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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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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전인백 형제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37655 |
주인과 청지기
(누가복음 16:1-9)
2013년 7월 21일 주일예배
전인백 형제
(전 새길교회 운영위원장)
지난해 대통령 선거 전 후로부터 지금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이 언론에 회자되었던 화두 중 하나는 경제 민주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1987년 3월 새길 교회가 창립될 당시 우리나라는 상당한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다고 기억되는데, 그 해 6월에는 6. 29 선언이라 하여 대통령 직선제로의 복귀선언이 있었고, 10월 말에 개정된 제9차 개헌의 주요 내용으로 정치 민주화 조항과 더불어 경제 민주화 조항이 다음과 같이 헌법 제119조 2항에 신설 되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987년은, 평신도 열린 신앙공동체를 지향하는 새길 교회의 창립 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국가적으로는 정치민주화 선언 그리고 경제민주화 헌법입안까지 이어진 뜻 깊은 한 해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후 26년이 지난 이 시점에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양극화를 해소하고 경제적 평등을 최대한 달성하는 것은 현 정부의 큰 과제로 부각되었고 이를 위하여 정치권은 여러 분야의 입법과정을 통하여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나름 애를 많이 쓰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개혁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하여서는, 법적인 규제 이전에 가진 자들 즉 ‘갑’ 의 입장에 있는 대기업집단의 선제적인 의식 개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부 가시적인 조치가 일어나고 있는 곳도 있다고 봅니다. 어느 경제 신문에서는 어떤 대기업이 소위 갑(甲) 옷을 벗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해학적인 기사를 싣기도 하더군요. 소위 갑 을 관계에서 고압적 이기주의 자세를 수정하여 상생의 방향으로 여러 가지 조치를 하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이러한 큰 기업집단의 대주주들이 보다 전향적인 사회적 기업의 철학을 가지고 임하면서, 청지기 역할을 하는 전문경영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상생의 방향을 제시하도록 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리한 내부거래, 소위 일감몰아주기 라던가 부당한 갑 을 관계를 불가피한 현실로 생각하는 사회풍토를 지양하고, 기업집단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경제 주체들 즉 물자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협력업체, 유통 대리점, 근로자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에게 공정한 분배와 계약조건을 제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서 오늘 봉독하여 주신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은, 통칭 “불의한 청지기‘ 의 비유로 예수님의 비유말씀 중에서도 성경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는 가장 난해한 비유 중 하나라고 합니다.
저는 주일날 아침 10시 반에 본 교회 이일영 선생님이 주관해 주시는 성경공부 시간에 금년 초부터 누가복음을 같이 읽고 공부하던 중, 본 16장 말씀을 접하고부터는 계속하여 그 말씀에 매달려 이해해 보려고 다수의 교역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말씀을 찾아보았지만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분은 본 비유를 “해석의 십자가” 라고까지 표현하면서 난해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제 나름의 경험과 사고의 과정을 통하여 이해한 비유 말씀을 여러 교우님들과 같이 생각해 보고자 이 자리에 들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전장인 15장 후반부에서 ‘되찾은 아들, 탕자의 비유’ 말씀을 마치시고 16장에 들어서면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비유 말씀을 하시지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청지기 하나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왜 그러한 이야기가 난무하는지 묻고 청지기 직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속히 결산을 마무리하고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장부가 정리되면 그 것을 보고 사실을 확인하여 해고를 명하려고 한 것이지요. 주인으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은 청지기는 그 막막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였나요? 부자의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는 소문이 돌았을 때 낭비가 의미하는 실제적 상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몇 가지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지기가 사리사욕이 있는 사람이라 착복을 하여 주인의 재산에 축이 나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청지기 본인은 개인적인 치부를 하지 않았지만 게을러서 관리를 소홀하여 주인의 이익을 극대화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요. 또는 소작인이나 일꾼들의 근로복지를 위하여 예전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함으로써 당시 농경사회에서의 공동체 살림을 조금 넉넉하게 하여 주인이 기대하는 수익을 이루지 못하였거나 하였겠지요. 본문에 나와 있는 청지기의 대책 없는 넋두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낯이 부끄럽구나.” 하는 말로 미루어 저는 이 청지기가 사리사욕을 차려서 낭비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리사욕을 차렸더라면 그 넋두리는 아마 “아이쿠! 주인이 다 알아버렸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챙겨두기 잘했지. 셈을 하기는 무얼 해. 그만두면 되지.” 정도로 되지 않았을까요?
