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

출애굽기 박남희 자매............... 조회 수 457 추천 수 0 2015.06.19 23:40:38
.........
성경본문 : 출32:1-16 
설교자 : 박남희 자매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39070 

죽어가는 자의 고독

(출애굽기 32:1-16)


2013년 8월 18일 여름수련회 주일예배

박남희 자매

(노숙인 인문학과정 ‘성프란시스대학’ 철학 교수)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으니

아론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 귀에 달고 있는

금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시오.“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왔다.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 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하고 선포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 드렸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모세는 주 하나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님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님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출애굽기 32:1-16)

 

이 구절은 이주연 목사님께서 지난 7월 14일 새길교회에서 <역사와 인생 블랙아웃>이라는 귀한 말씀을 전해주실 때 인용하신 성서의 귀절입니다. 오늘 다시 이 구절을 인용,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까닭은 그날 목사님께서 전하셨던 말씀을 다시 상기해 보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제가 식당에서 성도님들께서 나누시던 말씀을 우연히 듣게 된 까닭입니다. 과연 노숙인이 거리에 나오게 된 주원인이 가부장제의 몰락과 부권의 해체에 따른 것일까요? 왜 우리는 노숙인이 남성이라고만 생각할까요. 거리에서조차도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이 있다는 것을 왜 우리는 생각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자칫하면 과거로 회귀하면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는 시간의 불가역성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힘들게 일구어 온 삶의 역사를 스스로 훼손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단순히 과거로의 희귀를 의미하지 않듯이 아마도 목사님이나 성도님들의 의도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보다 명증한 성찰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성찰이 곧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는 과거와는 다른 차이를 가지고 진행하는 시간의 연속으로 단순한 반복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들레즈가 거시적 그림을 차이와 반복으로 말했던 까닭도 바로 그렇게 때문이겠지요. 헌데 시대가 혼란스러우면 사람들은 먼저 과거로 회향하려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가까이는 절대적 이성주의의 한계에 부딪힌 근대 말기 다시 칸트에게로 돌아가고자 외쳤던 신칸트학파가 그렇고, 중세말기 다시 고대 그리스 . 로마에로의 희구를 꿈꾸었던 르네상스 시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영웅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 이들을 이끌어 갑니다. 이집트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며 자신들을 위해 이전에 우상을 숭배하였듯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달라는 사람들의 조급함을 설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 야합하는 아론과는 달리 모세는 성미 급한 하나님까지도 설득하며 가나안 땅으로 이들을 인도해 갑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섣부른 판단과 조급한 해결을 요청하는 무리들입니까. 아니면 시대의 지도자라 자처하면서도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아론입니까. 아니면 온갖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가는 모세입니까.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조바심을 가지고 조급함 속에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이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태도는 우리의 본성이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조급함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기 때문이고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내는 조급함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는 신이 아니라 깊이 넓게 생각해야 비로소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세처럼 조금 더 넓게 보고 깊이 생각할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주어진 본성을 새롭게 하며 자기를 고양해 가는 사람의 초월성 ‘사람다움’이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다 알지 못하기에 늘 달리 새롭게 이를 넘어서 가야 한다면 성급한 일반화나 범주화 보다는 겸손과 용기를 가지고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향하는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노숙인의 문제도 바로 그러합니다.

 

노숙인들 중에는 물론 경제적 문제로 가족의 해체를 겪어 길로 나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권이 상실 때문인지 아니면 오히려 가부장적인 폐단 때문인지 우리는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도 어쩌면 또 다른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아닌지요. 문제를 이야기 한다며 오히려 더 깊은 근본적인 문제를 덮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계 독일의 사회학자인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쓴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란 책이 있습니다. 과학기술을 극대화하는 현대인은 모든 것들을 통제- 예측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이에 반하는 것을 배제해 간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죽음으로, 사람들은 죽음을 밝고 좋고 즐겁고 풍요로운 이 사회에 부합하지 않다고 여기며 배제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최첨단 기술과학 시대를 사는 우리는 마치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살고 행동하며 삶에서 죽음을 배제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어가는 자 역시 마치 죄를 지은 자처럼 배척당하며 고독하게 죽어간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모든 공간은 삶을 위한 공간이지 죽음을 위한 공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죽음을 배제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다음의 그림은 허스트라는 설치 미술가의 해골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가는 이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 것일까요. 해골과 ‘얼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얼굴이란 ‘얼’이 들어 있는 굴이란 뜻이라 한다면 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얼굴에서 얼이 빠지면 무엇이 되나요.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일까요. 지식, 돈, 과학기술, 신약... 아니면 혹 명예, 권력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시간의 연장만을 꾀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배제하고 있는 것일까요. 생명이 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배제하면서 정말은 생명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0003.jpg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루게릭병에 걸려 죽어가는 선생 모리와 너무 바빠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제자 미치가 만나서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리선생은 살아서 장례식을 치르며, 삶 안에서 죽음을 같이 하며, 일상의 소중한 시간을 살아가나 미치는 죽음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격어야 하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배제한 그야말로 성공(?)한 젊은 친구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야기 합니다.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누가 산 것인지를... 미치는 잘 산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소중한 것, 자신이 하는 일에 불편한 모든 것들을 배제해 버림으로 자신조차도 잃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나요. 사랑도, 나눔도, 꿈도, 현재에서가 아니라 자꾸 이월시키며 시간의 연장을 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잘살기 위해 혹 잘못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헌데 우리가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 단지 이런 것들뿐일까요. 죽지 않을 자처럼 모든 것을 연장시키는 우리는 잘 산다는 허울 아래 실수, 허물, 느림, 여성, 소수, 2등, 타자, 부정성, 그밖에도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배제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노숙인, 장애인, 미혼모 등도 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은 제도나 사회 이전에 우리가 배제시킨 유령인간은 아닌지요.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마치 우리는 그들이 없듯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날마다 교회에 모여 기도합니다. 매번 같은 기도를... 사회가 제도가 가부장적 부권이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빌라도처럼 손을 씻으며 나는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손을 씻기우는 그 무엇인가요.

