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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8:1-4, 1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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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승남 목사 |
참고 : | http://www.baekseokchurch.kr |
예수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마태복음 8:1-4, 14-17
오래 전에 어느 전도사가 시골교회로 부임하여 기도회를 하려고 성도들을 소집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할머니 한 분뿐임을 알았습니다. 너무나 실망하여 기도하는 것도 포기하려고 하는 데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우리 교인은 한 명이 아닙니다. 다섯 명입니다.'
'할머니 지금 할머니 한 분밖에 교인이 없잖아요?' '전도사님. 아니에요. 우리 교인은 다섯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나 그리고 전도사님이지요. 기도하십시다.' 이 말에 전도사님이 큰 용기를 얻고 열심히 기도하여 큰 목회자가 되었답니다. 주위 종은 성도들이 키웁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문등병자를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보실수 있습니다 (1-4절)
예수님께서 본문의 사건은 산상설교를 마치고 오시는 길에 나타났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니' 산상설교의 긴 말씀을 마치시고 내려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디로 오셨습니까? 다시 일반 백성들 속에서의 사역을 위하여 갈릴리 호수 근처의 낮은 지방으로 내려오셨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사업이 잘될 때도 있고 망할 때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가 있는가 하면 병들 때도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허다한 무리'란 5:1절에서 나오는 '무리'보다 더 많은 숫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그의 소문이 각지로 퍼져 나가서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그의 교훈을 듣고자 예수께로 몰려왔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말의 표현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문등병는 버림받고 죽을병이라 병입니다 (격리시키고 소외시킵니다 )
나병의 특징은 처음에 작은 반정이 생기고, 그것이 썩어져 가면 더러운 고름이 나고 얼마 안 가서 눈썹이 빠지며 성대는 약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답니다. 그리고 먼저 손과 발이 썩고 서서히 온 몸에 퍼져나간다고 합니다. 나병의 발병기간은 9년으로 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3년, 자신이 알아서 3년, 다른 사람이 알아서 3년, 9년이 되어야 문둥병임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 신체의 부분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병입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머리 머리가 떨어져 나가 마침내 죽고 마는 병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은 신체적인 고통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문둥병환자로 진단이 나면 철저히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을 받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문둥병자는 미처 죽은 사람처럼 취급되었다.'고 했습니다. 중세기에는 문둥병에 걸리면 사제가 법의를 입고 십자가를 듣고, 환자를 교회로 데리고 와서 그에게 장례예식은 베풀었답니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레13:45절에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우리나라도 문둥병자들은 소록도에 격리 수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도 문둥병 환자는 예루살렘과 모든 성벽에 있는 도시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회당에는 문둥병자를 위하여 높이 3M, 넓이 2M에 별실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무섭고 끔직한 병이 문둥병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 볼 때에 다 죄에 병든 몸입니다. 죄는 문둥병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둥병은 죄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죄에 병든 자는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죽어 지옥에 갑니다.
예수님의 치료 을 받으려는 문등병자의 신앙은 용기있는 신앙입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말은 굉장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절대로 일반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 앞에 그렇게 담대하게 나올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왜? 항상 예수님 옆에는 인산 인해의 사람들이 북적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 앞에 나와 왔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의 첫걸음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끌려 왔던 습관적으로 왔던, 교회에 왔다는 사실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구원받아 살 것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길입니다. 이 저주받은 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담담히 나온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찬 287장은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여 편히 쉬리라' 예수님 앞에 나올 때 누구나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방해되는 일도 많고, 장애물도 많기 마련입니다. 가족 중에 못나가게 핍박을 합니다. 성경 야고보서 4: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또한 잠언22: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인생 삶에 여러 환경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말 못할 고민도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 못할 고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앞에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의 고민을 하나님께 진솔하게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고백한 나병환자의 신앙.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진정한 신앙은 바른 신앙고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 피를 토하듯이 자기의 온 마음과 인격을 다 바쳐서 '주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진실한 신앙고백이 성도들에게 필요 합니다 신앙고백 속에 그의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는 자기의 뜻보다는 먼저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 '원하시면'이란 말은 간단한 말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 내 병을 고치고 싶습니다. 정말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의 뜻이라면' 이런 뜻이 들어 있는 그런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사정이 있고,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 문제가 우선이고, 급한 것이지 남의 뜻을 생각해 보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문둥병자는 남을 생각할 만큼 여유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는 돈도 없고, 그 병을 고칠만한 조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집에서 버림받고 친구에게도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매일매일 고통 속에서 손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떨어져 나가는 추악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남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주님이 원하신다면,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은 배워야 합니다. 내 뜻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뜻을 물어 봐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내 병을 고쳐주십시오' 얼마나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입니까? '주님이 원하시면' 이 말은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시면 나는 이 병으로 죽어도 좋습니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안 고쳐 주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나는 안 하겠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지 않을 것을 안 할 용기가 있습니까? 포기할 용기가 있습니까? 또 주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까? 이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⑹'원하시면'이라는 말속에는 확실한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무엇을 느낍니까?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능력이 그 기적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믿는데서 능력이 나타나고, 믿는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그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3절에서 역사를 일으킵니다.
