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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의사 선생님이
간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한다.
초음파를 찍고 결과를 보러 갔더니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한다.
“암입니다!”
“그렇군요.”
너무 태연하게 대답을 했기 때문일까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심각한 정보를
마침내 발견해서 알려주었는데
게다가 VIP로 대접을 해주었는데
그저 “그렇군요” 라니!
의사는 정색을 하면서
간경화에 암까지 붙은 모형을 보여주며
이렇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정말 흉물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미 암이라는 말에
마음의 짐이 녹아 내렸다.
빚진 마음이 사라졌다.
평생에 링거 주사 한번 맞지 않고 살아오면서
누군가 아프다고 입원하면 찾아가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나올 때면
그때마다 늘 빚진 마음이었다.
많은 암병을 겪는 이들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임종을 앞둔 이들과 인생을 정리하고
기어코 장례식을 하며 헤어질 때마다
빚진 마음이었다.
대신 아파 줄 수도 없고,
게다가 병원 침대에 누워본 일도 없으니
내가 너무나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 때문이리라.
이젠 됐다는 생각이 찾아 들었다.
빛처럼!
의사 선생님은 CT를 찍어 보자고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MRI와 조직검사를 할 수도 있다고
아주 친절히 설명을 해준다.
그의 관심에 고마운 마음으로 동의하였다.
잠시 기다리니 일정을 신속하게 잡아 주었다.
나는 병원을 빠져 나와 교회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한강을 건너고 강변도로를 달려 교회에 이르는 한 시간
그토록 한강과 하늘이 아름다울 수 없었다.
강변을 달리며 생각들이 이어졌다.
나는 암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번개처럼 떠올랐던 생각이 낱말로 풀어지는 것이었다.
“아 이생에서 빚진 것은 어떻게 한담!”
나를 위하여 희생하고 도움을 준 사람들
언젠가 갚을 날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 언젠가가 미룰 수 없이 갑자기 이렇게 닥치는 것이구나!
먼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은 어언 혼인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20년이 되던 해에 돌이켜보니
둘이서 서로 이사한 것이 18번이나 되었었다.
별난 인생을 지어왔고, 나는 주의 일을 한다는 이유에서
내게 우선권이 주어졌고 그는 늘 나를 위하여 희생하였다.
게다가 나는 늘 쌓아 올린 것을 스스로 훼파하며
순례의 길을 가겠다 한 것이 방황과 다름 없는 인생살이였으니…..
마음을 사로잡았던 낱말들이 다시 떠오른다.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인생은 다리이니 다리 위에 집을 짓지 말라.”
그리고 나를 도운 이들, 성도들, 무수히 많은 만남들
그렇게 까닭도 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만나서
도움 받고 섬김을 받아왔으니 이 큰 빚을 어찌하랴!
마음 속에서 뚜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젠 빚을 갚고,
함부로 섬김을 받지 않도록 삼갈 것!”
흐르는 강물을 바라다 보는데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슬픔을 남기게 되었구나!"
하지만 어찌하랴.
이는 이생에서 누구나 겪으며 가야 하는 통과제의인 것을!
나 역시도 이를 겪으며 인생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주께로 가는 다리가 되지 않았던가!
어머니마저 땅에 묻고 인생의 답을 찾아 간 곳이 신학교였고
결국 그 길에서 답을 얻게 되지 않았는가?
절망은 곧 희망을 낳지 않았는가!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지는 강변과 하늘과 검푸른 한강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
시제가 과거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아름다운 지구의 추억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달리는 강변은 황홀한 꿈결이 되어버렸다.
과연 이생에서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지금 펼쳐 놓은 그 많은 일과 계획과 꿈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교회의 일상의 목회, 부암동 사랑의 농장, 노숙인 대학, 포천 노숙인 공동체,
산마루청년아카데미, 산마루서신, 방송하는 일, 집필할 책들, 사진, 서예
올해도 청년들과 넘어야 할 설악산 종주, 평화 캠프…….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데 어떻게 하나?
늘 하던 설교 한 토막이 떠올랐다.
“내일은 사람의 손 안에 있지 않다.
우리에겐 오직 오늘만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간에 꽤나 복잡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제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주께서 이루어 주신 일이 그 얼마인가?
감사하자. 목회도 욕심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진정한 목회는 가난한 마음으로 단순히 해야 할 일이다.
목회의 그 주권을 주님께 확실히 맡기고 인도하심만을 따르자.
