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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대상6: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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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석기현 목사 |
참고 : | 경향교회 http://www.ghpc.or.kr |
레위의 아들들
역대상 6장 1~81절
석기현 목사
우리는 날마다 누리는 평범한 일상사 가운데 사실 얼마나 큰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를 잘 느끼지 못하고 살기 쉽습니다. 아내가 집에 있을 때에는 남편의 눈에 매일 같은 반찬만 해 주고 집 청소도 제대로 안 하는 것처럼만 보이지만, 그 아내가 친정 가느라고 한 일주일 쯤 없어지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자기가 평소에 아내 덕을 얼마나 잘 누려 왔는지를 남편도 알게 됩니다. 그 아내가 차려 주는 밥상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인지, 그 아내가 정돈해 주는 집안이 얼마나 자기에게 편안한 것들인지를 톡톡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이처럼 자기 주변에서 항상 누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 줄을,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때야 깨닫게 되곤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나라를 잃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여러 면에 걸쳐 바로 그와 꼭 같은 심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가 있을 때 자기들이 누리고 살던 것들이 얼마나 좋고 행복한 것들이었는지를 그제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역대기의 서두에 나오는 옛 이스라엘 선조들의 족보는 바로 그와 같은 심정이 배경에 깔려 있는 가운데 기록된 말씀입니다.
역대상·하를 기록한 선지자가 누구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말씀이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다가 해방 받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즈음에 씌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물론 옛 조국을 다시 건설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옛날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 중심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던 나라였던지를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이 역대기서를 통하여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기록된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는 그 중에서도 또 하나의 귀중한 전통을 기억해 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네 조국이 온 열국들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받은 제사장 나라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꽤 긴 장을 통하여 레위 지파의 가계와 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던 사역을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누리고 있었던 그 좋은 것, 그러나 좋은 줄 잘 모르고 지났던 것, 그러다 바벨론의 포로로 생활하던 중에야 깨닫고 다시 누리게 되기를 오랫동안 사모해 왔던 것,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며 제사장 나라가 되는 그 축복을 되새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다인들이 이 레위 지파 선조들의 족보를 상기함으로써 다시 한번 재건하고자 했던 축복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들이 매일 매주일 넘치도록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 행복함을 잘 느끼지 못하고 넘겨 버리기 쉬운, ‘오늘의 레위 지파를 통하여 받고 있는 축복’이 어떤 것들입니까?
1. 우리는 예배를 바로 인도하는 제사장들을 통하여 누리고 있는 축복을 항상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이것이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 수행했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역대상 6장 1절로 15절에 보면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도 제일 먼저 대제사장을 승계한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1절에서 3절의 말씀을 보면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 그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아들들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보면 레위로부터 시작해서 아론의 아들들까지의 족보가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주안점은 레위 지파의 첫 선조인 레위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첫 대제사장이 되었던 아론과 그 직분을 승계했던 엘르아살까지의 족보 연결에 있습니다. 이하 4절에서 15절까지는 그 엘르아살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절 끝에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갔었더라」고 기록된 대로, 유다가 망하게 될 때 마지막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사닥까지의 제사장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기록을 참고해서 살펴보면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의롭고 충성스러운 제사장들도 있었고 또 악하고 불충한 제사장들도 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49절 이하 53절에 보면 또 하나의 제사장 족보가 나타납니다. 「아론과 그 자손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제사를 드리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모든 명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 / 아론의 자손들은 이러하니라 그 아들은 엘르아살이요 그 아들은 비느하스요 그 아들은 아비수아요 / 그 아들은 북기요 그 아들은 웃시요 그 아들은 스라히야요 / 그 아들은 므라욧이요 그 아들은 아마랴요 그 아들은 아히둡이요 / 그 아들은 사독이요 그 아들은 아히마아스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제사장의 이름들은 앞에 나왔던 3절 이하에 기록된 제사장의 족보에 이미 나타났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3절에서 8절까지에 기록된 이름들, 즉 아론으로부터 다윗 시대의 제사장이었던 아히마아스까지 이 열두 명의 제사장들만 특별히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역대상을 기록한 저자는 꼭 같은 이름들을 두 번 반복했겠습니까?
그것은 그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그 직분을 제대로 수행했던 모범적인 시대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사장 계급에서 많은 타락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분열 왕국 이후와는 구별되는 시절, 즉 첫 대제사장 아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영적 전성기였던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신앙의 순수성이 보존되었던 시절의 제사장들만 여기서 따로 언급한 것입니다. 아까 3절에서는 아론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었던 네 명의 이름들을 다 기록했지만, 여기서는 그 중에서도 제사장의 정통성을 이어갔던 엘르아살 한 사람만 기록하고 있는 것도 바로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제사장이라도 다 같은 제사장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일부러 부분적으로, 그렇게 제사장다운 제사장들의 이름들을 언급하면, 이 역대상의 저자는 그 제사장들을 기억할 때마다 절로 연상되어지는 가장 인상 깊은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49절에 「아론과 그 자손들은 번제단과 향단 위에 분향하며 제사를 드리며 지성소의 모든 일을 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모든 명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니」라고 기록된 장면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소와 성전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인도하던 장면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익숙한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제사장들이 집례하던 제사가 중단된 이후에 와서 돌이켜 볼 때, 그들이 제사장들을 통하여 누렸던 그 흔하게만 보였던 예배 생활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의 예배를 인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속죄의 은총을 받게 했던 시간이야말로 실로 그들 조상이 누렸던 최고의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이 ‘특별한 제사장들의 족보’를 통하여 역대상 저자가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지난 30년 동안 한 주일도 빠짐없이 이 제단에서 드려졌던 예배가 그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세워 주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십자가 대속의 보혈로 충만하게 적셔 주셨던 그 은혜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 제단을 통하여 하나님께 완전히 상달되어지는 거룩한 제물들이 주일마다 풍성하게 드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고 계십니까? 나 같은 죄인이 이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와 살아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었는지를 정말 인식하고 계십니까?
