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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보이스카웃'의 괴로움

창세기 정경일 형제............... 조회 수 418 추천 수 0 2015.06.19 23:45:42
.........
성경본문 : 창1:26 
설교자 : 정경일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41547 

한 '보이스카웃'의 괴로움

(창세기 1:26 a)


2013년 9월 8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26 a)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괴로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개인의 괴로움마다 역사가 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언제 자신의 괴로움이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저는 기억합니다. 제 괴로움이 시작된 날 찍은 사진이 한 장 있거든요.


IMG_20130908_220323.jpg


초등학생 때 보이스카웃에 입단해 촛불선서식을 하고 있는 모습(왼쪽)입니다. 이 사진에서 조금 특이한 점이 보이지 않으세요? 제가 옆에 있는 아이보다 키가 많이 크죠? 제가 또래보다 키가 컸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편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옆에 선 아이는 아마 3학년이나 4학년이었을 겁니다. 보통 3, 4학년 때 보이스카웃에 입단하는데, 저는 뒤늦게 6학년 때 입단했습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저는 무척 내향적인 아이였습니다. 밖에서 뛰어 노는 것보다 집에서 책 속에 파묻혀 사는 걸 좋아했습니다. 백 권짜리  [딱다구리 그레이트 북스]는 일찌감치 다 읽었고, 6학년이 될 무렵 [한국단편문학 전집] [세계문학사상전집]을 읽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외톨이는 아니었습니다. 친한 친구도 몇 명 있었고, 외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게 편하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 부모님은 사내아이가 숫기도 없고 너무 내향적인 것이 불편하고 염려되셨나 봅니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 무리를 하시면서 저를 보이스카웃에 입단시키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두 분의 선택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저는 내향적 성격을 '문제'로 여기게 되었고, 외향적 삶의 방식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적극적으로요. 당장 그 해 '줄반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청소년 시절에는 학교와 교회에서 리더십 활동을 했고, 대학에 가서는 격렬하게 급진적 학생운동도 했습니다. 그 후에도 이런저런 외향적 리더 역할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촛불선서식' 이후 제 삶은 괴로움의 연속이기도 했습니다.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으로 살아야 했고, 또 그것을 숨기려 했으니 맘 편할 날이 없었던 거죠. 도대체 얼마나 내향적이기에 저러나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말씀 드리면, 수잔 케인(Susan Cain)의 책 Quiet에서 내향성을 체크하는 스무 개의 질문 중에 제가 Yes라고 답한 게 열 여덟 개였습니다. 그냥 내향적인 게 아니라 아주 심하게 내향적인 거죠.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저처럼 내향적인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케인에 따르면 외향적 문화의 미국 사회에서도 3분의 1 정도는 내향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아마 미국보다 휠씬 더 내향적 문화인 한국에서는 그 비율이 더 높을 겁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내향적인 분들이 꽤 계실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내향성 자체가 제 괴로움의 원인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내향성을 약함으로, 문제로, 심지어 질병으로 여기는 문화가 괴로움의 원인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문화에 순응하고 그것을 내면화한 제 자신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외적으로, 내적으로 제 본성을 부정한 채 '보이스카웃'으로 사는 것은 괴로움이었습니다.

 

돌아보면 12년 전 새길 공동체에 처음 왔던 무렵 비로소 '보이스카웃'이기를 그만둘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새길의 어떤 문화 혹은 기운이 제게 본성대로 살아갈 동기와 용기를 주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이후의 제 삶은 저의 내향적 본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탐구와 수행의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우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향성은 문제나 질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향성의 열매는 약함이 아니라 용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동적으로 깨닫게 해 준 내향적 인간이 한 분 있습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어머니 로자 팍스(Rosa Parks)입니다.

 

로자 팍스의 내향성과 용기

 IMG_20130905_165026.jpg

 

1955 12 1,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시,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흑인 여성 로자 팍스는 퇴근버스에 올라 흑인석의 맨 앞 줄에 앉습니다. 그런데 백인석에 빈 자리가 없자, 백인 운전사는 로자에게 뒷자리로 옮길 것을 명령합니다. 로자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됩니다. 이 사건은 몽고메리시 흑인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382일간의 버스 승차 보이콧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이 운동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전국적 저항의 도화선이 됩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로자는 어떤 이였을까요? 아마 몹시 외향적인 여성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하지만 수잔 케인은 로자가 무척 내향적인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케인의 글을 읽고 로자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내향적 여성의 괴로움과 용기가, 그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요

