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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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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00496847 |
2010년 2월 2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3장 12절
설교제목 : 향상일로(向上一路)의 마지막 도약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책 이야기>
『선의 황금시대』(오경웅 지음, 경서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중국인이면서 독실한 가톨릭 교인인 저자가 중국 선불교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었는데, 그 선사(禪師)들의 이야기 중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선사들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얻은 경지가 아무리 높다해도 그들은 항상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아래로 내려오는 길 뿐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그래서 한 스님이 계성(繼成) 선사에게 물었다. “향상일로란 어떤 겁니까?” 계성이 대답했다. “아래로 내려오면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 걸세.”》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인간의 삶 이야기>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초점은 ‘향상일로’(向上一路)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건 간에 향상(向上)하려는 일로(一路)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높이 올라가려는 지향으로서의 인생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도 그렇고, 사업을 해도 그렇고, 장사를 해도 그렇고, 직장생활을 해도 그렇고, 농사를 해도 그렇고, 가정생활을 해도 그렇고 …… 인간에게는 항상 지향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지향하는 바가 없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고 방만해지고 무기력해지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지식인들이 자주 하는 말, 즉 “낮아져야 한다” “비워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에 대해서 절반은 긍정하고 절반은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지향이 없는 낮아짐/비움’은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향이 없는 낮아짐’은 애시당초 있을 수 없는 관념적 유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건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세계입니다. 공허한 말장난일 뿐입니다. 그럴듯하게, 귀에 달콤하게 들리기는 한데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공허한 윤리의 세계, 그게 ‘지향하는 바 없는 낮아짐의 세계’인 것입니다.
<농사꾼 이야기>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농사꾼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랐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농사를 짓게 됐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청년은 ‘농사일’에 대해서 아무런 사명감도 없었습니다. 그냥 어떻게라도 먹고살아야하기 때문에 그냥 농사를 지을 뿐입니다. 아무런 지향하는 바가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지겹고 무기력할 뿐입니다. 정말 불행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 역시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지향점’이 있었습니다. 농사를 많이 지어서 반드시 큰 돈을 벌리라는 분명한 지향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고, 농기구를 사서 더 효과적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청년은 점점 더 많은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고, 점점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잘했고, 그 동네의 유지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지향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된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든 면에서 풍족해진 이 청년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그 청년이 스스로 만족해서 그냥 인생을 잘 살아갔다면, 그는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인간이 아닙니다. 그가 일궈낸 경지에서 한 걸음 더 도약해야만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 터인데, 그 마지막 도약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마지막 도약은 그냥 열심히 일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행복을 위한 마지막 도약’, 그건 오직 한 길 ‘낮아짐’으로서만 가능해지는 길이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있어서 마지막 도약을 위한 낮아짐의 길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농사의 근본적 의미를 찾는 일입니다. 단순히 농사를 많이 지어서, 돈을 많이 버는 수단으로서의 농업이 아니라, 농사의 근본적인 의미를 찾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가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농업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그는 행복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가 장사꾼 농사꾼에서 유기농 농사꾼으로 낮아진다면, 그는 참다운 행복의 문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농사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학생에게도, 사업하는 사업가에게도, 직장생활하는 직장인에게도, 가정생활하는 주부에게도, 정치하는 정치가에게도, 운동하는 스포츠맨에게도, 노동하는 목수에게도 ....... 모두 해당되는 명백한 진리인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삶이란 ‘명백한 지향이 있는 노력의 삶’ 그리고 ‘마지막으로 낮아짐으로서 그 도약을 완성하는 삶’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우리가 하느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높은 품격의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의 흔들릴 수 없는 목표이자 지향입니다. 그 향상일로(向上一路)의 마음으로 하루하루 정진(精進)하고 매진(邁進)하는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향상일로의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을 향한 향상일로의 마음으로 하루하루 수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초점은 그 다음입니다. 그 향상일로의 마음을 완성시킬 마지막 도약, 그래서 하느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도약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 ‘낮아짐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게 오늘 예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성요한, 그리고 강인태 목사>
오경웅 선생은 그의 책, 『선의 황금시대』에서 기독교 신비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향상일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오경웅 선생은 말했습니다. “향상일로의 선사 이야기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쓴 글을 생각나게 한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수록 나는 높이 높이 올라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구하려면, 아무 일에서도 즐거움을 바라지 말라.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성취하려면, 아무 것도 성취하길 바라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거든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물론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말씀하시는 바 놀라운 메시지를 새겨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린 강인태 목사님에게도 성 요한과 일맥상통하는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목회사역의 표어처럼 사용하시는 구절이 있는데, 그 내용이 참 감동적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죽음으로써 살고, 버림으로써 얻고, 낮아짐으로써 높아지고, 비움으로써 채워지고, 부정으로써 긍정에 이르는, 자기 비움의 길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향상일로의 마지막 도약’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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