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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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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40절-45절: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낫게 해 주시니 예수님이 일하기가 더 어려워졌느냐, 좋아졌느냐? 더 어려워졌다. 이게 문제다.
예수님께서 낫게 한 문둥병자에게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라’ 그랬다. 그래서 참고로 레위기 14:2-32에 보면.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찌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찌며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일을 거할 것이요 칠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제 팔일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수양 둘과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또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삼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정결케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어린 수양 하나를 취하여 기름 한 록과 아울러 속건제로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그 어린 수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와 번제 희생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속건 제물은 속죄 제물과 일례로 제사장에게 돌릴찌니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제사장은 그 속건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에 바를 것이요 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좌편 손바닥에 따르고 우편 손가락으로 좌편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는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 희생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오히려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여호와 앞에서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을 인하여 정결함을 받으려는 자를 위하여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번제와 소제를 단에 드려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정결하리라 그가 가난하여 이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는 흔들어 자기를 속할 속건제를 위하여 어린 수양 하나와 소제를 위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취하고 그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취하되 하나는 속죄 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삼아 제 팔일에 그 결례를 위하여 그것들을 회막문 여호와 앞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속건제 어린 양과 기름 한 록을 취하여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속건제의 어린 양을 잡아서 제사장은 그 속건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에 바를 것이요 제사장은 그 기름을 자기 좌편 손바닥에 따르고 우편 손가락으로 좌편 손의 기름을 조금 찍어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그 손의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 희생의 피를 바른 곳에 바를 것이며 또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발라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며 그는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하나나 집비둘기 새끼 하나를 드리되 곧 그 힘이 미치는 것의 하나는 속죄제로 하나는 소제와 함께 번제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할찌니 문둥병 환자로서 그 결례에 힘이 부족한 자의 규례가 이러하니라.
‘정한 산 새 두 마리를 잡아다 그 한 마리는 질그릇 안에서 잡고’: 산 새를 잡았으니 피가 나오고 죽은 거다.
‘또 한 마리는 산 채로 취해서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와 함께 흐르는 물 위로 가져가서 흐르는 물 위에서 질그릇 속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문둥병자에게 일곱 번을 뿌려 정하다 하고’: 한 번 뿌려서는 안 되고 일곱 번을 뿌려야 된다.
‘그 살아있는 산 새는 들에 놓아 보내라’: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릇 속에서 잡은 새는 죽고, 죽은 그 새의 피를 찍어서 문둥병자에게 일곱 번을 뿌렸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찌며’: ‘산 새를 백향목 우슬초 홍색실과 함께’ 했으니까 네 가지인데, 이 산 새를 날려 보낼 때는 실로 백향목을 묶어서 날려 보내는 거냐?
아까 말씀드렸는데 산 새를 자유롭게 날려 보내는 것은 신앙을 비유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고,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새 피를 일곱 번 옷에 뿌린다는 건 그 의미가 뭐냐?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서 죽음이 넘어가고 애굽에서 자유롭게 나왔다. 그러니까 피는 정하게 하는 것, 그리고 흐르는 물 위에서 새를 잡으라는 건 씻어 흘려버려라. 정지해 있는 물이 아니고 흐르는 물에서 잡으라고 했으니까 이건 흘려서 안 보이게 보내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악적인 것을 다 보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경결케 한 새가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은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튼튼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백향목은 성전을 짓는 재료로 튼튼한 나무다.
‘성전’ 하게 되면 문둥병자가 하나님과 연관을 짓는, 다시 말하면 ‘너의 몸은 성전이니,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니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치리 속에서 네가 살아라’ 하는 사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놓고 코에 입김 불어넣은 것은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다’ 하는 걸 가르쳐 주는 것처럼.
홍색실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의미를 지닌 것이니, ‘너는 그 사상을 가지고 그 사상에서 끊어지지 말고 살아라’ 하는 뜻이고, 우슬초는 고난을 의미하니까 이걸 다 합쳐서 보면 ‘너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몸이니 네가 어떤 고난을 받더라도 의롭게 거룩하게 살아라’ 하는 그런 정신이 그 안에 들어있다.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는 자는 입었던 그 옷을 빨고’: 그러니까 피가 묻은 입었던 옷을 빠는 건 너는 구속이 되었으니 이제 자꾸 말씀으로 너를 빨라는 것이다.