 

사실 그 백인 버스 운전사와 로자의 악연 혹은 인연은 그 결정적 사건이 있기 12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운전사의 이름은 제임스 블레이크(James F. Blake)입니다. 1943, 비 내리던 어느 날, 로자는 제임스가 몰던 버스 앞문으로 올라 타 요금을 낸 후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제임스는 뒷문으로 다시 타라며 로자를 버스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로자가 뒷문으로 버스에 다시 타려는 순간 그냥 차를 출발시켜버렸습니다. 이때 로자가 느낀 분노와 수치심은 형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트로마가 얼마나 깊었으면, 그날 이후 무려 12년 동안 같은 정류소에서 버스를 타던 로자는 늘 버스 운전사가 누구인지 살펴보고, 제임스가 운전하는 버스면 타지 않았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12(!) 동안 같은 장소에서 매번 수치와 두려움에 떨며 버스를 기다려야 했던 로자의 괴로움을...

 

그런데, 1955 12 1, 어떤 생각에 몰두하고 있던 로자는 운전사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을 깜박 잊고 버스에 올라 탑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고 나서야 알아차립니다. 자기가 가장 피하고 싶은 제임스가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는 것을요. 가슴이 울렁거리고 식은 땀이 납니다. 그런데 이 무슨 악연의 반복인가요? 바로 그 제임스가 뚜벅뚜벅 다가와서는, 백인석이 모자라니 뒷자리로 옮기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로자는 조용하지만, 자기 존재의 모든 힘을 내어 말합니다. "No!" 이유를 묻는 제임스에게 답합니다. "I'm tired." 물론 몸이 힘들고 지쳐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로자의 나이 42세였고, 그 날이 다른 날보다 특별히 더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로자를 지치게 한 것은 차별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제임스를 피해 버스를 골라 타야 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수치와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이 지긋지긋했습니다. 로자가 맞선 것은 제임스가 아니었습니다. 로자가 맞선 것은 자신의 수치와 두려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전 존재로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한 내향적 인간의 용기를 봅니다. 로자가 낸 용기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종차별이 제도화, 문화화, 내면화되어 있는 남부 도시에서 No!를 말하는 것은 것은 외향적인 인간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 때 로자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다른 흑인 남성 세 명도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해오던 대로 제임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 자리를 옮겼습니다. 확률적으로 그들 가운데 외향적 인간이 더 많았을 겁니다. 로자의 내향성은 약함이 아니었습니다. 비겁함이 아니었습니다. 불의와 차별에 조용하지만, 단호하고 용기 있게 맞서는 힘이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로자의 자서전 제목도 [조용한 힘Quiet Strength이었습니다. 로자의 가족과 친구들도 로자가 소심하고 부끄럼 잘 타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사자의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마틴 루터 킹 Jr.와의 만남

 

제가 내향적이라고 해서 내향적 사람만을 편해 하고 외향적인 사람을 불편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불편해하는 것은 외향적 인간이 아니라 내향성을 불편해하는 외향적 문화입니다. 또한 내향적 인간이라고 해서 더 선하거나 더 용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향적 악인도 있고 내향적 겁쟁이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선을 위해 용기를 내는 사람들의 만남과 연대입니다. 자신과 세상을 함께 변화시켜가는 내향적 인간과 외향적 인간이 만나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자 팍스와 마틴 루터 킹 Jr.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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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목사는 누가 봐도 외향적인 인간입니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명연설가요 사회운동가입니다. 50년 전 그가 워싱턴 D.C.의 링컨 메모리얼 앞에서 한 "I Have a Dream" 연설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그런 그가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전국적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로자의 저항과 체포였습니다. 마틴은 로자가 체포된 후 특유의 외향적 지도력과 감화력으로 몽고메리시 버스 보이콧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외향적인 마틴이 버스에서 좌석을 옮길 것을 요구 받았을 때 "No!"라고 하며 체포되었고, 내향적인 로자가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했다면 사태는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요? 로자와 마틴 모두 내향적이었다면, 혹은 둘 다 외향적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어떤 상황이든 큰 반향이 있었겠지만, 아마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처럼 전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내향적인 로자의 용기에 마음이 움직인 흑인들과 백인들이 자유를 위해 떨쳐 일어났고, 외향적인 마틴의 열정과 카리스마에 고무 받아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훗날 힙합 싱어 Jay-Z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Rosa Parks sat so Martin Luther King could walk. 
로자 팍스가 자리를 옮기지 않고 앉아 있었기에 

마틴 루터 킹이 행진을 할 수 있었어.

