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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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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경일 형제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44662 |
안녕하세요?(갈6:2)
2013년 10월 6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2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정호승, "수선화에게"
시인은 외로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공감합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입니다. 하지만 만약 외로움이 삶의 전부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스산하고 황량할까요? 가끔 외로워야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 언제나 외로우면 삶이 너무 괴로울 겁니다. 그래서 마더 테레사도 외로움을 "가장 끔찍한 빈곤"이라고 했던 것이겠지요.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시간은 언제일까요? 낯선 곳에 홀로 있을 때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낯익은 곳에 가장 가까운 사람과 함께 있지만 자기의 고통을 나눌 수 없을 때 우리는 가장 외롭습니다. 가정과 일터와 공동체에서의 가장 일상적인 시간에 우리는 가장 외로울 수 있습니다.
공동체인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납니다. 아마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자주?그것도 정기적으로?만나고 있을 겁니다. 그런 공동체의 친구요 자매형제인 우리가 서로의 아픔과 힘겨움을 나누지 못한다면, 함께 앉아 예배 드리고 있는데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일요일 오전 11시 30분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시간일 것입니다.
예수 공동체는 ‘영적 친구들’의 모임입니다. 친구는 서로의 기쁨만이 아니라 서로의 슬픔도 알아차리고 반응하며 함께 나눕니다. 서로의 즐거움과 괴로움,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 빛과 어둠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친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한 우애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지 알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서로의 짐을 져줄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다시 두 가지 물음으로 더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나는 내 짐을 공동체의 자매형제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둘째, “남의 짐을 져 줄만큼 내게 힘이 있는가?"
어쩌면 남의 짐을 져 주는 것보다 남에게 내 짐을 보여주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내 고통을 남과 나누는 것이 편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그럴수록 외로움이 더 커집니다. 나만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홀로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삶을 견뎌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모든 사람이 고통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그런 가장 보편적인 경험을 가장 가까운 친구와 나누지 못할 때 우리는 외로워지고, 그것이 고통을 더 깊게 합니다.
친구들에게 고통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나눔 속에서 우리의 우애가 깊어집니다. 레오나드 코헨은 노래합니다. “모든 존재는 깨어진 틈을 가지고 있고, 빛은 그 깨어진 틈새로 들어 온다네.” 깨어진 틈 같은 아픔, 부끄러움, 괴로움을 나누며 서로의 짐을 져 줄 때, 은총의 빛이 우리의 삶으로 들어 옵니다. 외로움과 외로움이, 고통과 고통이 서로를 비추며 서로를 치유합니다.
그 빛이 너무 밝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너무 밝아서는 안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친구에게 너무 밝은 빛은 위로가 아니라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의 밝기,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이면 충분합니다. 우리의 ‘친절함’이 작은 촛불 빛 같은 ‘친밀함’을 통해 부드럽고 따뜻하게 표현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자기의 짐을 편안히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선한 의지로 남의 짐을 져 주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은 고통 받는 사람을 가르치고 충고하고 고쳐주려는 태도입니다. 마치 '선생'처럼 길을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더 필요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빠져나갈 길을 가르쳐 주는 선생보다는 그 어둠 속에 가만히 함께 있어 주는 친구입니다.
미국의 사회교육 운동가이며 퀘이커 영성가인 파커 파머는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사회적, 영적으로 존경받던 그였기에 더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를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은 약물도, 심리치료사도, 조언자도 아닌, 말없이 함께 있어 준 친구 빌의 우애였습니다. 빌은 매일 오후 4시에 파커를 찾아와 말없이 발을 마사지해줍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말을 건네줍니다. “오늘 자네가 얼마나 힘든지 느낄 수 있네.” “오늘은 자네가 어제보다 좀 더 강해진 것 같아. 참 다행이야.” 그 경험을 파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빌은 아무런 충고도 해 주지 않았다. 때때로 그가 느낀 것을 말해 줄 뿐이었다. ...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의 발바닥 마사지가 나를 다른 사람들과 계속 연결되게 해 주었다."
파커와 빌의 우애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예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당황해서 예수를 말리려는 베드로에게 예수가 말합니다. “내가 당신의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당신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됩니다.” (요한 13:8) 이 이야기는 공동체 안의 겸손과 섬김만이 아니라 상관성과 우애의 의미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여주기 싫은 발 같고, 발바닥 같은 서로의 고통을 씻어주고 어루만져줄 때 우리는 서로 상관이 있는 친구가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애의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우리가 서로 짐을 져 주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안의 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서로의 짐을 져 주라고 했을 때, 그가 뜻한 것은 서로의 짐을 “바꿔” 지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짐을 진 채 남의 짐도 져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내 짐도 무거운데 남의 짐까지 져 주다가는 내가 먼저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비로운 것은, 남의 짐을 져 줄 때 내 짐도 가벼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전 군대 시절 야간 산악행군을 할 때 겪은 일입니다. 그날 낮에 유격훈련을 받은 후 몸이 너무 아팠습니다. 밤이 오자 열이 펄펄 나고 머리도 어지러웠습니다. 그래도 꾀병을 부린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물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가누며 산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함께 걷던 동료 하나가 가쁜 숨을 헉헉거리며 너무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마음과 힘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의 군장을 빼앗듯이 벗겨 제 가슴 쪽으로 둘러매고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제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비할 것도 신기할 것도 없습니다. 아마도 제 몸 안에 막혀 있던 기운이 몸이 움직이면서 풀렸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신비현상'이 아니라 단순한 '신체현상'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때의 경험은 남의 짐을 져 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을 때마다 생각납니다.
