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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대상1: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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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우택 목사 |
참고 : | 한샘교회 http://hansaem.org |
그리스도인의 가문 대상1:1-42
2003. 5. 4. 어린이주일)
오늘은 우리 한국의 교회들이 다함께 지키고 있는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는 5월에는 두 번째 주일에는 '어버이 주일'로 지키고, 또한 가정과 관련된 설교와 행사를 주로 합니다. 우리 교회도 5월에는 주로 가정과 관련된 주제를 설교하고 가르침으로 성경적인 원리를 확인하고 적용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저희 교회에서는 첫 번째 주일에는 자녀교육에 대한 문제, 두 번째 주일에는 부모공경과 우리 위의 사람을 공경하는 문제, 세 번째 주일에는 부부관계나 결혼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며 성경적인 원리와 실제적인 방법론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가족들과 함께 교제하며 한 가족됨을 확인하는 가족 체육대회를 함께 가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5월이 되면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등을 지키며 가정의 문제를 이슈화하여 여러 각도에서 자녀교육과 부모공경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지기도 합니다. 이 일은 가정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는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일 가운데 하나가 주일학교 교육과 기독교적인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할 수 있는 헌신된 일꾼이 적다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하며 좀 더디기는 하지만 차근차근 준비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 저희 교회의 주일학교 유, 초등부와 중, 고등부 교육, 그리고 대학, 청년부 교육을 위해 많이 기도하며, 한평생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1. 역대기는 어떤 책인가?
그런데 아마 여러분들이 오늘 설교본문으로 선택한 역대기상을 보고 우리 목사님이 왜 이 본문을 선택하였고, 이것이 어린이주일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본문은 어린이주일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본문을 연구함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우리의 뿌리를 제대로 이해함으로, 지금 현재 어려움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만 한다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작정과 그의 이상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역대기를 읽으면 우리와는 아무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지루하게 역대상 1-9장까지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문화권에서 아주 익숙한 일종의 족보입니다. 족보는 한 종족이나 가족의 계보를 말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계보는 누구의 족보일까요? 저는 우리 가족들이 이 계보에 기록된 수많은 이름들을 읽으면서 이들이 살았던 시대와 활동들이 머리에 영화나 TV의 영상처럼 연상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다수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지?" "처음 들어보는 사람인데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의 이름이 왜 여기에 기록되어야 하지" 하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역대상 1-9장을 "성경의 수면제"(Scriptural Sominex)라고 불렀을 정도로 재미없고 지루한 책으로,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의미를 주지 못하는 책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다시 성전건물과 제사와 관련된 긴 내용과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나오는 내용들이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을 보고 다시 책을 덮어버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오늘 설교본문으로 선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 역사를 읽음으로 우리 신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였고, 다음으로는 이번 달 우리 교회의 QT교재인 「복 있는 사람」의 성경본문이 역대상이기 때문에 흥미있게 이 책을 읽도록 방향을 잡아주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역대기가 맨 뒤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난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몇 가지 있습니다만 역대상 29:7에 보면 성전 건축을 위하여 백성들이 바친 헌물의 단위를 표시할 때 일부를 '다릭'(darics)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다릭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지어진 동전입니다. 이 동전은 주전 515년 이전에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동전이 유다에서 통화의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후의 기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한 해는 주전 516년이기 때문에(스6:15-18) 이보다 훨씬 뒤에 역대기가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역대기가 기록되었을까요?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기록된 내용을 다시 반복하는 듯한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관점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역사를 기록할 때도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데이비드 하워드(David M. Horward Jr.)는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미국 대통령의 전용 도서관에는 수없이 많은 자료들이 있으나 리차드 닉슨이나 지미 카터에 관한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에 대하여 써야 할지 불가피하게 자료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관점에 따라 기술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먼 나라까지 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쓴 논문이나 글들을 보면 우리 나라 역사에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보는 관점에 따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역대기 저자는 그 이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전체 역사자료를 살펴보면서 독특한 관점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였습니다.
