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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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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2010.03.20http://blog.naver.com/malsoom/102304204 |
2010년 3월 2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창세기 1장 2절, 사도행전 4장 32절
설교제목 : 하느님의 바람으로 사이를 아름답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세 1:2) /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 4:32).】
<대화모임 이야기>
얼마 전 가락재영성원에서 열린 쉄(쉼+숨+섬)의 대화모임에서 참석자 모두가 공감한 참 좋은 의미의 우리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이가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이가 좋다”고 하면 그냥 ‘서로 친하게 지내는구나’ 하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날 대화모임에서 집단적으로 탐구한 “사이가 좋다”는 우리 말에 담긴 철학적 의미는 그 통상적 이해보다 깊고 높은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이런 내용입니다. 여기 김씨라는 사람과 이씨라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이 두 사람이 사이가 좋다는 의미는, 김씨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또 이씨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김씨는 장점이 있는 사람이고 또 단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모두 장단점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또 인간은 모두 나름대로의 독특한 철학과 삶의 태도를 갖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특성 혹은 개성이 있는 존재들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어떤 사람들은 ‘사이 좋게’ 지내고, 어떤 사람들은 ‘사이가 나쁘게’ 지냅니다. 중요한 것은 ‘사이’입니다. 즉 개체적 인간들 자체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 각자의 실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이’가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려면, ‘사이’가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그 사람들 각자가 좋은 인격의 사람으로 성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초점은 그 사람들 ‘사이의 관계’인 것입니다. 사이가 좋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한 일터, 행복한 직장, 행복한 사회를 꿈꾼다면,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를 잘 가꾸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도 좋은 사람이고 ‘나’도 좋은 사람인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너와 나 사이’를 잘 가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세 1:2) /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 4:32).】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형상에 대한 기록이며, 사도행전의 말씀은 초대교회 당시 성령을 받은 자들이 사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구절입니다. 성령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요약은 곧 ‘하느님의 바람’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도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요약은 ‘거룩한 바람의 아들딸들로 사는 자들’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인들이 행복한 인생들을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즉 그 초대교회 교인들이 ‘사이 좋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곧 그들 사이사이에 ‘하느님의 바람’이 통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교우들은 하느님의 바람으로 그들 사이사이를 잘 가꾸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아우라 이야기>
우리가 그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들 각자가 ‘나의 성숙’에 대해서 힘써야 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나’를 잘 가꿔야 합니다. 더 아름다운 인격으로, 더 따듯한 성품으로,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우리 스스로를 가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사는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아울러서 또 하나의 중요한 초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우라’(Aura)입니다. 즉 ‘나 주변의 영역’을 잘 가꿔야 하는 것입니다. 아우라는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1892∼1940)이 예술작품에서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뜻하는 말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말의 원래 뜻은 “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하는 기운 또는 영기(靈氣)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나’를 잘 가꿔야 하고, 그와 아울러서 ‘나 주변의 아우라’를 잘 가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아우라의 영역’이 곧 성령의 영역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바람이 ‘나’와 ‘너’ 사이에, 그러니까 ‘나’와 ‘내 주변의 아우라’에 하느님의 바람이 시원하게 통용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들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웃과 악마’ 이야기>
최근 김진호 목사님(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연구실장)의 글, ‘이웃과 악마’를 읽었는데, 그 메시지가 참 좋았습니다. 김 목사님은 그 글에서 보수적 선교사의 열정으로 북한 땅에 홀로 들어갔다 돌아온 ‘로버트 박’에 대해서 우려하면서, “진정한 선교사적 영성은 선악으로 나뉜 세상에서 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수하면서 뜨거운 믿음이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질서, 그것의 편견과 증오, 그리고 상처를 보듬는 냉철하지만 따뜻한 믿음과 연관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적절한 말씀입니다. 설사 북한이 악마적인 인간들의 공동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는 ‘흑(黑)을 백(白)으로’ 바꾸려는 어리석은 선교사적 열정으로 무장해서는 안 되며, 그 보다 더 큰 차원으로서 세상의 탐욕으로 이지러지고 있는 인간의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정확한 말씀입니다.
저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 남한과 북한이 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 우리 남한인들이 해야할 몫은 무엇일까요? 북한은 변화시킨다든가, 북한 땅을 백화(白化, 적화의 반대 의미로)한다든가, 북한 땅을 민주화한다든가, 북한 땅을 복음화한다든가 …… 등등의 자세는 교만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고, 폭력적인 것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할 몫은 ‘남한인’과 ‘남한인의 아우라’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남한인과 남북한 ‘사이’를 가꾸는 일이 우리 몫인 것이며, 그런 방법만이 남북한 공동체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의 바람으로 사이를 아름답게’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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