예수님 말씀 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문둥병자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이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안수하십니다. 그 끔찍하고 더러운 문둥병자에게 그 거룩하시고 깨끗하신 주님의 손을 대어 안수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나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고 안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랍비들은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썩어 문드러진 그 몸에 손을 대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더러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대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하신 것이며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예수님의 치료 하신부 당부하시는 말씀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세상 사람들 같으면 광고, 선전을 많이 하라고 난리 법석을 할 텐데, 우리 주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인 광고는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그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의사를 겸직했습니다. '모세의 명한 대로' 모세를 율법의 대표자로 봅니다. 이 말씀은 '율법대로 살아라!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드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마6: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께 마음 깊은 감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눅17장은 10명의 문둥병자가 다 치료함을 받았는데 아홉은 뿔뿔이 자기의 길로 갔지만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주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해야 할 성도가 감사하지 않으면 주님이 찾으십니다.
⑸'증거 하라!'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요4장에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자마자 자기가 살던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전도는 성도의 사명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유언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하면 됩니다.
마태복음 8장(14-17)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예수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산상 부흥회를 마치시고 내려오셔서 행하셨던 능력 가운데 그 세 번째 치료의 능력을 보이신 사건입니다. 첫 번째는 한 문둥병자를 고쳐주셨고, 두 번째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베드로의 집에 가보니 그의 장모가 와 있었는데 열병으로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막1장에서도 눅5장에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주님이 손을 대니 그의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마9:20절을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어느 날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그곳으로 지나가시는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 여인은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2년 동안 고통을 주던 혈루증의 근원이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비율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이나 몸에 손을 댄 경우보다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손을 대신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는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으신 경우가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양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인간 실존의 현장을 찾아다니시면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주시고, 속상할 사람은 위로해 주시고 우는 자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14절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로 시작이 됩니다.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의 해변가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몇 가지로 말을 합니다. 베드로가 초청했을 것이다. 예수 께서 일정한 거쳐가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집에 자주 가셨을 것이다. 요즘 말하는 심방을 가셨을 것이라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제자들과 같이 동행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집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의 장모가 그 집에 와 있었습니다. 모시고 사는지 아니면 잠깐 다니려 오신 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베드로가 장모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결혼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을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주장하면서 모든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하고 독신 제를 주장하며 또 교황의 무오 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을 보면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천주교의 주장을 무색케 하고 있습니다.
고전9:5절에서도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여기 바울의 편지를 보더라도 베드로가 결혼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결혼을 부인하려고 천주교는 크나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님의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열병은 급성 적인 병의 일종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장질부사에 걸렸다.'는 그 말입니다. 장질부사에 걸렸으니 그 가정이 얼마나 큰 시험과 고통이 있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제자요 위대한 사도의 가정에도 이런 어려움이 닥쳐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목사의 가정에도 장로의 가정에도 권사나 집사 님들의 가정에도 이런 질병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귀한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시고'입니다. 누가 보셨습니까? 주님이 그녀의 열병을 보셨습니다. 보는 것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집니다. 제자들도 그의 열병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열병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보셔야 합니다. 우리의 사정을 주님이 보셔야 합니다. 보시면 해결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기 '보시고'는 그 집에 들어서는 즉시 주님이 목격하셨음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즉 주위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그녀의 안타까운 사정을 목도하셨습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누가 누구의 손을 만졌습니까? 주님이 베드로 장모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손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단순히 도구나 만들고 악기나 연주하고 그림이나 그리고 음식이나 나르는 그런 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은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임을 믿습니까? 확실히 믿습니까? 의심하면 불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확실히 믿는 사람이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능력의 손! 고치시는 손! 치료의 손입니다. 소경의 눈에 손을 대시면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손을 대시면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막5:35절 이하를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니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의 손이 닿는 곳엔 기적과 고침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신5:15절을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시37: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주님의 손은 능력의 손이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위로 올라가는 힘입니다. 안으로 파고드는 힘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뻗는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위로 올라가는 힘이며, 우리의 심령 속으로 파고드는 힘이며, 온 세계와 우주로 뻗어나가는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신 힘이며, 최강의 힘입니다.