이것은 열왕기서와 비교하면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열왕기서는 "우리가 왜 바벨론 포로라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실패하셨는가?" 이러한 회의를 가진 당시 백성들에게 답을 주기 위하여 열왕기서를 썼습니다.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경고한 대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역사를 해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다른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여 바벨론 포로생활을 경험하였고, 이제 그 벌을 받고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미래는 암담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고 사랑하시는가?"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과 맺은 언약관계는 여전히 유효한가?" 등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역대기서의 기록목적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고, 변함없이 너희들과 맺은 언약은 유효하고, 너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나를 버리지 않으면 나는 절대로 너희를 버리지 않는다. 너희는 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2. 이 계보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는가?
우리가 알다시피 역대상 1-9장에 기록된 계보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계보를 자세히 보면 아담부터 구약시대의 전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계보는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담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역대상 1:1-4을 보십시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 야벳" 이 사람들은 구약의 창세기 1장부터 9장까지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아담으로부터 지금 세상의 수많은 인류들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특히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오늘날 전 인류의 계통이 나왔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여 바벨탑을 쌓음으로 이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역대기 사가는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오늘날 전 인류가 어떻게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5-7에 보면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디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다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더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이름이 그들이 사는 지명이 되었습니다. 역대기 사가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야벳의 가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보면 그들의 이름과 지명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야벳의 아들 고멜은 오늘날 마게도니아 지역인데,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등의 지명입니다. 야완은 오늘날의 터어키이고, 두발은 시리아, 디라스는 이탈리아 지역입니다.
그리고 역대상 1:8-16에 보면 함의 가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요,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세상에 처음 영걸한 자며,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으니 블레셋 족속은 가슬루힘에게서 나왔으며,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라." 여기에 구스는 오늘날의 이디오피아, 미스라임은 이집트, 붓은 리비아, 가나안은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다음으로 셋의 가문은 역대상 1:17-23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과 우스와 훌과 게델과 메섹이라.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고 에벨은 두 아들을 낳아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때에 땅이 나뉘었음이요. 그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이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웹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에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욕단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셈의 아들의 이름이 역시 당시의 지명으로 나타났는데, 엘람, 앗수르와 아르박삿은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이고, 룻은 오늘날의 터어키 지역입니다. 이것이 이미 고고학적인 작업을 통하여 성경학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세계의 전 인류의 계통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아담의 후손 가운데 특별히 한 계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인류의 계통 가운데서도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셈의 계열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24-28에 보면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아브람 곧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드디어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이 아브라함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담의 후손이면서,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셈의 후손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대기 사가는 아브라함의 가문에 태어난 아들의 가문을 다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29-33을 보십시오. "이스마엘의 세계는 이러하니 그 맏아들은 느바욧이요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라 이스마엘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의 첩 그두라의 낳은 아들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요 욕산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요,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그두라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읽어서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이삭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여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고,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고 난 후에 다시 아내를 얻었는데 그 아내의 이름이 그두라입니다. 그두라에게서 난 아들이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수아 등입니다(참고 창25:1-4).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스마엘이나 그두라의 자손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아닙니다.
다시 역대기 사가는 아브라함의 계열에서부터 나온 아들 이삭의 가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역대기 1:34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으니 이삭의 아들은 에서와 이스라엘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역대기 사가는 이삭의 두 아들 가운데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아들인 에서의 가문을 역대상 1:35-54에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역대기 사가가 아담부터 노아, 노아에게서 나온 아들 가운데 셈, 셈의 계보에서 나온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자녀들 가운데 이스마엘과 후처 그두라에게서 나온 아들이 있었지만 이삭에게 초점을 맞추고, 이삭에 에서와 야곱이 있었지만 야곱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사실 저는 오늘 역대상 1장만 읽었지만 2장부터 보면 역시 야곱에는 열 두 아들이 있었고, 그 열 두 아들 가운데 유다 계통을 통하여 다윗 왕을 나오게 하시고, 다윗의 후예로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역대기 사가는 이러한 계보를 통하여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담에게 연결시키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기 사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뿌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계열 속에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역대기 사가는 역사를 보는 앵글(angle)을 전체 큰 원에서 좀 더 작은 원으로, 좀 더 작은 원에서 더 작은 원으로 이동하면서 역사의 가장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하나님의 가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역대기 사가가 당시의 독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밝히는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들이 당시에 역사에 대한 회의를 가지며 질문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질문한 내용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고 사랑하시는가?"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는 여전히 유효한가?" 