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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한일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99 추천 수 0 2015.06.05 23: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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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일3:16-2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1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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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3:16-24, 부활절 넷째 주일,

2015년 4월26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일반적으로 불교는 자비의 종교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종교의 특성을 한 개 단어로 뭉뚱그릴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0:25-37절에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유대교 신학자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묻자 예수님은 ‘당신이 평생 연구한 율법은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있소?’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신학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하게 보살펴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신학적인 이론보다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44절에서는 ‘원수사랑’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사랑의 절정입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사도들의 편지에도 흔하게 나옵니다. 그중에 요한일서가 대표적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요일 4:7-21절은 사랑의 신학적 특징을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두 군데만 인용하겠습니다.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좀더 격하게 반응하는 분들은 이 구절들을 공책에 쓰기도 하고, 외우기도 합니다. 이런 말씀을 접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를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와 다르게 반응하는 기독교인들도 없지 않습니다. 뭔가 그럴듯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실제 삶에서는 실감이 가지 않는 겁니다. 더 나가서 뭔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기까지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설교 본문인 요일 3:16절을 읽어봅시다. 이 말씀이 실제로 어떻게 들리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에는 흔쾌하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간혹 그런 감동적인 동화를 듣기는 합니다. 사형수 친구가 사형 집행되기 전에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대신 감옥에 들어갔다가 돌아오기로 약속된 날짜에 친구가 돌아오지 않자 기꺼이 대신 사형장에 끌려 나간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한 겁니다. 목을 치려는 그 순간에 친구가 돌아와서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왕이 이들의 우정을 높이 평가해서 사형수마저 살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면서 이웃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매스컴에 오르내립니다. 본문을 쓴 요한도 이런 경우를 머리에 그리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라고 말한 것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부담을 느낄만한 진술입니다. 이런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이웃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카페를 운영하는 기독교인이 이 말씀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손님들을 이웃 카페로 다 보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한은 이어지는 17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강도를 약간 낮추어서 설명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목숨에서 돈으로 단계가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가난한 교우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시다. 돈의 액수에 따라서, 그리고 그런 부탁을 받은 이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지겠지만 입장이 곤혹스럽다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돈 관계는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돈거래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돈도 잃고 사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교우가 직접 돈 이야기는 하지 않더라도 그런 신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목사를 비롯한 모든 신자들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게 쉽지 않습니다. 가난한 신자들을 도와 줄 마음이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운운할 수 있느냐 하는 오늘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난감합니다.

 

저는 요한일서 기자가 우리의 영혼을 불편하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형제사랑을 단호하게 언급해야만 했던 어떤 상황이 요한일서 공동체에 있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잘못된 사상을 염두에 두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요일 2:26절에서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 했습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오늘 설교 본문 다음에 나오는 요일 4:1-6절에서 자세하게 언급됩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1절)이고, ‘적그리스도의 영’(3절)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한다고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만연했던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영지주의는 1세기 말과 2세기에 걸쳐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플라톤 철학의 아류입니다. 이 철학은 영만 최고의 가치로 보고 육과 물질은 악한 것으로 봅니다. 영육이원론에 기초한 사상입니다. 이런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영향을 끼친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요소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보통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 살았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곤란합니다. 육체는 본능적인 속성으로 움직입니다. 식욕, 성욕, 자기 성취욕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게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 천사나 귀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된 신이었던 예수님이 이런 육체로 살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일부 기독교인들은 영지주의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살았던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 산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로 살았다고 말입니다. 그걸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이런 영지주의의 변형된 형태는 현대 기독교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회만 거룩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성속이원론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개인이나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신약성서 기자들과 교부들은 영지주의자들과 격렬하게 투쟁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을 이단으로 단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성육신 교리가 이런 신학 투쟁의 결과입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요한도 그들 교회 안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들과 싸웠습니다. 그런 상황을 전제하고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요한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악하고 썩어버릴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순수한 영혼 구원의 신비를 깨닫고 허무한 세상에서의 삶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만 한다는 겁니다.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요한은 그들을 향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교우들을 향해서 ‘그게 아니다.’ 하고 설득하는 중입니다. 실제 육체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과 그 삶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목숨을 버리신 것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강조하는 형제 사랑은 영지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서 나온 발언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모른 척하고 살아도 좋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만 성서가 말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이해 없이 무조건 ‘사랑합시다.’ 하고 외치기만 하면 그것은 공허한 주장이 되고 맙니다. 더 나가서 설교 앞부분에서 짚었듯이 우리의 영혼을 오히려 불편하게 하는 또 하나의 율법이 되고 맙니다. 다행스럽게도 형제 사랑을 피력하는 요한의 이 편지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형제 사랑을 말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계명을 언급하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자연스러운 겁니다. 요한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중입니다. 형제 사랑도 그런 삶의 일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본문에서 계명은 두 가지로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를 줄이면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을 수직적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수평적인 겁니다. 우리가 흔하게 들었던 구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계명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라는 겁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이고, 사랑은 육적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으로 해결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실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성적이고 인격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형제 사랑을 온전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일은 하지 말고, 오히려 칭찬받을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구제와 봉사와 자비와 긍휼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려고 애를 씁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입장을 귀하게 여기지만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의 생각이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그분들의 이해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문제를 바울의 가르침에 기대서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일명 사랑 예찬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전 13장에서 사랑의 본질, 또는 사랑의 능력을 피력했습니다. 그중에 고전 13:3절만 읽겠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극치의 사랑 실천입니다. 요일 3:16, 17절이 말하듯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 주는 것이며, 가난한 형제를 위해서 돈을 기꺼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이런 극치의 사랑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상하지요? 자기를 희생하는 행위가 곧 사랑을 담보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사랑과 요한이 말하는 사랑이 다르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왜 이렇게 상대화하는 것일까요?

 

이웃 사랑은 윤리의 문제입니다. 윤리 앞에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실존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행위가 순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실천을 욕망의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실제로 많이 일어납니다. 장애시설을 모범적으로 운영해서 국가에서 훈장도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천사 같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은 인물이 실제로는 수용된 장애인을 학대하고, 기금을 착복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둘째, 사람은 사랑의 행위로 인한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부모들은 다 사랑으로 한다고 말을 하지만, 부모의 행동이 오히려 아이의 삶을 파괴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완벽한 이웃 사랑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만한 행위만으로 그 사람이 사랑을 실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사랑이 없으면 ... 자기 희생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사람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은 인류 역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인간의 모든 사랑 실천은 곧장 교만으로, 탐욕으로, 자기 과시로 떨어질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에 자기의 몸을 불사른다고 해도 생명을 얻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부활생명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런 삶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너무 일방적이고, 너무 극단적인 주장일까요?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한다면서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기록한 요한도 사랑만을 따로 말하지 않고 믿음을 함께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요한이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말할 때 사용한 접속사 ‘과’(헬라어 ‘카이’)를 좀더 넓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도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교회를 잘 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에 대한 답과 실천 능력까지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당신 말이 옳지만 실제로는 게 잘 안 된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속 시원한 대답을 제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평생 연구하고 그 성경의 중심을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했던 설교자로서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건성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믿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 사실을 경험한 사람은 이웃과 형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며,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형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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