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2:1-12 |
---|---|
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장 1절-12절: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다른 복음이란 하나님의 진리본질이 아닌, 우리의 창조목적에서 어긋난, 우리의 구원이 아닌 복음이 다른 복음이다. 구원의 복음은 천국 하나님에 관한 것, 우리 온전이 되는 것,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는 것이다. 이게 아닌 다른 가르침은 전부 다른 복음이다. 천국복음이 아니면 세상 것, 땅의 것이다. 예수이름으로 해도 목적이 세상 것, 땅의 것이면 다른 복음이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
성경에 부하기를 힘쓰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다 돈을 원한다. 그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도 저주 받을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
육신의 병만 낫겠다는 교회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사람이 참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지는 참 복음이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고 병 낫고 그 목적으로 믿으면 옳은 진리이치의 깨달음의 말씀은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은 정 반대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했다. ‘믿는 자를 보겠느냐’가 아니라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했다. 말세에는 믿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은 믿기는 믿는데 안 믿는 사람들처럼 전부는 세상 길 넓은 길 사망 길의 그 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것은 노아 홍수 때처럼 물 아래의 사람, 심판 받을 사람으로, 불타질 사람으로 산다는 말이다.
2장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1절-5절): 수일 후에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 동리의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이미 소문을 듣고 찾아온 무리들이 들어가는 문이 막힐 정도로 문 앞에 꽉 찼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집 안에서 천국의 도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들것으로 들고 문으로 해서 예수님 앞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어 들것을 줄로 네 귀퉁이를 묶어서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
그러면 왜 네 사람일까? 두 사람은 안 되나? 네 사람이 하면 쉬운데 두 사람이 들것을 달아 내리려고 하면 힘들다. 그래서 네 사람이다.
그 네 사람의 수단 방법 그 용기 그 믿음이 대단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머리가 없다. 그런 머리를 쓸 줄을 모른다. 그런데 이 네 사람은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셨다. 그러면 어떤 믿음을 보시고냐?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냐, 아니면 달아 내린 그 사람들을 믿음을 보시고냐? 달아 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다.
네 사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하는 일에, 사람이 온전케 되는 일에 한 마음으로 단일성으로 합심이다. 그게 믿음이다. 사람이 온전케 되는 그 마음에 합심이 돼서 모든 활동을 같이 하는 단일성의 마음,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합심되는 이 믿음이 정말 귀하구나. 주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네 사람의 마음이 성질적으로 하나같이 합심이다. 그 믿음이 정말 귀하다.
가만 보면 부부라도 그런 믿음이 드문데, 부부가 같이 예수를 믿어도 성질적으로 성격적으로 성분적으로 단일성으로 합심되는 믿음이 드물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도 항상 대립이고 마찰이고 충돌이다.
이룰구원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이 믿음이다. 구원이 이뤄질 수 있는 그 믿음이 믿음이다. 이룰구원으로 이뤄지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알아주시는 믿음,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알아주시는 믿음, 비록 연약하지만 알아주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만약에 이 네 사람이 ‘집안에 사람이 너무 꽉 차서 못 들어가겠다. 그러니 중풍병자를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갖다가 내일 다시 오자’ 그랬다면 그게 믿음이겠느냐, 믿음이 아니겠느냐?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아닌 이유는 구원에는 내일은 없기 때문이다. 오늘 구원은 오늘이다. 즉 역사는 항상 주님이 계시는 바로 그곳에서 되는 것이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는 신앙의 세계는 그렇다.
갖다가 내일 오자? 그거는 설령 그들이 내일 다시 온다고 해도 주님은 그곳에 안 계신다. ‘내일도 그곳에 계실 거다’ 하는 건 네 생각일 뿐이다. 왜? 주님은 항상 움직이신다. 그걸 알아야 한다.
오늘 살릴 일을, 오늘 온전케 될 일을 내일 갖다가 다시 오자? 그건 믿음이 아니다. ‘예수 믿음시다’ 하면 ‘젊어서 돈 좀 벌어놓고 늙어서 예수 믿지’ 하는 그건 믿음이 아니라서 아마 늙어서도 안 믿어질 상 싶다. 제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믿음이다. 예수 믿는 믿음은 자기 소관에 계획에 들지를 않는다.