등의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을 주기 위하여 이 계보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질문한 것처럼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언약은 불변하며, 계속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고, 그들을 통하여 작정하신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인류들이 여러 계통으로 나뉘어져 왔지만 그 가운데 너희는 아담과 셈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의 계열에 서 있는 특별한 혈통을 가지고 있고, 이 관계는 너희들이 버리지 않는 이상 계속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상황만 보고 낙심하지 말고 너희들이 당장 어떤 결과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언약의 말씀에 따라 다윗에게 약속한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택하신 목적처럼 이들을 사랑하고,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며, 다윗에게 약속한 나라를 이루어 주셨을까요? 제가 이 설교를 처음 시작할 때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원래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에는 맨 마지막에 역대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계보는 신약성경 맨 처음에 시작하는 계보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은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이지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래서 복잡하고, 성경의 수면제라는 별명이 붙은 이 계보는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하나님의 장엄하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다윗에게 약속한 나라를 건설해 가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보는 우리 구원의 계통을 보여주는 구속사요, 우리의 뿌리와 가문을 계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한시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범죄한 이후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아담과 셈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가문에 속한 자이며,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상속자입니다. 이 일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과 같은 혈통의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와 같은 신분의 차별이 없고, 남자나 여자와 같은 성별의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가문의 일원이며,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이며,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가 속한 가문의 영광입니다.
3. 이 계보를 소개하는 실제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계보를 소개하고 있는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의 많은 민족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고, 언약관계가 유효하기 때문에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산다면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백성이라는 독특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산다면 그 미래가 한없이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역대기 사가가 1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담의 계보에 보면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가운데, 야벳과 함의 자손도 있고, 아브라함의 아들들 가운데 이삭만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그두라의 자식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자손들 가운데 야곱만이 아니라 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셈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계열을 선택하셨지 다른 함과 야벳과 이스마엘과 그두라의 자식들을 선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들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이삭의 두 아들 가운데 첫째가 에서고, 둘째가 야곱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습니다. 그가 장자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약속은 이삭의 후손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 때문에 이 약속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행동을 히브리서를 쓴 무명의 저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면서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12:16)고 하였습니다. 그는 오늘날로 만하면 한 그릇의 식물이나 세상에 속한 돈이나 명예와 같은 작은 이익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뿌리가 하나님의 가문에 속하여 있고,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으로 위하여 선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어릴 때 저의 어머니가 자주 저를 보고 밀양 박가의 장손이며, 양반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듣고 자랐습니다. 그 때 저는 생활은 가난하고 힘들었는데 양반이라는 신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곤 했었습니다. 실제 어머니가 제 가문을 소개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어렵더라고 우리 가문은 일반 가문하고는 다르기 때문에 가문에 누가 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가문이 양반의 가문이고 특별한 가문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면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역대기 사가가 이스라엘의 가문을 소개하고, 그들의 뿌리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실제적인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칭 신자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가문이 하나님의 가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돈과 권력과 지식만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며, 윤리적으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돈과 권력과 지식으로 가문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 인격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돈과 권력을 가지게 되면 비도덕적으로 천박하게 돈과 권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또한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추지 않고 교육을 받고 학위를 받으면 교만하고 거만해 질뿐만 아니라,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는 위장술만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일뿐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저의 가족들과 함께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습니다. 유동근, 정준호, 김정은이 나오는 이 영화의 중요한 줄거리는 한 조직폭력배 가문에 외동딸을 서울대 법대 출신의 지식인과 결혼시켜 가문을 빛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사랑의 한 테마를 이루기는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 지식과 돈과 권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윤리적으로 합당한 인격과 삶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졸부요, 졸장부요 천박한 지식인일 뿐입니다. 그들의 미래는 잠시 반짝 빛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한 여름 밤의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문에 속한 사람은 다릅니다. 제가 지금까지 포로생활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뿌리가 하나님과 아담과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과 연결시키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킨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가문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면, 때로는 현실적으로 약속과 현실이 갭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아름다운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가문에 속한 우리 신자들은 영원히 그의 삶이 지속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께서 지상에서도 높이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가문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산다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주셨던 영광을 주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으면서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독특한 정체성을 인식하고 감사하면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신분에 맞는 예절을 가르치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훈련하고 교육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의 미래를 아름답게 가꾸어 주실 것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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