저의 경험이야 별 것 아니지만,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아파하는 사람들, 자기 짐도 무거운데 남의 짐까지 기꺼이 져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볼 때면 신비를 느낍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오랫동안 씨름해왔지만 여전히 풀고 있지 못한 신비는 왜 전지전능하고 전적으로 선하신 하느님이 세상에 고통과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이토록 악한 세상에 왜 선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 더 신비롭게 여겨집니다. 자기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의 고통을 없애려고 애쓰는 선한 이들의 존재가 더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런 신비를 가장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이는 예수입니다. 예수는 그 누구보다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겠습니까? 겟세마네 숲의 어두운 밤, 예수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기도합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설령 죽는다 해도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예수입니다. 이때 예수를 괴롭힌 것은 하느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 3:17)이라고 하셨던 아버지 하느님이, 예수가 가장 당신을 필요로 하는 때에 아무런 반응도 응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후에도 그랬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을 견디다 못한 예수가 절규하며 묻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그래도 하느님은 끝내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
하느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 당신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괴로워하며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왜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하셨을까요? 프레드릭 뷰크너는 말합니다. “하느님은 답을 주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당신을 주신다.” 세상 죄를 진 예수의 괴로움이 너무 컸기에, 하느님은 멀리서 충고하듯, 가르치듯 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대신 예수와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와 하나 되어, 예수의 모든 고통을 당신의 몸으로 온전히 겪으셨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하느님도 외로워하신다"고 했지요.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느님도 괴로워하신다"고. 예수의 괴로움은 하느님의 괴로움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예수는 깊은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하느님을 다시 '아버지'라고 부르며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 23:46)
"세상 죄를 진 어린양 예수"와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의 가슴 미어지게 하는 이 사랑이 그리스도교의 기원입니다. 오랫동안 세계종교를 연구해왔지만 신과 인간의 사랑을 그리스도교만큼 이토록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보여주는 종교전통은 또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저질러온 수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저를 계속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연결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서로의 짐을 져 주는, 서로의 십자가를 져주는 격정적 사랑입니다. 이 격정적 사랑이 그리스도교의 기원이라면 사랑 없는 그리스도교는 테리 이글턴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의 기원을 배반한 자기모순적 종교일 뿐입니다.
새길은 하느님과 예수의 격정적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체험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민감하게 느끼고 서로의 짐을 져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의 짐을 져 주는 우애를 너무 비장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즐겁게 서로 사귀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예수의 사랑에도 서로를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부르며 사귀는 친밀함이 있었습니다. 공동체에 이런 친밀한 사귐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서로에게 자기 짐을 보여 주고 서로의 짐을 져 줄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로 사귐은 서로의 짐을 져 주며 돌볼 힘이 생겨나게 해 줍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사랑은 수고를 가볍게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30)고 하신 것도 사랑이 있으면 멍에도, 짐도, 십자가도 가볍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찰과 변화의 계절에 새길이 추구하고 있는 ‘서로 돌봄’과 ‘서로 배움’의 수고를 가능하게 하고 가볍게 하는 힘도 영적 친구들의 ‘서로 사귐’과 사랑에서 생겨날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체의 영적 친구들이 서로 사귀는 우애는 제도의 길이 아닌 마음의 길입니다. 우애는 제도와 규칙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애를 간섭하고 통제하는 정부는 없습니다. 우애는 무정부적입니다. 우애는 부드러움, 따뜻함, 자유로움, 자율성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자라납니다. 그런 관계는 매우 단순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서로의 안녕을 진심으로 묻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일주일 동안 열린 참여불교 심포지엄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수 백 명 참가자 중에 그리스도인은, 아마도, 저 혼자였고, 외국인도 몇 명뿐이어서, 외로움을 더 느꼈습니다. 그런데 전에 한 번 뵀던 불자학자 한 분을 보았습니다. 저를 기억이나 하실까 싶어 인사도 못하고 있는데, 그 분이 저를 보고, 다가와, 멈춰 서서 물었습니다. “How are you, Kyeongil?” 미국 문화에서 How are you?는 정말 어떻게 지내는 지, 안녕한지 묻는 게 아니라, 스쳐 지나가며 영혼 없이 하는 인사말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는 그가 정말 제가 잘 지내고 있는지를 진심으로 묻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마치 제가 그의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자신의 전 존재로 저의 안녕을 물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넘나드는 제 영적 모험의 한 안내자요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선근 형제님께 해 드렸더니,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사람이 만나면 인사를 하지요. 인사는 정말 내 깊은 속에서 저 깊은 속으로 들어가 그 동안 참 안녕했느냐고 그걸 물어야 참 인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사는 그저 사람 만나면 으레 인사를 해야 한다는 식이에요. 그런 인사는 참 진실한 인사가 아니에요."
나의 깊은 속에서 너의 깊은 속으로 들어가 안녕을 묻는 것, 바로 거기에서 서로 사귐이 싹트고, 그 우애의 싹에서 서로의 짐을 져 주는 서로 돌봄과 서로를 성숙하게 하는 서로 배움의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짐을 져 주면서 서로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옆에 함께 앉아 있는 자매형제에게, 하느님 나라의 시민인 서로에게 온 마음, 온 존재로 안녕을 물으며 인사할까요?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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