‘모든 털을 밀고’: 털 속에 나쁜 게 낄 수 있다. 속속들이 정결케 하라는 것이다. 병원에서도 수술할 병이 들면 털을 다 민다. 세균을 없애려는 의미도 있다.
‘물로 몸을 씻어라’: 옷도 빨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일을 거할 것이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하나님 앞에 철두철미성이냐?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디 그러냐? 이게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에게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구약성경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라고 가르친 것의 그 정신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그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예수 믿으면서 회개도 없고 제 좋은 대로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구약을 왜 주었느냐? 구약의 모든 것이 우리의 이룰구원에 있어서 버릴 게 하나도 없다. 우리는 창:부터 계:까지 들어가면 ‘주님이 이걸 다 지키셨구나’ 하는 이걸 볼 수가 있고, 그 모든 것을 지키신 그 분의 정신이 말씀 속에서 새록새록 나오고 있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그 분의 우리를 위한 그 살으심이 엄청난 것이다.
주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이 세 가지 시험 속에는 지상의 죄가 다 들어있다. 그 세 가지 시험을 이겨야 그 다음을 이길 수 있다. 그러니까 주님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세 가지 시험을 이긴 이력과 경력이 내공으로 가득 들어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고 이기신 그것을 그렇게 생각을 않고 그냥 사람을 쳐다보듯이 이런 식이다. 우리는 주님 속의 하나님의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칠일 만에 모든 털을 밀되’: 그러니까 칠일 만에 또 털을 민다. 아예 처음부터 껍데기를 벗기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니까 얼마나 속속들이 깨끗케 하는지! 그러니까 자기기가 회개를 하려면 호리라도 남김없이 속속들이 하라는 것이다.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이걸 보면 머릿속으로 눈으로 보는 모든 죄성 그런 것이 행여나 끼어있을까 봐 철두철미하게 정결케 하는 것이다.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이건 귀찮을 정도다. ‘너무한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말씀에는 이렇게 철두철미성이 들어있구나. 죄성은 용납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팔일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수양 둘과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또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삼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정결케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은 증거를 의미한다.
‘어린 수양 하나를 취하여 기름 한 록과 속건제를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흔든다는 건 ‘드립니다’ 하는 자랑스런 행위다.
‘그 어린 수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와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잡는 곳에서’란 아무 데서가 아니라 ‘정한 자리, 법칙대로’ 그 말이다. 예를 들면 영화 왕 중 왕을 보고 ‘예수 믿어야겠다’ 그런 게 아니고, 모세영화의 바닷물이 갈리지는 걸 보고 ‘야, 나도 하나님 믿어야 되겠다’ 그게 아니고 말씀을 이치적으로 깨닫고 믿는 게 바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영화나 연극 같은 걸 보고 믿음이 들어가느냐? 믿음 안 들어간다. 진리이치의 깨달음에서 믿음이 들어가는 거다.
왕 중 왕 영화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 흘리며 죽는 것을 보고 ‘나의 죄를 위해 저렇게 죽었구나. 그러니 예수 잘 믿어야지’하는 그 믿음과, 그런 영화는 안 봐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말씀을 이치적으로 깨닫고 ‘아, 예수님의 속성이 그렇구나. 나도 그 속성을 가져야 되겠구나’ 하고 알고 가지는 믿음과 어느 쪽이 눈물을 더 많이 흘릴까? 영화를 볼 때 눈물을 더 많이 흘린다. 사람은 눈으로 보면 감성이 나온다. 그런데 믿음은 어느 쪽이 튼튼하고 강할까? 눈물을 많이 흘린 쪽이냐, 말씀을 이치적으로 깨달은 쪽이냐? 말씀을 깨닫는 쪽이 믿음이 더 강하다.
그러면 그런 영화에서 주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시는 걸 본 후에 ‘주님께서는 진리를 위한다면 구원이란다면 당신의 몸이 갈갈이 찢어져도 자원적으로 그 일을 당하시는구나’ 그렇게 깨닫는 게 있고, 또 하나는 그런 영화를 보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저렇게 고생을 하고 저렇게 돌아가셨으니 내가 그 은혜를 보답하고 갚아드려야겠다‘ 하고 생각하는 게 있다고 할 때 어느 쪽이 믿음처럼 느껴지느냐?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도 그 은혜가 갚아지느냐? 안 갚아진다. 주님께서 그렇게 죽으신 것은 그 은혜를 갚으라는 뜻이 아니고 당신께서 하나님의 것을 받게 하는 기초를 그렇게 닦아놨으니 너 살아생전에 하루 매일 24시간을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걸 흠뻑 흠뻑 받기나 잘 받으라는 것이다. 이건 생각 차이가 땅과 하늘 차이다.