주의 일이니 주께서 하시지 아니하겠는가!
불현듯 안도와 감사가 밀려왔다.
간암에 대한 의학적 확률이 떠올랐다.
지금 같으면 5년 이상 생존율은 60퍼센트가 넘는다는 것
마무리할 시간은 충분하다.
주께서 개척 1대의 담임자로서 각 분야의 기초를 잡아 놀 시간은
충분히 주셨다는 확신이 밀려왔다.
어느덧 차는 교회에 도착했다.
교회에 들어오니 감격스러웠다.
늘 작게만 느껴졌던 교회가
오늘은 그 어떤 대리석 성전보다 귀하고 거룩하기만 했다.
제단에 나가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하동철 장로님이 만든 빛의 십자가에
사순절 기간인지라 가시면류관이 하얗게 달처럼 걸려 있었다.
주께서는 3년의 공생애를 사시며 사역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다.
목회 사역은 이렇게 하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일 뿐
나의 계획과 외형적 성취로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목회 사역은 주의 일이니 주께서 인도하시리라!
감사의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게 눈물이 흘렀다.
주님 앞에 묵상하는 중에 마음이 환하여졌다.
처음 내가 깨달았던 바들이 진정한 깨달음이었고
주께서 내게 주신 생명의 길이었음이
재차 확신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생사의 물음으로 찾아 들어갔던 신학교 시절로부터
10년 여 세월이 지난 1987년 답을 얻을 수 없어
영적 자멸의 시점에 이르렀을 즈음이다.
목사직도 내려놓아야 하겠다는
절망의 어둠 중에 영성 수련을 시작했다.
그때에 신학과 교리의 죽은 예수를 살아있는 예수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사형선고 받은 이가
오늘 죽나 내일 죽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는 사춘기로부터 울렁거리는 존재의 화두였다.
허무, 무가치, 무의미, 유한함, 죽음!
이 하늘 아래 이것을 넘어설만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허무와 유한함을 넘어설 수 있는
의미와 가치를 만나거나 창조할 수 있을까?
그러하다면 오늘 살아갈 의미와 가치가 있겠지.
바로 무한한 가치, 영원한 의미, 그것을 지닐 만한 것 말이다!
그러나 신학교 시절의 교수, 내가 접한 목사, 내가 속한 교회들!
그들에게서는 허망하게도 빈탕이었다.
그들은 생사의 물음에 매달리지 않는다.
공교로운 것일까? 내가 만난 경우는 그러하였다.
오직 지식을 전하는 강의,
자신들도 경험해 보지 못한 존 웨슬리의 회심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목회의 성공과 이를 위한 지배와 관리,
자기의 불안도 해결하지 못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혼란,
그리고 교단 내에서의 정치적 야심에 눈이 먼 경우도 흔하였다.
내겐 다행히 이들을 다 지나고
다음 정거장에 이르게 된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절망의 순간에 살아있는 예수를
가슴에 담고 나타난 이와의 만남이었다.
살아서 살아 있는 한 영혼의 불꽃과의 만남이었다.
불꽃이 있어야 불꽃이 옮겨 붙는 것이다.
내 마음의 불꽃이 다시 살아나자
깊은 기도와 영적 수련이 작동하기 시작하며
영적 깊이와 높이를 더하여 갔다.
무로부터의 창조,
그 중 인간의 창조는 흙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믿어진 것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 되어야 영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원성을 지닌 존재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때 영성 수련과 기도 중에 생기가 찾아 드는 순간을 만났다.
하나님의 기척을 느끼고 주의 사랑에 감응되는 은혜의 순간이었다!
내가 살아나니 만물이 살아났다.
아니 나와 만물이 함께 생기를 얻는 순간이 찾아왔다.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기를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는 것이다.
저 높은 곳으로부터 거룩한 영의 개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허무, 무가치, 무의미, 유한함, 죽음이 일소되는 것이었다.
또한 존재의 질문은
답은 얻게 되는 때가 이르러야 하는 것이요,
그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 속 깊은 심연에 숨겨진 씨앗이 하늘의 거룩한 빛으로
발아하기 시작하여야 얻어지는 것이었다.
스승은 바로 이러한 것이 가능토록 방아쇠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때에 깊은 기도 중에 온 몸이 뜨거워지고
밤새 잠도 사라진 채 새벽을 맞았다.
성령의 임재는 내열하는 뜨거움으로 일어났던 것이었다.
존 웨슬리의 뜨거운 체험이란 이런 것일까?
