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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156 추천 수 0 2015.06.05 23: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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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5: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14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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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15:1-8,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5년 5월3일

 

제가 살고 있는 영천은 포도농사로 제법 유명합니다. 이십여 호 되는 우리 마을 이장님도 포도 농사를 짓고, 저와 이웃으로 지내는 분도 포도 농사를 짓습니다. 포도나무 자체는 볼품이 별로 없습니다. 복숭아, 사과, 매실나무는 크게 자라기도 하지만 꽃도 멋집니다. 포도나무는 키도 작고 줄기도 비틀리고 꽃도 꽃답지가 않습니다. 제가 벌이라 하더라도 포도나무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나무 크기에 비해서 달리는 포도송이는 많습니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포도농사를 많이 지은 탓인지 포도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헬라와 로마 신화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신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시 80: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사 5:7a절은 이렇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신약의 복음서에도 포도나무 이야기는 자주 나옵니다. 마 20장에는 ‘포도원 품꾼들’이라는 비유가 나오고, 21장에도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포도나무에 대해서 좀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요 15: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 문장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문학형식을 따른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서 찾아보기 힘든 방식으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즉 ‘나는 ...이다.’라는 문장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길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는 참 포도나무다.’와 같은 문장입니다. 여기에 열거된 단어는 메타포이지 실제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메타포는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가리키기 위한 문학적 수사입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거짓’ 포도나무가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여기서 거짓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입니다. 요한복음은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이 거짓 포도나무이고,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먼저 이스라엘의 입장을 봅시다. 이스라엘은 민족적 정체성과 율법이라는 종교법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게 바로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즉 민족적 정체성과 율법을 그들은 자랑거리로 생각했습니다. 이 자랑거리에 약간의 손상이 가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적대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로마의 빌라도 법정에 고발해서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통성과 율법의 권위를 훼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이단아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는 포도나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약성서 기자들은 이스라엘의 이런 입장과 견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이고 당신들이 거짓 포도나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는 이스라엘과 비교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지를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대제사장이고,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참된 성전이며, 그들의 번제의식에서 드려지는 짐승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단번에 하나님께 바쳐진 참된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완전했던 종교전통이 예수님에게서 완전해졌다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히브리서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기본적으로 이런 입장을 견지합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참 포도나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게 신약성서 기자들을 기본 입장이고, 우리도 똑같이 믿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기독교 신앙의 전통에 근거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참 포도나무라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는 말은 우리가 그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5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 머릿속에 그림처럼 다가오는 설명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당연히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치기를 당한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 전체의 핵심 주제입니다. 7절에서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반복해서 강조되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호내주’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까요?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라는 원줄기에 단단히 붙어 있는 가지가 될 수 있을까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기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1) 교회에 등록해서 한 지체로 살아가는 것이 그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속에 매진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 이와는 약간 다른 입장도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교회에 속해있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기만 하면 그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들은 보이는 교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퀘이커 교도들로 대표되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입장이 이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김교신과 함석헌 선생 등이 이런 입장에 섰습니다.

3) 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기독교 복음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지만 복음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면서 이타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복음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 5장의 팔복에는 복 있는 사람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등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를 믿는 건 아니지만 복을 받았습니다.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는 이들을 가리켜 익명의 기독교인이라고 불렀고,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는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 개념으로 이런 이들의 활동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의 입장을 지지합니까? 각각의 입장에 다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 보이는 교회를 부정하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본질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형태가 없으면 본질마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지금의 교회만큼 바르게 이해하고 보존하는 집단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교회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지 어느 위대한 종교인의 사상과 책상머리의 연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칼 바르트가 ‘신학은 교회의 기능이다.’ 하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수와 오류가 많지만 그런 사람들의 모임에서만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신앙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의 절대화에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권력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런 입장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복음의 정신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빛이 교회 밖까지 비추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상호내주의 관계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하는 중입니다. 위의 대답은 교회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교회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 대답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대답은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는지 아닌지, 즉 상호내주의 관계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열매 여부에 따라서 확인됩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그는 포도나무 원줄기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잘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열매가 없으면 가지치기 당한 가지입니다. 열매를 보고 가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무와 열매’의 관계에 대해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한 대목인 마 7:15-20절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한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 판단할 때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고, 좋은 열매를 보고 나무가 좋은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 원줄기인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열매가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2,4,5,8절에서 그 열매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가지치기를 당한다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고,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무엇일까요? 가장 간단한 대답은 기독교인다운 삶의 태도입니다. 갈 5:22,23절에는 소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세상이 기독교를 다시 볼 겁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태도는 기독교만의 고유한 것은 아닙니다. 헬라, 로마문명도 이런 걸 중요하게 말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를 거론한 이유는 그것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기독교가 율법과 윤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비판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열매를 맺으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크게 구제와 봉사 활동을 했는지, 우리가 이웃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말을 했는지, 사회정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투쟁했는지가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세상을 책임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런 윤리 도덕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만약 본문이 말하는 열매가 윤리 도덕의 문제라고 한다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은 공허한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이런 열매는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열매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윤리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열매는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날 수 있는 삶의 근원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핵심적으로 말하면 제가 늘 강조하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게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오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는 자기 절대화입니다. 자기를 신의 경지까지 높이려는 욕망입니다. 자기 절대화는 아주 매력적인 겁니다. 그래서 거짓말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첨을 좋아합니다. 그런 인정을 받기 위해서 전력투구합니다. 피조물로서의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는 결국 자신을 파괴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자기 절대화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자기를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즉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허무와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 목표가 다 성취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허무와 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예수님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맺어야 할 삶의 열매입니다. 거기서만 세상을 새롭게 보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는 ‘아하, 그렇구나.’ 하지만, 실제 일상에서는 별로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상의 원리는 세속적입니다. 적자생존의 원리입니다. 세상에서 밀려나지 않을까,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경우에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거리가 먼 이야기로 남습니다. 이런 삶이 익숙해지면서 신앙과 실제 삶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죄와 죽음의 극복은 신앙적인 문제이고, 실제 세상에서는 세상이 가르치는 지혜대로 살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결국 우리는 오늘 본문이 경고하는 것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가 되는 겁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완전히 몸에 찌들면 결국 가지치기를 당하게 됩니다. 가지치기를 당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영혼이 더 황폐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핵심은 원줄기와 단단히 붙어 있는 것에, 즉 예수와의 연합에 최선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열매를 맺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도 4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 구절을 다시 읽을 테니 기억해두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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