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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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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2010.03.28http://blog.naver.com/malsoom/102760821 |
2010년 3월 2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0장 34절
설교제목 : 예수의 전쟁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고난주간 이야기>
우리 기독교의 전통적인 절기인 부활절을 한 주 앞두고 있습니다. 즉 요즘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고난주간이면 전통적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인류에게 축복(?)으로서 고난을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없다면 영혼의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에 관한 이야기 중 맹자의 명언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정말 훌륭한 메시지입니다. 한자 한자 잘 새기면, 우리 모두에게 고난에 숨겨져 있는 하늘의 메시지를 깨닫게 하는 경구(警句)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런 메시지를 예수님의 고난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은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예수님에게 고난을 준 차원도 있지만, 예수님 스스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예수의 전쟁’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인생은 전쟁이다>
저 자신도 굉장히 싫어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말 중에 ‘인생은 전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전쟁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인류가 원시적인 자연 속에서 살아갈 때도 인류는 무수히 많은 적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여기서 ‘적’(敵)이란, 추위이기도 하고 배고픔이기도 하고, 맹수들의 위협이기도 하고, 노예제도를 비롯한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또 한 가정을 꾸려나간다는 것, 한 교회를 지켜나간다는 것, 한 나라를 운영해 나간다는 것 …… 그것들의 뒷 배경에는 전쟁의 핏자국이 선연합니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지금도 여전히 전쟁 중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가끔 그렇게 생각하고, 또 많은 이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 중에, “시골에 가서 자연을 벗삼아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짚은 것입니다. 시골에서의 삶 역시 전쟁일 뿐이고, 자연을 벗삼는 삶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이 전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전쟁의 틀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비극적 존재’인 것입니다.
<소설가 이야기>
제가 이상하게 소설을 잘 읽지 못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 예외적으로 두 사람의 소설가 작품은 간헐적으로 읽곤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들이 인간의 야수성(野獸性)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인들이 공통적으로 또 전통적으로 생각해 온 명제, 즉 “인간에게 착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명제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인간의 본질은 추함에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또 니코스카잔차키스 역시 그의 분신이라도 볼 수 있는 ‘희랍인 조르바’를 통해서 선언하기를 “인간은 짐승이다”고 했습니다. 정말 잘 곱씹어야할 선언들입니다.
<다시 예수의 전쟁 이야기>
이제 다시 ‘예수의 전쟁’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짧은 30년 남짓의 인생을 어떤 마음으로 사셨을까요? 제가 단언하건대, 또 우리 모두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전쟁하는 마음으로 그의 인생을 살아 가셨습니다. 그분이 고난을 겪으셨는데, 그건 그 자신이 전쟁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습니다. 전쟁하는 자에게 고난이란, 항시 붙어 다니는 그림자와 같은 분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이 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전쟁을 하면서 사셨을까요? 과거와 현재의 보통 사람들처럼, 제 한 목숨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셨을까요? 혹은 이기적(利己的)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전쟁을 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전쟁은 이타적(利他的)인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 그 자신을 포함한 인류 전체를 위해서 전쟁을 하는, 곧 온 인류를 낳으신 하느님을 위해서 전쟁을 하는 ‘장대한 삶’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땅의 전쟁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전쟁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삶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며, 빛나는 것이며, 신비로운 것이며, 흠모할만한 가치가 있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예수보다 더 아름답고 심오하고 동정심 있고 이성적이고 인간적이고 완전한 존재는 없다고 믿습니다. 나는 질투 섞인 사랑을 고백합니다. 예수와 같은 존재는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또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예수가 진실 밖에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면, 그 진실이 참으로 예수 밖에 있다면, 나는 차라리 진실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남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TV 드라마 이야기>
제가 TV 드라마를 보고나서 감동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최근 드라마 “추노”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회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공형진 씨가 연기한 ‘노비 포수’, 또 장혁 씨가 연기한 ‘추노꾼’, 오지호 씨가 연기한 ‘조선의 장군’ 등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노예 제도’라는 얼토당토한 사회제도를 바꾸기 위해서 투쟁했고, 그 와중에 모두 비극적으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고난주간의 참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예수와 닮아 있습니다. 추악한 이기심에 사로잡힌 ‘땅의 전쟁’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타심에 사로잡힌 ‘하늘의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 그래서 그들이 겪게 되는 비극적인 고난의 세월, 그게 고난 주간의 진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예수의 전쟁’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예수의 전쟁은 추악한 ‘땅의 전쟁’이 아니라 아름다운 ‘하늘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전쟁에 진정한 의미와 해방과 구원, 자유와 해탈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의 전쟁’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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