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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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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06072664 |
2010년 5월 23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누가복음 10장 38절~42절
설교제목 : ‘기루는 삶’
【그들이 길을 가는데,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누가 10:38~42)】
<책 이야기>
최근 『변산 공동체 학교』(윤구병 김미선 글, 보리출판사)를 의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도시사람들은 끊임 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냅니다. 도시에 있는 건물들은 나날이 커지고, 해가 갈수록 더 아름답게 꾸며집니다. 그러나 도시 사람들은 이 크고 아름다운 건물에 만족할 줄 모르고 몇 해만 지나면 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새로 지으려고 아직 멀쩡한 건물을 헐어 버립니다. 건물뿐이 아닙니다. 오래된 것은 낡은 것, 쓸모 없는 것이라 하여 아직 쓸 만한 것인데도 내다 버리고 새 것을 사들입니다. 도시의 ‘만드는 문화’ 속에서는 몇 해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낡아 버립니다. 기술이나 제품만 낡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생각도 낡아 버립니다.
그러나 마을공동체의 ‘기르는 문화’ 속에서는 낡은 것이란 없습니다. 땅에 뭍힌 도토리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우람한 떡갈나무로 자라고, 여름까지만 해도 풋과일로 매달려 있던 사과는 가을이 오면 빨갛게 익어갑니다. 낡을 것이 없으니까 버릴 것도 없습니다. 하다 못해 사람이 몸 밖으로 내보내는 똥오줌도 다시 거름이 되어 땅을 기름지게 하고 곡식이나 채소가 자라는데 도움을 줍니다. 만들고 꾸미는 일에만 몰두하여 끊임 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 새로움을 오래 지니지 못하고 내일이면 쓰레기통에 버리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고 있는 도시 어른들 사이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심성을 지니게 될까요?혹시 자기를 낳아 준 부모도 나이가 들면 낡았다하여 헌 물건짝 버리듯이 버리려고 들지는 않을까요? 제가 대학을 떠나 농촌에서 살기로 마음 먹은 것도 따지고 보면 ‘만드는 문화’에서 벗어나 ‘기르는 문화’ 속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깊이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이 ‘만드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게 되면서, ‘기르는 문화’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인류에게 정말 큰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르는 문화’를 잃어버리면서,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을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누가 10:38~42)】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저는 예전에 이 성경 이야기를 읽을 때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약간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동생 ‘마리아’를 칭찬하셨는데, 인간행동의 윤리적 차원에서 보면 언니 ‘마르다’의 행동이 훨씬 옳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에 귀한 손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언니는 그 손님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헌데 동생은 손님 접대를 위한 일은 할 생각이 없이, 그냥 그 손님과 웃고 떠들면서 노닥거렸습니다. 이때 윤리적으로 칭찬 받아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언니입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동생은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꾸지람의 대상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동생을 칭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최근 『변산 공동체 학교』의 내용 중 ‘만드는 문화’와 ‘기르는 문화’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설교의 말씀을 준비해 봤습니다.
<성서의 해석>
손님 접대를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마르다는 이른 바 ‘만드는 문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손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마리아는 소위 ‘기르는 문화’의 사람이었습니다. 만드는 사람과 기르는 사람, 두 사람 중 누가 더 그 손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그건 당연히 ‘기르는 사람’입니다. 만드는 사람과 기르는 사람, 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건 당연히 ‘기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기르는 삶’을 통해서 두 존재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두 존재가 더 아름답고 신비롭게 ‘성화’(聖化) 혹은 ‘영화’(靈化)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르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까 몇 가지로 정리가 되더군요. “1.동식물을 보살펴 자라게 하다. 2.아이를 보살펴 키우다. 3.사람을 가르쳐 키우다. 4.육체나 정신을 단련하여 더 강하게 만들다. 5.습관 따위를 몸에 익게 하다. 6.머리카락이나 수염 따위를 깎지 않고 길게 자라도록 하다.” ‘기르다’는 말의 참 뜻은 그 모든 정의들을 기본적으로 포함하면서 좀 더 높고 깊은 차원까지 승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해 한용운 선생이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에서 “기룬 것은 다 님이다”고 했을 때, 그 ‘기룬다’는 의미는 좀더 종교적인 의미에서 ‘기른다’는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일 터입니다. 또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길들인다’는 차원의 깊은 세계를 말한 것도 역시 그 연장선일 것입니다. ‘길들여진 장미’는 그냥 예쁜 장미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스럽고 숭고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이니까요. 그리고 동학에서 이야기 하는 양천주(養天主) 사상 역시 그런 맥락에서, 즉 우리 내면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하느님의 영을 잘 ‘기룬다’는 차원에서 사색되어야할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기루는 삶’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제목, 즉 ‘기루는 삶’이란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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