축복의 손입니다. 창1:22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눅24:50절에서도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마14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 주님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5천명을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마14:20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을 때도 그때도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제자들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주님의 손으로 넘어가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니' 다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차고 넘치는 축복이 왔습니다. 이 축복은 보나마나 그 어린아이 몫일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축복은 일어납니다. 주님 손에 얹어 놓으십시오, 주님이 축사하시면 지금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축복의 손길에 붙잡히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손은 심판의 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손은 피 묻은 사랑의 손이며, 고치는 손이며, 또한 축복의 손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징계하시는 심판의 손이기도 합니다. 신2:15절에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또 욥19:21절에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여기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여기서 말하는 치셨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던 모세의 경우에도 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주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고 손에는 철창을 들고 만국은 통치하시며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림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예수님은 심판 주로 오셔서 죄인을 벌하십니다. 이상으로 주님의 손은 위대한 손입니다.
본문 15절은 열병으로 고생하던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의 손에 닿는 순간 열병이 떠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주경학자 크리스소톰은 '그녀는 열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완전한 회복까지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정치도 열병을 앓고 있고, 사회 구석구석이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약이 필요합니다. 15절에서 그 약은 '손을 만지시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만져주셔야 합니다.
우리 인생살이에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모세는 그때마다 기도했습니다. 홍해가 가로막을 때에도 기도했고, 마라의 쓴 물을 만나서 백성들이 원망할 때도 기도했고,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마를 때도 기도했고 아말렉이 공격해온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기도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우리들도 남이 아는 문제가 있고, 남이 모르는 문제가 다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천국에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많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우리도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기를 항복시키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약하고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을 항복시키고 기도하면 강해지고 한계를 뛰어넘어 큰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약한 사람이 강해지는 비결이 기도에 있습니다. 무능한 사람이 능력의 사람이 되는 비결도 기도에 있습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 더 넓고 더 높은 세계를 보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이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하면 모든 악의 세력은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기도의 손을 들 때에 아말렉은 물러갔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걱정 근심 염려, 두려움은 물러갑니다. 기도하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시험과 문제는 물러갑니다. 기도하면 홍해도 갈라지고 여리고도 무너지고 쓴 물은 단물로 바꾸어집니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 항복하고 기도에 매달렸더니 질병이 물러가고 15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항복하고 기도하면 원수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줄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에게 오는 이 모든 적을 하나님이 물리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떠한 문제 앞에서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손을 들면 넉넉히 감당하고 적은 물러가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은혜 받고 능력 받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 되고 무지한 사람이 지혜로워지고 방황하던 사람이 새 비전을 갖게 되고 맡은 일을 잘못하던 사람이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됩니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는 기도하여 능력 받아 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폭력배 두목이었던 김익두가 기도하여 능력 받아 대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능하다. 가진 것 없다. 배운 것이 없다. 돈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타령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받고 싶은 만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분량만큼 그릇 만큼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도하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늘 창고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저축이 많이 되어 있으면 때가 되면 찾아서 쓰게 됩니다. 여러분 저축이 무엇입니까? 앞날을 위하여 오늘 쌓아두는 것입니다. 기도는 저축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저축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시28:2절에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이제 본문의 베드로의 장모를 보세요!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드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그 여자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그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여기 '수종드니라'는 말은 쉽게 표현하면 '봉사했다.'는 말입니다. 봉사는 구원 얻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요 행위입니다. 말씀으로 귀신을 쫓으신 예수님! 소문을 듣고 어떤 무리들이 많이 왔습니까? 귀신들린 자, 병든 자들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막1:34절에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다 고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능력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했던 그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그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터넷설교기념관 http://koreacts.com (한국교회 설교기념관)
백석교회 http://www.baekseokchur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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