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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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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승남 목사 |
참고 : | http://koreacts.com |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
눅15:1-10
눅15장에는 유명한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는 점입니다. 이 비유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애타게 찾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준 그런 비유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비유가 다 잃어버렸던 것을 찾았다는 것에서는 똑같은데 더 자세히 보면, 세 번째 탕자의 비유는 집 나갔던 아들이 고생고생 끝에 자기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 번째 비유는 '회개'에 더 초점을 맞춰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눅15:1-10절까지 말씀에 나오는 두 가지 비유, 즉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비유라든가 그 뒤에 나오는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해서 등불을 켜들고 온 집안을 쓸고 닦으면서 샅샅이 뒤져서 마침내 잃어버렸던 드라크마, 은전 하나를 찾은 여인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애를 쓰셨는가에 대한 그런 말씀입니다.
물론 세 번째 비유인 탕자의 비유에서도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날마다 동구 밖에 나가서 애를 태우면서 아들을 기다리는 부성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비유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미국 동부 어느 작은 도시에 '캐시'라는 한 젊은 여성이 대학 시절에 한 남자와 연애를 하다가 버림을 받아 자신을 비관하면서 집을 나간 후 10년 동안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그녀는 방탕한 가운데 창녀가 되었고 알코올 중독에, 마지막에는 마약 중독까지 되었습니다. 그간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니 나이도 먹어 이제는 아무 남자도 거들떠보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강가에 나갑니다. 주위를 살피며 막상 투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문득 고향의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강물을 내려다보노라니 거기에 어머니의 얼굴이 아롱거립니다.
그녀는 '죽는 것은 서두를 것이 없다. 10년 동안에 어머니가 얼마나 늙으셨을까? 먼발치에서라도 숨어 어머니의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죽으리라'고 생각하고 집을 향하여 갑니다. 무수한 생각들이 그 머리 속으로 스쳐 보내면서 집 앞에까지 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밤인데도 불구하고 온 집안이 환하게 앞뒤로 불이 밝혀져 있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살펴보아도 사람은 없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대문을 조금 밀어보았더니 대문이 열려있습니다. 조금 더 미니까 끽하고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나자마자 어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오시면서 '캐시냐'고 합니다. 여기서 이 캐시는 꼼짝 못하고 어머니께 붙들렸습니다.
그가 궁금해서 어머니께 물어봅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불을 켜 놓으셨으며,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계셨습니까?'라고 하자, 어머니의 대답이 '네가 집을 나간 지난 10년 동안 단 한번도 문을 잠근 적도 없고 불을 끈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캐시는 자기가 자신을 생각해도 '나 같은 인간은 버려진 것'이라고 포기해 왔었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불을 켜놓고 문을 열어둔 채 10년을 하루같이 기다렸단 말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모성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여기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미 찢기고 병신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상관이 없습니다. 목자는 이 하나를 사랑합니다. 극히 개인적입니다. 한 인격과 한 인격, 1대 1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개별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두 비유의 배경이 무엇인가?(1-2)
본문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 먼저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앞 14:1절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이곳에서 여러 말씀들을 주시면서 36절에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하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실 때 오늘 본문 1-2절이 이어집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본 비유는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비유의 핵심사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대부분 세리와 창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로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을 보고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못 마땅히 여겼습니다. 자칭 의인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배부른 자들입니다. 오만과 자존심으로 가득 찬 그들은 스스로 거룩하게 생각하며 세리와 창기와는 절대 구별되어 자칭 차별화를 선언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죄인이 회개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멸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도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려면 죄인들과 멀리하고 의로운 자신들과 가까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저들을 영접하실 뿐만 아니라 함께 식사도 하시고 그러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처신을 이들이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본문에 기록된 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말하는 것이나 그 가르치는 것을 보면 지혜가 많고 훌륭한 분인데 하필이면 왜 저런 사람들하고 친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쩌자고 저런 사람들을 영접하며 함께 어울려 다니는지 이것이 못마땅하여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원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라며 두 비유인 잃어버린 양과 은전 비유를 말씀하시게 됩니다. 한 영혼의 귀중함을 그들에게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참으로 좋은 기회에 가장 적절한 소재로서 이 귀한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유란 다른 이야기와는 달라서 그 말씀의 소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언제나 비유는 듣는 이 모두가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고아로 자란 사람이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되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두 가지 비유는 그 당시 유대사람이라면 다 쉽게 그들의 생활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그런 소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동에 바리세인과 서기관이 원망을 했습니다. 특히 '죄인을 영접하고' 이 말은 단순히 함께 식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인으로서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해서 맞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설명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무엇을 잘못생각하고 있는지를 가르쳐주실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그러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님의 눈에 비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눅5:30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7:39절을 보면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한 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이란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들과 상종하다가는 자기들도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 죄에 오염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기들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관점, 이런 시각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세리나 죄인들은 어떻게 하다가 한 번 실수로 그런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개별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죄인이라 싸잡아 멸시하고 소외시키고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을 보는 눈에 병이 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이웃을 이웃으로 보지 못하는 관계적인 시각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로서 영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주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람들이 이런 병을 앓고 있기에 주님께서 이 점을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비유로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5-6).