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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마태복음 김용덕 형제............... 조회 수 626 추천 수 0 2015.06.19 23: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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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7:13-14 
설교자 : 김용덕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39068 

좁은 문(마태복음 7:13-14)

 
2013년 8월 11일 주일예배

김용덕 형제

(GIST 석좌교수)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태복음 7:13-14)


우리는 모두 좁은 문을 통과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한 관문으로서의 좁은 문이 있는가 하면,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한 좁은 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친구와 이웃마저 밀쳐 내가며 통과하려는 좁은 문은 일단 통과 후에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널찍한 길이 열린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가 먼저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세속적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많은 학생과 젊은이들은 친구들과의 교류라든가 개인적인 취미생활 등을 희생시켜 가며 상당한 기간 동안 ‘세속적 금욕생활’을 참아냅니다.

 

한편, 예수께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신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다음의 길도 비좁아서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저는 ‘비좁은 길’ 보다는 ‘험난한 길’이라는 표현을 택하고 싶습니다. 왜 ‘비좁은 길’로 직역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성경들을 보면 ‘힘든 길’, ‘협착하고 어려운 길’, 또는 ‘좁은 자갈 길’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문이 넓고, 길이 널찍하고 편하여 들어가는 자가 많은 그런 문이 아닙니다. 심신의 생활에 있어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요구하는 문이요 길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좁은 문과 험난한 길’에 주목하려는 것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André Gide, 1869-1951)의 <좁은 문>(La porte étroite)은 극단적인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통해 좁은 문을 향하여 가려는 젊은 여자와 그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북부의 르와브르에 살던 제롬은 11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파리로 이사하게 되지만, 그 후에도 외가가 있는 르와브르 근처의 마을을 자주 찾아갑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두 살 위의 외사촌 누이 알리싸와 풋사랑을 하게 되지만 외숙모가 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져 가출하게 되면서 알리싸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외숙모의 가출 후 첫 주일 설교가 바로 ‘좁은 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들으며 제롬은 알리싸와 함께 좁은 문을 거쳐 하나님을 향한 길을 같이 가겠다고 마음먹지만, 청교도적 순결을 지키려는 알리싸는 제롬과 같이 할 수 있는 인간적 사랑과 세상의 행복을 거부 합니다. 인간적 행복과 종교적 구원의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며, 현실적인 사랑과 행복을 단념하고 종교적 덕성 속으로 숨는 것입니다. 둘이 함께 가기에는 너무 좁은 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제롬에 대한 그리움이 심신을 괴롭혀 알리싸는 깊은 병을 얻게 되고, 조용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파리의 이름 없는 요양원을 찾아가 죽음을 맞습니다. 상처 입은 알리싸의 영혼이 하늘의 영광을 그리워하면서도, 제롬을 가슴 깊이 품고 놓지 못하는 두 사람의 사랑의 이야기가 절절한 심리묘사와 함께 아름다운 주변묘사와 어울려 깊은 감동을 자아내게 합니다. 좁은 문의 상징성을 맑은 수채화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청교도적인 집안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이야기를 상당히 포함시킨 <좁은 문>이지만 그 자신의 삶과 일치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좁은 문>이 상징적 픽션이라면, 실제 삶에서 좁은 문을 거쳐 험난한 길을 찾아가며 사는 분이 있습니다. 좁은 문을 지나 힘들고 어려운 길을 끊임없이 찾아가고 있는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 목사님을 제가 만난 것은 3년 전 광주에서였습니다. 광주시립박물관에서 서울역사박물관과 함께 “외국인이 본 서울” 이라는 전시회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1910년대, 40년대, 70년대의 서울을 외국인들이 찍은 사진전시회에서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과의 인연으로 그 자리에 간 저는 어느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가 짐을 지고 힘들게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온 사람이 그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1970년대 초 서울의 청계천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구호활동을 하며 찍은 사진을 기부한 일본인 노무라 씨가 아무 연락도 없이 광주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찾아온 것입니다. 더욱이 광주의 아픔과 슬픔을 눈으로 보기 위해서도 꼭 오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소리 없이 찾아왔는지, 그 전날 광주공항에 밤늦게 내려 택시운전수에게 호텔로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번화가의 어느 러브호텔로 데려다 줘 밤새 잠을 못 잤다고 웃으며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전시회의 주인공이 예고도 없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저희 부부는 그의 호텔을 옮겨주고 식사를 함께 하며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빈민운동가 제정구 씨와 같이 청계천 빈민구제활동을 하며, 서울에 올 때마다 중앙정보부원 두 사람의 감시를 받아가면서 일본을 왕래해야 했던 일, 서울에서 경험한 것을 정보부원들이 못 읽도록 암호를 이용해 일지를 적어 일본에 가서 풀어써야 했던 일 등,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청계천이 관광지가 되어 있지만 1970년대 초 복개되기 까지는 외국인들 눈에 띌까봐 숨기려고 하던 곳이었습니다. 