 

내향적인 로자와 외향적인 마틴이 만났을 때, 그들의 본성대로, 그들의 모습 그대로 악에 맞섰을 때, 그들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는하나님 나라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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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적이며 외향적인 우리하나님

 

로자의 이야기는 내향성이 문제나 죄가 아닌,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내향성이 조용한 힘, 조용한 리더십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수잔 케인은 마하트마 간디, 앨 고어, 워렌 버핏, 스티브 잡스 같은 이들이 모두 내향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모세, 붓다, 예수 같은 영적 스승들도 내향적 인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향적일까요 외향적일까요? 우리는 궁극적 신비인 하나님의 모습이나 성격을 직접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말씀은 하나님의 성격을 귀납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우리가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우리의 보이는 경험적 모습과 성격을 앎으로써 하나님의 모습과 성격을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내향적이기도 하고 외향적이기도 하니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하나님도 그런 분일 거라고 추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신학자들을 괴롭히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라는 복수대명사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왜 '우리'라는 복수대명사를 사용하셨을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나타낸다는 해석도 있고, 일종의 '위엄/장엄의 복수형'이라는 해석도 있고, 천사들을 언급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저는 이 '우리'를 개별적 존재의 합인 복수대명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요로운 속성을 나타내는 형용사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성서를 보면 엘, 엘로힘, 엘샤다이처럼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여러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 이름들은 복수의 신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는 내향적인 모습과 외향적인 모습이섞이지도 나뉘지도않으면서 조화롭게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음과 양을 하나로 품는 태극처럼 말이지요.  

 

모빌과 스태빌의 공동체

 

한의학은 우리 몸의 음과 양이 조화되는 것이 건강이고 음과 양의 조화가 깨어지는 것이 질병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를 하나의 몸으로 생각한다면 내향성과 외향성의 조화는 음양의 조화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새길처럼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공동체는 어떻게 내향성과 외향성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회고전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게 무척 흥미로웠던 것은 칼더의 작품이 움직이는 조각인 모빌(mobile)과 움직이지 않는 조각인 스태빌(stabile) 두 종류로 나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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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외향성, 내향성 주제와 연관지어 말한다면, 모빌은 외향성을 스태빌은 내향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칼더의 이 모빌과 스태빌은 공통적으로 운동성을 표현하고 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당연하게도, 모빌은 스스로의 운동성으로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런데 스태빌도 다른 방식으로 운동성을 야기합니다. 오른쪽의 스태빌--La grande vitesse, “거대한 속도”--은 앞, , 좌우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면 이 작품을 온전히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품을 한 바퀴 돌아야겠지요.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즉 가만히 있는 스태빌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칼더의 작품은 외향성은 활동성이고 내향성은 비활동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줍니다. 모빌과 스태빌의 진짜 차이는운동정지의 차이가 아니라 움직이게 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내향적인 로자와 외향적인 마틴의 차이도 활동성과 비활동성의 차이가 아니라 활동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움직였습니다. 공동체를 사는 우리가 서로를 움직이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모빌로도 스태빌로도, 내향적 존재방식으로도 외향적 존재방식으로도, 침묵으로도 말로도, 가만히 함께 있음으로도 더불어 나아감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제야 12년 전 새길에 처음 왔을 때 왜 그렇게 제 마음이 편했는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새길은 제게 '보이스카웃'이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와 같은 내향적 자매형제들이 편안함을 느끼며 활동할 수 있고, 또한 탈-귄위적, 수평적, 관계적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격려해주었습니다. 물론 공동체의 외향적 자매형제들도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역동적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내향성과 외향성이 잘 조화되어 있는 새길은 모빌과 스태빌이 잘 어울려 있는 미술관 같은 공동체입니다. 그런 새길에서 로자 같고, 마틴 같고, 혹은 둘 모두 같은 자매형제들이 각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편안하게 어울려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새길의 자매형제들이 각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 사귀고,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서 배울 때, 더욱 창의적이고 조화롭게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기를 응원합니다!


랍비 주시야의 말입니다"내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너는 왜 모세처럼 살지 못했느냐?' 라고 묻지 않으시고 '너는 왜 주시야답게 살지 못했느냐?' 물으실 것이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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