‘지정된 곳’ 하게 되면 지정된 진리를 말한다. 진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죄를 사할 수 있는 요소적인 영적 정신적 질적 의미가 들어있다. ‘지정된 곳’ 이라고 할 때 세상은 ‘어디 장소’ 이런 뜻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질을 말하는 거다.
소경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는데,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이 말씀을 들은 것과, ‘실로암’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과는 그 의미가 같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가 눈을 뜨려면 어디로 가야 영의 눈이 뜨여지는 것이냐? 실로암 못에 가야 한다. 그 못이라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이웃 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사고방식이 아니다.
‘속건 제물은 속죄 제물과 일례로 제사장에게 돌릴찌니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그 다음에 ‘제사장은 그 속건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에 바를 것이요’: 이게 메니큐냐? 왜 이렇게 피를 취해서 귓부리에 바르는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어쩌라는 것이냐? 죄를 사하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거룩해지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좌편 손바닥에 따르고 우편 손가락으로 좌편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는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 희생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구속 위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성령의 감화성이라든지 그런 걸 상징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여호와 앞에서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이게 다 낫게 해 준 문둥병자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 문둥병이 나은 사람에게 왜 이렇게 말씀을 했을까? 문둥병이 나았으면 ‘그냥 자유롭게 살아라’ 하면 될 텐데 다 낫게 하고서 왜 제사장에게 가서 모세에게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했을까?
이걸 알기 쉽게 생각해 보면 화장실 갈 때의 마음과 화장실 갖다 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게 사람의 심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문둥병이 나은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지키려면 문둥병이 나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복잡하고 귀찮고 힘든 일이겠느냐? 문둥병을 고쳐주기 전에 ‘네가 문둥병이 나으려면 모세가 명한대로 다 하라. 그러면 네가 낫는다’ 한다면 낫기 위해서 그것을 다 하겠지만 그런데 다 나은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니 하는 게 쉽겠느냐, 도망가기 쉽겠느냐? 도망가기 쉽다.
그러니까 왜 문둥병을 낫게 한 후에 그렇게 하라고 했을까? 만일 문둥병자가 낫기 전에 ‘네가 모세의 명한대로 다 해야만 너의 문둥병이 낫는다’ 했다면 귀찮더라도 율법대로 다 할 것이다.
나아만에게는 문둥병이 낫고 난 후에 물에 들어가라고 했느냐. 일곱 번이나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나았느냐? 일곱 번을 들어갔다가 나오니 나았다. 지금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나아만에게 한 것처럼 했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기가 쉬웠을 텐데 다 나은 후에 하라고 하니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안 난다.
몸에 병이 들었을 때는 ‘나를 고쳐주시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몸 바쳐 충성하겠나이다’ 하고서는 다 나은 후에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 그게 그만 식어지느냐?
어느 총각이 교회 다니는 처녀를 보고 ‘나도 너처럼 예수 믿는다’ 했다. 목사 앞에서도 장가가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했다. 그런데 결혼을 딱 하고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건 목사 속이고, 하나님 속이고, 신부를 속이는 거다. 속이는 그 사람은 그저 자기 욕심을 채웠으니까 다 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게 아니다. 네가 경험할 거다. 좋은 경험이 되겠느냐? 깨달으면 좋은 경험이라도 못 깨달으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문둥병자에게 율법이 정하는 대로 다 하라고 시키신 것은 우리가 온전해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새를 어떻게 하고, 양을 어떻게 하고 한 그 복잡한 과정을 문둥병자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한 거냐? 예수님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일점일획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이루셨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이 나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다 이뤄놓고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또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이 문둥병자는 율법이 말하는 바대로 행하라는 그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알까, 모를까? 모른다.
본문 45절에 보니 문둥병이 나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지 않고 나가서 자주 만나는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병이 나은 사실을 알렸다. 이게 뭐냐? 오늘날 교회적으로 말하면 간증 아닌 간증으로 돌아다닌 것이다. 성경에 있는 것은 그나마 괜찮다. 오늘날 교회에 간증한다고 돌아다니는 거는 마귀가 비슷하게 그런 짓을 하는 거다.