지금 여기 있는 분들 다 예수 믿지만 자기가 ‘나는 몇 살 때부터 예수 믿겠다’ 해서 그 생각대로 믿었느냐? 그거는 아니지 않느냐? ‘내일, 모레’ 하는 건 벌써 불신이 들어가는 거다. 마귀는 구원의 일에 대해서 ‘내일도 있다. 모레도 있다. 있다가 하자’ 자꾸 그런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는 중풍병자도 낫지 못한다. 그 사고방식은 사람이 낫지 못하는 사고방식이다. 자꾸 시간을 미루는 것은 사람이 안 되는 사고방식이다. 그렇게 하다가는 사단의 꾀에 넘어간다. 온전케 되는 일을 미룬다는 것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이건 하나님의 역사가 안 일어나는 믿음을 가진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믿음이 있고, 못 보는 믿음이 많다. 돈 많이 벌고 하는 건 예수 안 믿는 사람도 하는 소리고, 그걸 가지고 ‘믿음 있네, 없네’ 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 온전케 되는 걸 주님은 말씀하신다.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 몸 밖의 사건을 들고 오시기도 하지만 몸 안에서 말씀 깨달음으로 역사하기도 하신다. 믿음이라고 하는 건 또 성령님의 역사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믿음은 우리의 속에서 역사되는 것이지 저 멀리 밖에서 되는 게 아니다. 믿음이라고 할 때 자기가 효력을 볼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면 믿음의 효력을 볼 수 있는 믿음은 자기의 몸 안에 있는 것이냐, 내 몸 밖에 있는 것이냐? 몸 안에,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6절-12절): ‘네가 일어나서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중풍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보다 젊은 사람일수도 있고, 늙은 사람일수도 있다. 그런데 중풍병자는 주로 늙은 사람이 걸리는 거냐, 젊은 사람이 걸리는 거냐? 나이 많은 사람이 많이 걸린다. 어쨌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죄 사함이 문제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은 하나 같이 믿음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이 온전케 되는, 낫고자 하는 그 면으로 생각을 하는데 서기관들의 마음속에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신 주님을 향해 하나 같이 ‘참말로 참람하다’ 하고 있다. 말하자면 ‘너도 하나의 죄인 인간이면서 하나님처럼 죄를 사해준다고?’ 하면서 참말로 건방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분이 왈칵 올라왔다.
사실 이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그렇지 그들의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 예수도 하나의 죄인 인간이면서 하나님처럼 죄를 사해준다고 하니 그 말이다. 그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면 그렇게 보이니 그런 눈으로 보고 말을 하는 그 말 자체는 맞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로 오셨다고 하는 이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중풍병이 죄로 인해서 왔다고 하는 것을 훤히 알고 계신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죄로 인해 중풍병이 든 것을 모르고 있다.
죄의 성립이 에덴동산에서 처음 인간에게 따먹지 말라고 한, 따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즉, 말씀 불순종에서 죄가 왔다.
생명과를 따먹으라는 그 말씀에 순종이 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진리말씀 생명의 말씀을 먹는 그거는 안 먹고 자기 주관대로 눈으로 보기 좋은 대로 인간기준으로 판단을 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죄지만 그 이전에 인간 자기 기준을 가지는 그게 이미 불순종이요 죄이다.
우리도 성경을 보면서 눈으로 보는 표면적인 그것을 기준을 삼은 채 하나님 말씀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선악과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생명과를 안 먹는, 못 먹는 말씀 불순종이라. 그건 죄가 된다.
생명과 따먹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땅에 편만하라고 했으니 생명과를 먹으면 되는 건데 아담과 하와는 그 말씀에 불순종이 돼버렸다. 먹으라는 그 말씀을 어기고 안 먹는 불순종, 또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먹는 불순종.
오늘날 자기가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닮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과를 안 먹는 게 죄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 취미를 안 먹는 게 죄다. 그걸 먹으면 자기에게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살이 오르고 예수정신으로 살게 되는 건데 그걸 안 먹고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눈으로 보는 것을 기준을 삼아서 하니 그게 죄다. 죄는 창조의 목적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죄는 형벌 받을 짓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은 인간들이 보는 죄는 세상의 법도 어기고 양심도 어기고 행동과 활동으로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먹으면 다 어기게 된다. 이렇게 되어 그 정신이 다 어겨진 정신임에도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해만 안 끼치면 죄가 아니다’ 그렇게 보는 눈을 가지게 된다.