아무 목사나 흔히 줄 수 있는 은혜는 아닙니다. 일주일 내내 기도하고 묵상하며 스스로 먼저 체험하는, 그 영적으로 짓눌리는 듯한 짐을 30년을 하루같이 내내 지면서 말씀을 준비해 오셨던 목사님이 계셨던 까닭에 여러분이 누릴 수 있었던 은혜입니다. 아무 교회에서나 이처럼 ‘성령과 진리’가 넘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배의 한 시간을 온전하고 경건하게 인도하기 위하여 참으로 목숨을 내 건 사람처럼 두려운 마음과 충성된 자세로 준비해 놓고 강단에 올라가는 제사장이 있었던 까닭에 여러분이 누릴 수 있었던 은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귀중한 축복의 시간들을 절대로 범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매 주일마다 반복되는 흔한 장면이라고, 아니 귀찮은 시간이라고까지 여기는 그런 배은망덕한 죄를 하나님 앞에서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주의 사자가 말씀을 증거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주일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얼마나 큰 축복을 누리고 있는지를 꼭 잊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이런 축복의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주실 때에 예배 생활을 더욱 만끽하며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성전의 직무를 충성되이 섬기는 직분자들 덕분에 누리고 있는 은혜를 항상 감사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역대상 6장 16절로부터 30절에는 레위의 자손으로서 제사장이 아닌 다른 종족들의 계보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제사를 제외한 기타 성전의 일을 맡았던 자들로서, 레위의 세 아들, 즉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의 가계로 각각 구분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레위 지파 중에서 게르손 자손은 성막의 기구들을 관리했고, 그핫 자손은 성막의 줄과 천을 관리했고, 므라리 자손은 성막의 기둥과 널 등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1절로 48절의 말씀에 보면, 이 레위 지파 중에 나중에 다윗 시대에 와서 성전에서 찬양하는 직분을 맡게 된 사람들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절부터 33절에 보면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 아들들이 이러하니 그핫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저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즉 레위인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의 종목이 더욱 확대되고 세분화된 것이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찬송하는 일」 즉 찬양대 조직이었습니다. 그것은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는」 즉 체계적인 윤번 조직을 갖춘 것이었으며, 「찬송하는 자」 즉 임명된 성가대 대장이 통솔하던 절도 있는 조직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첫 성가대 대장이 되었던 헤만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그의 족보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레위, 그리고 이스라엘 즉 야곱에 이른다고 38절까지 기록했습니다. 39절로부터 43절에는 역시 같은 식으로 게르손의 자손 중에서 성가대 직무를 맡게 된 아삽이란 레위인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4절에서 47절에는 에단이라는 자가 역시 성가대 직무를 맡았고 그의 족보는 위로 돌이켜 올라갈 때 므라리에 이르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나타나는 세 사람은 각각 시편 50편, 88편, 89편을 지은 사람으로서 성경에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이들이 그 맡은 찬양의 직분을 얼마나 충성스럽고도 영감 넘치게 감당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48절에는 「저희의 형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더라」고 기록함으로써, 나머지 레위인들은 원래부터 맡겨진 성소의 다른 일들에 그대로 종사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제 조국을 새로이 건설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제사장 제도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도와 성전의 다른 일들을 맡았던 이 레위 지파 역시 다시 조직해야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소와 성전을 그렇게 아름답게 준비해 놓고 예배 시간마다 은혜로운 찬양으로 감동을 끼쳤던 레위인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성전을 항상 빈틈없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정돈해 놓고 백성들을 맞이하던 레위인들의 모습이 그 바벨론 포로시기를 지나는 동안 참으로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 은혜로웠던 시기, 그 아름다운 광경이 다시 자기 조국에 되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향교회 안에도 이 교회를 이처럼 은혜로운 제단으로 만들기 위하여 당회장 목사님 외에도 많은 ‘레위인’들의 정성과 손길이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에 남보다 두 시간 전에 나와서 찬양을 준비하는 성가대원들 덕분에, 우리는 이처럼 영감 있는 아름다운 찬양을 만끽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 밤 예배 이후 그 제일 피곤한 시간에도 또 모여서 교안 준비를 하고 주중에도 계속 기도하면서 주일의 성경공부 30분을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주교교사님들 덕분에 우리의 어린 영혼들이 성경 말씀을 먹고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무심코 앉으시는 의자나 걸어 다니시는 복도나 차를 대어 놓는 주차장 구석구석을 주일날 깨끗하게 준비해 두기 위하여 우리 관리부 직원들께서 주중에 얼마나 수고를 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레위인’들이 ‘반열을 따라’ 이 경향의 성물들을 관리하고 예배를 준비하기 위하여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감사함으로 수종 들고 계시는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이 아름다운 아버지의 집에서 거룩하고도 복스러운 주일 하루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 동생 석기신 목사님이 부활절 기간 중에 일본에 있는 ‘십이 사도 공동체’ 신학교에 강의와 집회를 위하여 다녀오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보통 때에는 주중에 갔다가 주말에 돌아왔었는데, 금년에는 부활절 주일까지 거기서 예배를 인도한 후에 다음 주초에 돌아오게 스케줄이 짜였습니다. 