그러면 문둥병이 나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 자기 병을 누가 고쳐줬다고 하겠느냐? 예수님이 고쳐주셨다고 광고하고 돌아다닌다. 그렇게 하는 바람에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시기가 더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병 나은 사람들이 광고하고 돌아다니면서 병 든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로 데리고 가겠느냐, 데리고 가지 않겠느냐? 그러면 그렇게 해서 병든 사람이 육신의 병이 나았다면 병이 나은 그 사람이 영적 면에서 깨달음이 바로 들어간 것이냐?
예수 믿고 병 나은 걸 돌아다니며 간증을 할 때 간증하는 사람이 돈을 주면서 간증을 하느냐, 간증을 하면 저 쪽에서 돈을 주느냐? 그러니까 뭐 하러 돌아다니는 거냐? 돈 벌러 다니는 거다.
보통 보면 예수 믿다가 병 때문에 특별 기도를 받아서 병이 나았다거나, 또는 누구의 안수기도를 받아서 병이 나았거나 하면 간증하러 돌아다니느라 참 바쁘다. 어쨌든 예수 믿고 병이 나으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왜? 외국까지 간증하러 가니까! 그러면 자기 돈 들여서 가겠느냐?
어느 교회에서 ‘와서 간증 좀 해 주십시오’ 해서 그 교회에 가서 간증을 하면 그 간증소리를 들으려고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 많이 모인다. 이 때 예수 안 믿는 병든 사람도 교회에 와서 병 낫게 해 달라고 부르짖게 된다. 그러면 이게 예수전도냐? 아니다. 이건 예수전도가 아니다.
성경 본문 속의 문둥병자를 좋게 본다면 아마 자기가 경험한 것을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겠다는 건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 나은 병자에게 가지신 마음이 그런 것이냐? 그런 뜻은 아니다. 율법의 요구하는 대로 하는 그 과정에서 각 제물마다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활 전반의 속속들이 언행심사 속에서 깨달으며 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엄히 꾸짖고 경계하신 의도성이 문둥병자를 다 낫게 한 후에 속속들이 깨닫게 해 주실 의향이었는데 이 문둥병자는 영적인 영의 생각과 종교적인 육의 생각을 혼동을 했다. 예수님은 영적인 면으로 영인성장 면으로 영의 생각으로 더 알게 해 주려고 했는데 이 문둥병자는 육적 종교적으로 나갔다. 혼동이 됐다.
오늘날 목사님들의 세계는 어떠냐? 교회들은 어떠냐? 영적 육적이 혼돈이 됐다. 마귀 짓이 돼버렸다. 오늘날 예수 믿고 병 고침 받는 것을 영적인 면의 병은 모른 채 단순히 눈으로 보여지는 육의 병만 알고 있다. 영적 면의 병은 모른 채 육신의 병만 고치겠다고 성령님의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이룰구원의 일을 방해하고 대립성을 일으키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뜻을 깨달아야 할 텐데 단순히 육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영이 잘 되라고 기록한 것이지 육을 위해서 기록이 된 것이냐?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된 것은 영인성장 면을 두고 기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볼 때 영인성장 면이 없어지니까, 영적인 면이 없어지니까 육적인 면으로 해석이 돼버린다. 성경을 육적인 면으로 생각을 한다면 뭘 하나 깨달을 게 있겠느냐?
성경 모두는 비유이다. 그래서 본문의 이 말씀도 비유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영의 일을 깨달아야 한다. 영의 일을 못 깨닫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는 성경을 볼 때 비유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눈으로 보여지는 것으로만 안다. 그리고 거짓된 인도자들은 성경을 육적으로만 해석을 한다. 이러면 영적인 면은 없어진다. 사람이 만들어지는 면은 없다. 영적 실상 면에서 성장되고 고쳐지는 건 없다. 이렇게 수십 년 백 날 예수 믿어봐야 그 신앙상태가 첫 날 믿는 것과 똑같다.
직분 받은 게 믿음이냐? 아니다. 속사람이 성장하고 고쳐지고 성격 성질적으로 고쳐져야 그게 믿음이다. 사람이 온전해야 가정도 온전해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이 15년 이상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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