이에 그는 어쩌면 평소에 많이 생각하였던 ‘갑이 아닌 을에 대한 배려’를 그의 임기 마지막에 베풀고 을의 대변자가 되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주인에게 말하면 가뜩이나 낭비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셈도 하지 말고 쫓겨날 것 같아서 그는 각 소작인들에게 빚 탕감을 먼저 시행하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주인에게 봉사하였던 빚진 사람들은 주인의 일을 하는 동안에 빚을 진 것인데 일을 하면서 빚까지 늘어나는 이러한 공동체의 상황은 결코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결국에는 빚이 늘어나서 소작의 일에서도 쫓겨나고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생각한다면 파업 등 더 큰 충돌과 무질서가 불가피 해질지도 모르지요. 이러한 분배의 정의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평소에는 주인의 그늘에서 감히 추진할 수 없었던 변화와 혁신을 그는 과감하게 시행하고 약한 자들의 편에서 새로운 청지기의 역할을 자임코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공정한 갑을문화를 세우며 경제민주화를 실현시킨 셈이지요.
문제는 8절인데 주인은 이 불의한 청지기를 슬기롭게 대처하였다고 칭찬하였다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문서를 고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데도 왜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은 다양하게 이 대목을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8절에서의 주인은 비유 속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여 난해한 비유를 풀어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1절과 2절에서의 주인과 8절 상반 절에서의 주인의 반응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비유의 일관성이 없다는 것인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청지기의 개혁적 행동을 알게 된 주인은 그 스스로가 비로소 눈이 떠지며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것만이 선이였던 주인이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따뜻한 상생”의 길로 개혁을 시도한 그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의식의 대전환이지요. 그래서 아마 주인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보게, 자네와 오랫동안 같이 있었는데도 내가 너무 무심했네. 내가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소리만 듣고 오해를 하였었구먼. 자네가 여러 소작인들과 일꾼들의 처지를 그처럼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네. 자네는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네. 내 재산이 다 그들이 애써 일해주어서 형성된 것이 아니겠나. 모든 일을 자네가 다 알아서 앞으로도 잘 운영해주게.”
이제 주인은 보다 큰 안목으로 그 공동체의 실질적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청지기의 슬기로움을 칭찬하면서 갈등과 분열의 상황을 긍정적 소통의 공동체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라고 말씀하시며 빛의 자녀들을 일깨우시려 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신앙공동체를 함께 섬기고 생활하는 빛의 자녀들이 때로는 세상의 자녀들보다 더 좁고 이해심이 부족할 때가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주인과 청지기는 서로 역지사지 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하여 큰 안목으로 개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역지사지 또는 역발상은 미묘한 명분이나 작은 이해문제 등으로 인하여 교착되었던 상황을 변화시키고 사태를 긍정적으로 진전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2주 전 한완상 박사님 말씀증거 시에 인용하셨던 빌립보서 4장 말씀을 다시 기억합니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관용은 법과 규칙 이상의 따뜻한 마음, 곧 인내로 배려하는 마음, 자기의 법적인 권리행사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을”의 딱한 입장을 배려하여 그 권리를 “갑”의 입장에서 행사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지요. 교회가 오래참고 온유하며 약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예수 복음의 본질이 꽃피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에 많은 공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이 있는데, 저는 여기에서 우리 성경 본문에 나와 있는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이 적절치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여 제가 참조한 영어 성경에서 쓰는 Worldly Wealth 또는 Worldly Resources를 번역하여 세상의 또는 세상적인 재물로 표현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수월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적인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세상적인 재물을 친구들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줌으로서 그 재물이 없어지는 날에 그들이 영원한 처소로 맞아드린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나누며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서는 같은 입장에서 평등하게 영원한 삶을 같이 누린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이러한 세상적인 재물을 나누면서 친구를 사귀다가 오히려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던 어떤 부자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저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직장에서 오랫동안 같이 일하였던 동갑내기 상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이고 저는 청지기 중의 한 사람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그의 아버지는 원래 이북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 선친이 키운 소 한 마리를 팔아 그 종자돈을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와 사업을 크게 일으킨 분입니다. 많은 부와 명성을 이루었으나 그는 항상 고향에 대하여 바울사도처럼 “나는 빚진 자라” 는 생각을 가지고 남북이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민간차원에서 경제적 협력체재를 미리 구축해 놓고자 하여 많은 기초 작업을 그의 작은 아들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노쇠해진 그는 작은 아들에게 본인이 시작한 남북 경제 협력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줄 것을 당부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제 그 아들은 그 사업을 계속 추진해야하는 청지기가 된 것이지요. 