가령 이방종교 중에 중들은 주로 산에서 공을 드리며 산다. 그러니까 부부랑 같이 살아야 서로가 싸울 텐데 그것도 아니고,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들대로 사니 싸울 리도 없다. 그리고 불공드리는 사람들이 쌀 갖다 주고 돈 갖다 주고 하니 싸울 게 없다. 또한 산에서 좋은 공기 마시겠다, 배부르겠다, 경치 좋겠다 하니 싸울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도 죄냐? 그렇게 사는 것도 죄를 짓고 사는 거냐? 그렇다. 왜 그러냐? 생명과를 안 먹어서다. 예수를 안 먹는다. 예수정신 사상을 안 먹는다.
생명과를 안 먹으면 죄가 성립이 되는 거다. 영원히 사는 것을 안 먹으면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다. 생명과를 안 먹으면 자기 눈의 기준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이걸 선악과라고 한다.
옷을 살 때 그냥 모양만 보고 사는 게 아니라 옷의 질감을 보고 산다. 무나 배추나 과일을 살 때도 겉모양 큰 것만 보고 빛깔만 보고 사는 게 아니라 그 속의 맛을 보고 사는 거다. 큰 것이 보기가 좋고 색깔도 좋은데 사서 먹어보니 물맛이면 그거 참.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세상의 법은 타락된 양심이지만 자기 나라 나름대로의 양심을 써서 사회질서 유지법을 세우고 있다. 그렇게 법을 세워놓고도 무질서를 만들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니까 그렇다.
세상은 아무리 자기 양심대로 했어도 자기 나라의 사회질서 유지법에 결리면 죄인으로 인정이 되는 것이고, 또한 발각이 안 되면 그 나름대로 살다가 가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비춰지는 거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는 죄는 문자적으로 율법을 범하면 죄이다. 그리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표면으로 지켰으니 의인이라고 한다. 또한 중풍병자는 이 율법을 안 지켰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서 중풍병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중풍병의 원인이 여러 가지겠으나 술 많이 먹고 담배 많이 피우고 몸을 함부로 하고 성격 성질을 못 고치면 걸리는 걸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면 중풍병 걸리는 게 술 담배가 문제냐, 그걸 먹는 사람이 문제냐?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
그들은 세상적 육적 종교적인 생각으로 성문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그 생각을 바꾸라고 하는 그 은밀률, 은밀한 그 뜻을 모른 채 예수님께나 중풍병자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성경 속에는 은밀한 뜻이 있다. 은밀한 뜻이란 그 예를 보면 다윗이 도망을 가면서 열 후궁들을 보고 ‘너희들은 여기 있으라’ 했다. 후궁들이 다윗의 그 말을 듣고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다윗이 나간 후에 그 후궁들이 몸을 버렸다.
다윗이 궁으로 돌아와서 다윗 자기의 말대로 궁에 남아 있다가 몸을 버린 후궁들을 기쁘게 맞이하고 상을 준 게 아니라 생과부로 가둬서 평생을 지내게 했다. 그러면 언제는 궁에 남아있으라고 하고서는 갔다 와서는 가뒀으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그 앞뒤로 보면 다윗이 열 후궁들에게 그 궁에 있으라고 할 때 ‘아니올시다. 왕과 함께 고생할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래야 옳겠느냐? 있으라고 하니까 그대로 있다가 원수에 의해 몸을 버렸다. 그러니 따라가는 게 옳은 거냐, 몸을 버리건 말건 독방에 갇히건 말건 그대로 있는 게 옳은 거냐? 따라가야 한다. 죽더라도 고생을 하더라도 따라갔어야 했다. 그러니 갇혀서 일생을 마치는 게 마땅한 거다.
또 한 예는 엘리야가 엘리사보고 ‘길갈에 머물러라. 벧엘에 머물러라. 여리고에 머물러라’ 했는데 엘리사는 계속 따라왔다. 그러면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한 그게 엘리야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따라오지 말라고 한 것이냐? 그리고 엘리사는 그 엘리야의 말을 어기고 건방지계 엘리야를 계속 따라온 것이냐? ‘머물어라’ 하는 그 말속에는 ‘머물지 말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있다.