그때 석 목사님이 일본으로 가면서 정말 안타까워했습니다. 물론 목사가 선교지의 특별집회를 위해서 더 시간을 내고 섬겨야 마땅한 줄은 잘 알지만, 자기는 개인적으로는 경향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꼭 드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정말로 아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혹시 석기신 목사님이 “부활절 주일에 형님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를 듣지 못하게 되어서 아쉽습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제 동생 목사님에게는 이 경향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 전체의 영적 분위기와 순서와 내용들이 정말로 하나하나 다 은혜로운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주일을 빠지는 것이었는데도, 그것도 선교지에서 특별 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도, 그것을 그토록 아쉬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 그런 심정이 결코 석기신 목사 한 사람만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심정은 우선 저부터 그대로 공감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비단 제가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만 아니라, 밑에 앉아서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꼭 마찬가지로, 이 경향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아마 저는 우리 경향교회 성도님들의 대부분이 다 이런 심정에 공감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왜 이 경향제단의 예배와 성회들과 모든 모임들이 그토록 목사와 교인들에게 공히 은혜롭고도 사모되는 것들이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경향제단에 속한 모든 동역자들과 직분자들이 함께 충성되이 섬긴 결과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목사뿐 아니라, 그 외에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은 직분자들이, 이 제단을 이처럼 정성껏 섬기고 이 성소 구석구석을 자신의 땀과 눈물과 기도와 사랑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단을 중심으로 오늘도 성전의 직무를 기쁨과 감사로 섬기고 계시는 이런 직분자들의 충성으로 인하여, 우리가 모일 때마다 이처럼 큰 은혜를 나누게 되는 줄을 기억하고, 더욱 이 교회를 사랑하며 이 교회의 예배 시간을 사모하며 자신도 이들과 함께 이 교회를 보람되이 섬기는 일에 동참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 살면서 한 끼에 200그램씩 지급되는 검은 빵을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옛날 배부르게 먹던 시절을 되새기면서 후회합니다. 번철에 구운 감자를 몇 개씩, 야채를 듬뿍 썰어 넣은 죽을 몇 그릇씩,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닥치는 대로 삼키고, 우유는 배가 터지도록 마셨던 그 시절을 상기하면서, 그는 음식을 그렇게 먹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절실히 후회합니다. 한 조각의 검은 빵이라도 그 씹는 한 순간 한 순간을 음미하면서 먹으면 그것이 입 안에서 얼마나 향기로운지를 맛보면서, 그는 ‘옛날 풍성한 음식 먹을 때에도 그렇게 음식 맛을 하나하나 음미하고 먹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누리는 교회 생활, 예배 생활을 어떻게, 얼마나 음미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예배는 참석하기 귀찮은 것을 억지로 나와 주는 것이고, 교회의 직분이나 봉사란 그저 맡았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고, 헌금 생활은 내가 드리는 만큼 하나님께서 더 주시겠지 하는 계산 속에서 겨우 하는 것들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쉽게 누리고 있으니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고, 오히려 귀찮은 것처럼까지 여겨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것들을 자유롭게 누리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정말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이나, 이슬람 국가나, 저개발 지역에 살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누리고 있는 신앙생활, 누리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꽤나 어려운 것처럼만 여겨졌던 이 신앙생활이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안타깝게 회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로운 경향교회의 예배를, 그 축복스러운 교회 생활의 맛을 구석구석 음미하지 못했던 나날들이 정말 바보 같았었다고 우리는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생활,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 우리가 모시는 교역자, 우리가 섬기는 봉사 생활 -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에게는 복 그 자체요 은혜 그 자체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어떤 부담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혹은 그것을 행함으로써 다른 진짜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우리가 행하고 누릴 수 있다는 그 자체로서 이미 최고의 복인 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 성회로 모이는 것, 주의 사자들을 만나는 것, 이 교우들과 함께 선한 일을 위하여 섬기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을 누리고 있는 순간순간 그 자체를 축복인줄 알고 만끽하며 감사할 줄 앎으로써, 진정 거룩한 백성이 되며 함께 제사장의 나라를 이루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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