6.25 전쟁 전까지는 집단 난민촌은 아니었습니다만, 1950년대와 60년대 서울의 난민들이 청계천 주변으로 모여 살게 되면서 항상 홍수만 나면 제일 먼저 피해를 입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눈을 돌리던 그곳을 일부러 난민들과 같이 생활하며 그들과 고통을 같이하며 보듬어 주던 이름 없는 외국인 후원자였습니다. 광주를 떠나며 제정구 씨가 생전에 좋아하던 치즈라며 저에게 주고 가는 과분한 호의를 제게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 후 메일을 통하여, 또 가끔 만날 때 마다 많은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도시샤 대학의 행정법 교수였고 어머니는 늦게 신학을 공부해서 서남동 목사와 동급생이었던 분으로 약자들을 위한 운동에 헌신하여 노벨평화상 후보로 일본에서 추천되기도 하였답니다. 노무라 목사 자신은 동경에 있는 아자부 수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 미국유학을 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일본 기독교단의 무기력함에 환멸을 느껴 일종의 가정교회 같은 것에 더 힘을 쏟고 있던 중 한국 빈민들의 참상을 듣고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어릴 때의 기억이 한국을 찾게 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같이 놀던 한국친구를 일본아이들이 죠센징이라고 놀릴 때 그는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런 기억이 자기를 한국으로 이끌어 주었다고 하며, 제정구 씨와 만나 청계천 빈민들과 생활하며 자기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기쁨을 느꼈다고 오히려 그들이 자기를 구원한 것이라고 담담히 고백할 때 국경을 떠난 참 크리스쳔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빈민활동을 한다는 한국인 목사에게 속아 동경에 있는 집을 처분해야 했던 일, 청계천을 떠나서도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을 돕느라 아들(노무라 마코토, 사회복지사로 매년 한두 차례 한국에 와서 봉사하고 감)의 예금까지 빼내어 도와 준 일 등을 들을 때는 한국인으로서 제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무라 목사는 지금 후지산 밑 조그만 시골 마을에 살며 근처 산에 사는 야생동물과 유기동물들을 돌보며 주말이면 동경 등지에서 찾아오는 신앙의 동지들과 예배를 드리며 살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 위로도 할 겸 저희 부부가 노무라 목사의 시골집을 방문했었습니다. 청교도적 검약생활의 모범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노무라 목사는 한국에 대한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 자기가 특별난 일본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사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마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작년에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플루트로 봉선화를 연주해 화제가 되었던 그 일본노인이 바로 노무라 목사입니다. 한국의 미디어에서 ‘반성하고 사죄하는 일본인’으로 크게 취급되어 가는 데마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에 굉장히 불편해 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그 날 저는 느꼈습니다. 불쾌해하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에 돌아가 노무라 목사는 긴 메일을 제게 보냈습니다. 일본의 우익들이 너무 괴롭혀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바꿀 수밖에 없었던 사정, 한국 언론들의 지나친 상업주의(순수한 노무라 목사는 한국 언론의 속성을 잘 몰랐나 봅니다)와 한국 내 반일주의자들의 그에 대한 일방적 찬양 등이 그를 괴롭게 한 사정 등을 제게 알리며 자기의 본뜻을 알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한국을 사랑하는 것은 한 일본인이, 사죄하는 의미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고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것임을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저지른 죄를 일본인이기 때문에 반성하고 사죄한다기보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는 점에서 자기는 희생자들을 돌보고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나라의 극단주의자들에게 모두 비판적입니다. 국경을 넘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무라 목사는 고난의 길을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는 아마 좁은 문과 험난한 길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끝이 없어 보입니다. 끊임없이 고난의 길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 일러주신 좁은 문은 더럽고 불편한 문일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영광의 문이 아닙니다. 그만큼 자기희생의 문일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순수한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구원의 문일 것입니다.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자신감이나 자만심, 편협한 마음으로는 이 문을 지나갈 수 없을뿐더러 지나갈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자기를 없애야 하니까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끝없이 험난한 길로만 이끄는 그런 문이 아닐까요? 좁은 문을 지나 큰 길이 나타나면 어려움이 없다는 어느 대통령의 구호와 같은 ‘大道無門’이 아닐 것입니다. 그 고난과 금욕의 길로 들어서기로 다짐한 우리는 구원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어서, 더욱 열심히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초기 청교도들처럼, 구원을 향한 꿈을 찾아 묵묵히 걸어가는 같은 구도자들이 아닐까요?

 

기도

 

좁은 문, 고난의 길로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는 주님!

힘들고 괴롭더라도 저희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따르려고 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힘든 여정이라도

저희는 구원을 향하여 말없이 순종하며 따르겠습니다.

저희 삶이 좁은 길을 벗어나 넓고 편안한 길을 가려고 할 때

저희에게 구원의 길을 찾아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항상 채찍질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어렵고 고달프지만 참 된 길을 밝혀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오며,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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