만일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말을 그대로 듣고 머물렀다면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못 받는다. 이런 건 눈에 안 보인다. 글씨로는 안 나와 있다. 은밀률이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엘리 엘리 마라 사박다니’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나를 왜 버리셨나이까?’ 하는 외침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이 성취됨에 대한 기쁨의 탄성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가르침에서 ‘아, 그런 게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해야 한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것도 그 속에 은밀한 뜻이 들어있다. 단순히 자기가 너무 고통이 심하니까 하나님께 원망조로 말하는 게 아니다. 문자적으로는 써 있지 않아도 읽는 사람 쪽에서는 그 말 속에 들어있는 은밀한 뜻을 캐내야 한다.
사건은 그냥 사건인데 그 사건만 보는 사람은 그냥 사건만 처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다. 그게 은밀한 뜻이다. 그걸 듣는다면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보통 보면 그러지 않고 나타난 사건만 잡고 왈가왈부한다.
생명과를 먹으라는 그 말씀 속에는 은밀률 즉, 은밀계시가 들어있으니 죄와 사망과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이 들어있다. 그래서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땅에 편만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능력이 그 안에 들어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생명과를 먹으라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서 얼쩡얼쩡 왔다 갔다 하지 말라. 그건 믿는 게 아니다. 그건 은혜를 못 받는다.
생명과를 먹으라는 그 말씀 속에는 생명의 능력이 들어있는 건데 먹으면 죽는다고 하는 선악과를 먹은 지식은 생명과에서 모든 능력이 나온다는 그걸 모르는 거다. 모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죄인 줄을 모르는 거다. 그 자체가 죄에 가두어진 것인 줄을 모른다. 죄는 창살 없는 감옥이다. 그런데 창살 없는 그 감옥 속에 가둬진 그걸 모른다. 즉 죄를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주고 걸어가게 하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느 나라 법으로 죄 사함을 주고 자유롭게 걸어가게 하신 것이냐?
1. 로마법으로 죄 사함을 주고 걸어가게 했다?
2.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율법을 가지고 죄 사함을 주고 걸어가게 했다?
3.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법으로 즉,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긴 그 능력으로 죄 사함을 주고 걸어가게 했다?
어느 게 맞느냐? 하늘나라 하나님 법으로다. 천국 법으로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창살 없는 감옥 속에 갇힌 거기서 끄집어내는 이게 하나님의 역사요 성령님의 역사다.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을 가지고 중풍병자나 귀신들린 자나 각종 병자를 고쳐주었느냐? 그것으로는 고침이 안 된다. 창살 없는 감옥 속에서 선악과 먹고 영이 죽고 신앙심이 죽고 하는 그 죽음을 무엇이 건져내고 자유롭게 하는 거냐? ‘예수 믿어 부자 되고’ 하는 그거는 사람을 더 가두는 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 속에 더 가두는 말이다.
사람을 보면 돈 속에 빠진 사람도 있고, 술독에 빠진 사람도 있고, 화투 속에 빠진 사람도 있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 속에 빠져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마 95% 이상 될 듯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걸 알라.
세상이라고 하는 타락된 사랑 속에 빠지면 사람이 그리로 끌려가게 된다. 예수님의 아가페 진리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현명해진다.
우리교회에서는 둘이서 사랑하면 더 현명하게 돼야 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갈 데는 다 가고, 돈 쓰고 싶은 데는 다 쓰고, 교회 나오는 것도 모르고. 그게 뭐냐? 하나님의 재앙을 못 만나서 그렇구나.
그러니까 강조해서 말하자면 진리로 부지런히 크고 진리로 건장하고 힘이 올라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어도 통치 지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빨리 빨리 영능의 실력자가 돼서 그런 가정을 가져서 구원의 가정을 만들어 나가고 힘 있게 신앙생활을 하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께서 자유케 하신다. 중풍병자를 자유케 한 것처럼. 자유하고 영능의 실력자가 되게 하고, 이게 천국복음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이 15년 이상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