캐낼 수 없는 죽음과 죄의 뿌리가 뽑혀 나가는 것이었다.
바울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주 예수를 통해 영원 영생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감당키 어려운 감동으로 진입해 들어 왔다.
흙덩이가 생령이 되는 것이요
성경 지식이 생명 사건이 되는 것이었다.
저절로! 그리된 것이다.
그래서 은혜의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그리고 그 영원한 의미와 가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 속에
들어있음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도마는 주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하시자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 14:5,6>
도마가 던져준 질문이 감사하기만 하다.
그 덕에 답을 얻게 되었으니!
주는 영원으로 나가는 출구요 다리요
영원 영생하신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시다.
이제 오늘로부터 다시금
그분과 더 일체되어 그분처럼 생각하고 살아보자.
얼마나 더 충만하게 되겠는가?
영원한 가치와 의미와 생명이 강물처럼 나를 인도하지 않겠는가!
나는 제단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기다리던 아내에게 암이라는 중대한 정보를 전했다.
“암이래요!”
“그래요. 당신 죽지 않아요!”
주의 일이 아직 많아서 죽지 않는단다.
그리고 내가 며칠 전 꾼 꿈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특별한 경우에 꿈을 꾼다.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늘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새벽 4시 즈음이다.
이번엔 꿈에 먼저 가신 어머니와 형님을 만났고
얼굴이 확인되지 않는 많은 분들이 함께 계셨는데
그 얼마나 감동적으로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 그윽한 사랑의 감동은 영적 절정의 경험처럼
모든 부정적 감정을 씻어 내주는 것이었다.
마음을 사랑으로 녹여 주었다.
나는 그분들과 큰 길을 가다가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다.
어머니와 형님은 좁은 길 산과 숲으로 난 길로 가시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잘 가시라고 인사를 드렸다.
깨어보니 꿈이었고 새벽이었다.
나는 그 사랑의 감미로움에 다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감동의 불꽃은 가슴에서 여전히 살아있기에
침대에서 기도하며 묵상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었기에
먼저 가신 어른들과 헤어졌으니 아직은 괜찮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여느 때처럼 침착함과 여유로움,
인내와 긍정의 자세가 여전했다.
나는 서재에 올라가서 책상 앞에 앉았다.
스크랩하느라 두었던 신문들과 자료들,
읽다가 엎어 놓은 책들이 여기 저기 수북하였다.
언젠가 쓸모가 있으리라,
시간이 나면 정리하리라 여기며 쌓아놓았던 것들이다.
수개월이 지나도 쓸일이 없다면
어디에 쓰겠다는 것일까?
인생이 끝난 뒤에라도 쓰겠다는 것인가?
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살아온 삶이었구나.
스크랩할 자료들은 몽땅 버릴 박스에 쓸어넣었다.
책은 무조건 다 책꽂이에 몰아 집어넣었다.
간단히 정리가 끝났다. 순식간에!
주님처럼 제대로 산다는 것도
이렇게 언제든 순식간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감리교 목사는 늘 세 가지를
준비하라 하였다.
첫째는 설교할 준비를 하라.
어느 경우에서라도
복음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사갈 준비를 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늘 어디로라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죽을 준비를 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순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목회자의 전통은 이미 지나간
빛바랜 달력같은 소리가 되었지만
정말 쓸만한 소리여라.
이런 전통이 살아있었다면
지금같은 꼴이 되었을까?
준비되지 못한 설교를 내뱉고
교회가 내 것인 양 평생 눌러 붙어 있으려 하고
교회 자리 하나 나면 줄줄이 장로 붙잡고서 이력서가 100통씩이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자리 싸움에 학연 싸움이니
기가 막혀 웃을 일 아닌가?
나는 이런 영적 오염 지대에서
얼마나 벗어나 살고 있었나?
다행이다. 암이라고 하니!
이미 깨닫고, 이미 받은 은혜를
순식간에 회복하게 하지 않는가.
CT를 찍고 MRI를 찍고
조직 검사를 해서
암이 아니라 하여도
나는 암으로 여기고 살기로 하였다.
나는 나의 삶의 모토를
다시금 되뇌였다.
단순하게! 진실하게! 아름답게!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주를 경외하면서
죽음을 가까이 두고
오직 현재에 머물러 살라!
작두 위를 맨발로 걷듯
현재 위를 걸으라!
SIMPL LIFE HIGH THINKING IN JESUS CHRIST
<산마루서신 http://www.sanlet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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