그는 남쪽과 경계선 상에 있는 북쪽의 동서 지역을 개발하여 남북이 교류하면서 남쪽의 자본, 기술 및 경영 Knowhow 와 북쪽의 토지, 자원과 노동력을 발판으로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있는 남북 경제 협력 사업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는 남과 북 민족 공동체의 상생을 위한 추가적인 협력 사업 협정을 체결하면서 북쪽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16장에서와 같이 불의한 재물, 세상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게 된 셈이지요. 이를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정부는 지배구조와 정치적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법적인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그를 곤경에 빠트렸습니다. 그는 정부가 주인으로 나선 상황에서 더 이상 주인이 아니었으며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는 동안, 박수 받을 줄 알았지만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실정법의 집행을 담당하는 당국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본인이 어리석은 사람이고 어리석은 일을 했었다고 회환하며 먼저 가신 아버지를 찾아 하늘나라로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10년 전 바로 이즈음에 그를 잠시 만났을 때 본인은 매우 힘들어 하면서도 오히려 저의 일자리를 걱정해주던 그의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고 그 2주 후에 그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 때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여러 교우들과 나누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불의한 청지기도 지혜롭고 사려 깊은 점을 들어 주인에게 칭찬을 받은 누가복음의 말씀을 그의 생전에 같이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마음이 있어 이렇게 10주기를 맞은 고인을 추모하며 말씀드렸습니다.
요즈음 남북관계 특히 개성공단 문제로 남북의 실무 책임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으나 서로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진전이 없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오늘 오후에 마침 새길 기독사회문화원이 주관하여 “한반도의 평화, 왜 이렇게 어려운가?” 라는 제목으로 기획토론이 있다고 합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하는 의미 있는 토론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신앙공동체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6년 전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 선언이 있기 전 교회의 민주화를 선언한 우리 공동체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물론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민주적인 우리 신앙공동체는 교우 모두가 바울사도의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스스로 주인이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또한 모두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청지기입니다. 각자의 달란트와 은혜에 따라 청지기 직분을 감당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 공동체는 많은 과제가 있습니다. 제도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길을 가고자 선언하였지만 점차 그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자각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의 청지기들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하여 안정감 있는 체재를 정립하여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청지기들에게 힘을 모아 주면 좋겠습니다. 12년 전 교회의 법적인 틀을 구축하고 사회와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하기 위하여 설립된 새길 기독사회문화원이 새로운 청지기의 리더십 하에 공동체가 축구하는 넓은 신학, 깊은 신앙의 기틀을 더욱 든든히 해 나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청지기들이 공동체의 개혁적인 발전을 위하여 일하도록 칭찬하고 격려하는 주인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청지기의 지혜를 보고 칭찬한 성경속의 주인처럼 말입니다. 또한 그들이 지치거나 어려울 때 달려가서 품에 안길 수 있는 교회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들이 계시면 좋겠습니다. 공동체의 발전을 위하여 변화와 혁신을 제시하는 젊은이들에게 아낌없이 지혜를 선물해주고 길을 열어주고 격려해 주시는 어른들이 계시다면 우리 공동체는 무한한 가능성을 향하여 미래로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 간의 갈등을 해소하려면 먼저 신학상의 차이를 존중하는 아량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차이를 차별의 계기로 삼지 않고 대화와 이해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자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공동체의 어느 누구도 소외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민주적이며 또한 다름을 포용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새길 교회 창립 취지문의 일부 구절을 인용하면서 저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뜻을 사회와 역사의 구체적 현실 한가운데서 항상 되새기고 증거 해야 된다고 믿으며, 복음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와 역사도 함께 변혁시키는 힘임을 굳게 믿습니다.
(중략)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게으름과 방관자적 자세를 깊이 뉘우치면서, 우리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려고 결단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감사하신 하나님,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미약한 사람이 이렇게 감히 말씀증거에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과 같이 나눈 이 말씀 중에서
당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내용이 있으면 모두 잊게 해주시고
오직 당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말씀만 간직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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