대한 암묵의 존경과 사랑이 자라났습니다. 바보, 혹은 광대, 혹은 거지, 혹은 이 모두를 다 합친 존재인 유로지비는 수도원에 은둔하면서, 혹은 세상을 순유하면서 거침 없이 진리를 내 뱉었고, 사제의 말은 경멸하는 제왕들과 세도가들도 그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
이 유로지비 이야기가 오늘 설교말씀의 모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바보로 살아야 하는 이유>
우리가 바보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야 인생을 가치있게 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 가지고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바보 영성’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바보 영성’의 의미는 그 보다 훨신 더 깊고 넓고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보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렇게 바보로 살아야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보로 살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보로 살아야 하느님과 친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보로 살아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정교회 역사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바보가 어떤 삶을 사는가’에 대한 아주 좋은 사례가 있습니다. 러시아에 정교회에 들어오게 된 배경에는 블라지미르 공후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첫째 아들 스뱌또뽈끄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동생들이 보리스와 글렙을 암살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보리스는 스뱌또뽈끄가 생명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기도를 올린 후 자진해서 자객의 칼 아래 스러졌습니다. 스뱌또뽈끄는 글렙도 제거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글렙 역시 맏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부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보리스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폭력은 다른 폭력을 부른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피하지 않고, 맏형이 보낸 자객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 두 형제는 피할 수도 있었을 수난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폭력과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고 ‘눈물과 기도와 희생’으로 답함으로써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민중과 정교회는 두 형제를 러시아 최초의 성인(聖人)으로 숭앙했던 것입니다.
물론 너무 극단적인 사례여서 우리 입장에서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차원도 있습니다만, - 그래서 여러 가지 반론도 제기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바보의 삶’이란 그런 차원임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문제점, ‘헛 똑똑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문제점은 너무 똑똑하다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 똑똑합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만큼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인류가 현대인들입니다. 손해는 눈꼽만큼도 보지 않으려고 하고, 남한테 지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결실을 얻어내려는 인류가 곧 현대인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헛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똑똑한 인류에게서 하느님과의 교류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고,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그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의 근원과의 사귐이 없는 가운데 무슨 행복한 인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헛 똑똑한 것이고, 진짜 어리석은 삶인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을 섬기는 바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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