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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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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05238762 |
2010년 5월 9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가복음 1장 35절
설교제목 : 수도하는 영성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마가 1:35).】
<수도교회 이름 이야기>
교회를 개척할 무렵 교회 이름에 대한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름들을 떠올리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이 ‘수도교회’(修道敎會)였습니다. 그런데 ‘수도교회’라는 명칭에 대해서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이미 수도교회라고 이름 지은 교회들이 몇몇 있었고, ‘수도’라는 말이 대개는 “한 나라의 통치기관이 있는 정치적 활동의 중심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수도교회(修道敎會)를 수도교회(首都敎會, Capital Church]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아름다운 우리말로, 혹은 예쁜 꽃이름으로’ 교회 이름을 지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충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는 ‘수도교회’(修道敎會) 이외에 어떤 이름도 고려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의 진리를 닦는 삶 이외의 어떤 삶도 궁극적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없는 입장이었고, 그리고 이와 아울러서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적인 삶(공생애, 公生涯)은 ‘목회’(牧會)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수도원 이야기>
며칠 전 이민재 목사님의 설교문(숨빛 향기)을 보니, 수도원에 대한 개념을 좀더 폭넓게 하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수도원’이라고 하면, 어느 외딴 시골에 세워져 있는 조용한 수도원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목사님께서는 그런 공간적 수도원 개념을 기본으로 해서 좀더 다채로운 수도원 개념을 폭넓게 창안하셨습니다. 정말 좋은 시도라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 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먼저 이 목사님의 설교문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수도원이나 기도원에서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만일 수도원이 ‘하나님을 향한 열망의 결정체’를 뜻한다면 그렇고, 단순히 장소나 공간을 뜻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을 열망하는 곳이라면 모든 곳이 수도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살면서 발견한 수도원이 셋 있습니다. 시간의 수도원, 관계의 수도원, 삶의 수도원이 그것입니다. ‘시간의 수도원’이란 일상의 시간들 속에 하나님을 만날 밀실과 하나님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는 것을 뜻합니다. ‘관계의 수도원’은 내가 만나고 관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적소(適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의 전’이라는 말을 썼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이나 ‘그리스도의 형상’ 같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말이니 사람과의 관계만큼 하나님 찾기에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관계를 수도원으로 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모든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고, 정성과 성의를 다해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신성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을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로 ‘삶의 수도원’이란 삶의 사건들, 현실들, 상황들, 경험들, 아니 삶 자체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삶을 떠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삶의 토대요 뿌리니까요. 영성이란 세상을 등지거나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용돌이 치는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을 수도원으로 보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현실도 도피하지 않고 끌어 안습니다. 진정한 삶의 긍정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결국 영성을 추구하는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은 시간 속에 ‘신성을 위한 여백’을 만드는 것이요, 사람에게서 ‘신성의 향기’를 맡는 것이요, 삶을 ‘신성의 원천’으로 긍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민재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분 말씀이 곧 오늘 제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다만 제 입장에서 몇 가지 차원을 수정해서 종합하자면, 이런 내용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간의 수도원, 둘째 공간의 수도원, 셋째 관계의 수도원, 넷째 사건의 수도원, 다섯째 노동의 수도원 등입니다.
저는 외람되지만, ‘공간의 수도원’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공간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과거 종교개혁자들이 ‘성(聖)과 속(俗)’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곤 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성스러운 삶의 공간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속된 삶’을 차등하려는 차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스런 삶’을 갈망하는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성스러운 공간들을 갖고 있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 성스러운 공간을 찾아가서 마음의 기도를 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건의 수도원’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인생은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시공간, 그게 인생입니다. 하나의 산을 간신히 넘고 나면, 또 거대한 산들이 몰려오는 일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건들 속에 하느님의 호흡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건들 속에, 정말 겪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사건들’ 속에 깃든 하느님의 호흡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아름다운 형상의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또 끝으로 ‘노동의 수도원’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노동이 기도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기도 합니다만, 저는 좀 다른 표현으로 “노동은 영성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신성의 존재’로 성화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노동하라.” 사람은 노동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제대로 닦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은 기도이며, 노동은 영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은 여러 가지 차원을 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육체노동, 정신노동, 가사노동, 공부노동 … 인간이 정성과 사랑을 기울여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모든 활동이 곧 노동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성과 사랑을 기울여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모든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성품을 제대로 닦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 수도원’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마가 1:35).】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그분은 ‘시간의 수도원’에서, 그리고 ‘공간의 수도원’에서, 또 아울러 ‘삶의 수도원’에서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성화된 시간에, 성화된 공간에서, 성화된 삶을 살아가셨던 분이셨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수도하는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수도하는 영성’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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