 

모세는 주님께 간구합니다.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님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하고 말입니다. 주님의 백성을 치는 것은 곧 당신을 치는 일임을 모세는 이야기 합니다. 모세는 무리를 떠나 시내 산에 머무르며 이를 깨달아 알기에 산을 내려갑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짓고 살자는 베드로와는 달리 모세는 시내산을 내려갑니다. 모세의 존재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지한 그들에게로 가는 그들과 같이 할 때 모세도 사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존재성, 정체성은 우리끼리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전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제게 종교가 있냐고, 그리고 어느 교회를 다니냐고... 그럴 때마다 사실 전 참 난감함을 느낍니다. 그분들이 과연 이 교회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이면 어떻하나 하고 말입니다. 교회란 어떤 곳인가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시내산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 시대, 그 사회, 그 민족, 그 사람을 이끌어야 하는 힘을 얻는 곳이라 한다면, 이 시대의 시내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여기에 고통으로 고독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거하지 않는다면 시내산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지금 고독하게 죽어가는 자는 누구인가요. 고독하게 죽어가는 자가 거리의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이기도 하지는 않나요. 그들이나 우리나 돈, 지위, 권위, 지식을 문제시 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들과 우리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사나요. 우리가 정말 얼로 영으로 생명을 영위해 가는 자라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스스로 경험하여 깨달아 알고 행하도록 하신 것처럼,

예수를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도록 하신 하나님,

우리도 우리가 배제한 것을 다시 찾아 그리 행할 수 있도록

내 안을 밝힐 영을 허락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2267 창세기 신앙의 명심보감 창4:1-26  최장환 목사  2015-06-24 504
12266 마가복음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막2:13-17  김경형 목사  2015-06-23 364
12265 마가복음 환경의 소산으로 사는 자는 중풍병자다. 막2:1-12  김경형 목사  2015-06-23 452
12264 요한복음 架上七言-가상칠언(5) 요2:4  이정수 목사  2015-06-21 435
12263 누가복음 架上七言-가상칠언(4) 눅23:44-46  이정수 목사  2015-06-21 639
12262 누가복음 架上七言-가상칠언(3) 눅23:1-56  이정수 목사  2015-06-21 356
12261 누가복음 架上七言-가상칠언(2) 눅23:1-56  이정수 목사  2015-06-21 399
12260 마가복음 架上七言-가상칠언(1) 막15:1-47  이정수 목사  2015-06-21 829
12259 사도행전 성령강림주일 행4:21-31  이정수 목사  2015-06-21 566
12258 잠언 청년주일 잠5:1-14  이정수 목사  2015-06-21 605
12257 출애굽기 어버이 주일 출20:12  이정수 목사  2015-06-21 932
12256 창세기 어린이주일-행복한 아이로 키우는 근본 바탕 창18:19  이정수 목사  2015-06-21 621
12255 에배소서 성도의 바른 습관 엡4:21-24  강종수 목사  2015-06-21 616
12254 요한일서 하나님은 사랑이라 요일4:7-12  강승호 목사  2015-06-20 791
12253 창세기 한 '보이스카웃'의 괴로움 창1:26  정경일 형제  2015-06-19 418
» 출애굽기 죽어가는 자의 고독 file 출32:1-16  박남희 자매  2015-06-19 457
12251 마태복음 좁은 문 마7:13-14  김용덕 형제  2015-06-19 626
12250 마태복음 보는 것과 보이는 것 file 마13:13  최현섭 형제  2015-06-19 751
12249 고린도후 영광인가! 수치인가! [1] 고후6:1-13  강승호 목사  2015-06-19 452
12248 여호수아 목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수1:12-14  강승호 목사  2015-06-17 850
12247 열왕기하 최선의 선택 왕하11:1-16  최장환 목사  2015-06-17 707
12246 디도서 십자가를 지자 딛1:1-16  최장환 목사  2015-06-17 746
12245 마가복음 예수님의 나의 중풍병을 고치는 분이시다. 막2:8-12  김경형 목사  2015-06-16 412
12244 마가복음 우리가 이런 일은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막2:1-12  김경형 목사  2015-06-16 381
12243 신명기 나눔이 필요 없는 삶으로 신23:19  김부겸 목사  2015-06-15 416
12242 요한복음 내 안의 미세한 변화에 주목합시다 요8:1-11  김부겸 목사  2015-06-15 572
12241 고린도전 잠자는 자들 중 두 번째 열매 고전15:20-22  김부겸 목사  2015-06-15 378
12240 마가복음 전멸(全滅)되지 않는 진리의 세계 막16:1-6  김부겸 목사  2015-06-15 310
12239 마태복음 예수의 전쟁 마10:34  김부겸 목사  2015-06-15 396
12238 창세기 하느님의 바람으로 사이를 아름답게 창1:2  김부겸 목사  2015-06-15 294
12237 마태복음 가난에의 용기 마19:24  김부겸 목사  2015-06-15 296
12236 마태복음 하나님 창조세계의 이치 마13:1-9  김부겸 목사  2015-06-15 412
12235 디모데전 하나님의 사람 딤전6:11-12  강종수 목사  2015-06-14 578
12234 마가복음 주의 날을 준비하자 막13:24-37  한태완 목사  2015-06-13 685
12233 시편 성경을 읽자 시119:97  한태완 목사  2015-06-13 648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