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은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찾고 찾다가 어렵게 찾아서 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너무 기뻐서 친지들을 불러 즐기면서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나옵니다. 99마리 양에 대한 안전에 대한 문제입니다. 99마리 양을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돌아다닌다면 그 99마리 양의 안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마리를 찾으려다가 행에라도 99마리 중 또 다른 잃은 양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강도가 와서 이 99마리를 전부 가져가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들에 맹수라도 나타나서 99마리 중 몇을 잡아먹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니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먼저 99마리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할 것입니다. 다른 동료 목자에게 99마리를 맡긴다든지 안전한 우리 속에 이 99마리를 넣어 두엇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이 한 마리를 포기할 것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이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제를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주님께서도 물론 이 전제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해서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전제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장을 보러 나왔습니다. 그날따라 이것저것 살 것이 많았습니다. 양손 가득 값비싼 물건
을 잔뜩 들었습니다. 물건 고르고 흥정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가만히 보니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이가 보이질 않습니다.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 집니다.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시장 구석구석을 헤매기 시작합니다. 물론 두 손에 들었던 물건들은 땅 바닥에 놓고 말입니다. 온 통 아이 생각에 물건은 안 중에도 없습니다. 이 가게 저 가게 뛰어다닙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물어봅니다.
한 참 뒤에 어렵게 아이를 찾았습니다. 정신이 돌아와 물건을 찾아보니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습니다. 몇 개는 사람들이 집어갔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기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엄마에게 아이가 귀합니다. 엄마에게 아이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가집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잃어버리는 순간 물건은 안 중에도 없습니다. 그 동안 한 푼이라도 깎고 흥정하던 그 생각은 정지되는 것입니다. 그 무한 가치 앞에서 유한 가치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산 따위는 설자리가 없습니다.
본문의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리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정상적인 사고가 흔들립니다. 이것저것 계산이 안 됩니다. 바보가 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려는 것이 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한 마리 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마음입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가정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버립니다. 자식이 유산 때문에 부모를 살해합니다. 남편이 이혼을 생각합니다. 아내가 위자료를 따집니다. 모두가 계산이 앞섭니다. 이것저것 생각이 많습니다.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이 사랑의 마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계산하지 않습니다. 따지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회복되면 돈보다 사람이 보입니다. 그 영혼이 보입니다. 그래야 가정다운 가정으로 든든히 서 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저것 따지는 것입니다.
⑶또 하나 본문의 비유에서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았다고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 가격은 얼마나 할까요? 대략 그 종류와 나이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20-30만원 정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양을 그렇게 많이 키우지 않아서 비싼 편입니다. 호주에서는 우리 돈으로 한 2만원 정도 한답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주로 양을 키웠기 때문에 양 값이 저 호주 수준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만원, 조금 더 쳐서 5만원 정도라고 해 보겠습니다.
친구와 이웃을 초청해서 조촐하게 잔치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들까요? 한 20명을 초청한다고 할 때 1인당 식사와 간식 다 합하면 2만원 정도는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40만원이 든다는 계산입니다.
5만 원짜리 양을 잃었다가 찾았다고 40만원 들여서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사실을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사랑의 마음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당시 일반 목자들은 비즈니스의 관점으로 양을 다뤘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그 양들을 사랑의 관점으로 다뤘습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그 양의 가치는 5만원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그 양의 가치는 무한대입니다.할/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너무 비즈니스의 관점으로 보고 살아갑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이런 관점을 바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할/
눅12: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비즈니스적 관점에 사로잡혀서 돈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아온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돈은 많이 벌었으나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출세는 했고 성공은 했으나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남들이 부러워할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리지만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 눈에는 어리석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혼의 문제를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도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목자의 심정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4절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이 100이라는 수는 이미 한 눈에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입니다. 큰마음 먹고 하나씩 세지 않고는 한 마리 정도가 더 있는지 없어졌는지 알기 힘듭니다. 그런데 목자는 한 마리라 없어진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기 때문입니다.
요10장을 보면 선한 목자 이야기에서 주목할 말씀이 나옵니다. 3절에 '문지기가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이 많더라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하나씩 이름을 불러서 우리 밖으로 인도해 낸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목자도 이런 목자입니다. 100마리 양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쿠, 개구쟁이 양돌이 이 녀석이 안 보이는 구나! 양돌아 양돌아' 그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목자는 평소에 늘 관심을 기울여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변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전도 대상자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관심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4절에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기까지 정말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본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라고 말씀하면서 4절에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이 대목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이 비유가 성립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이 점을 수긍하지 않는다면 비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 공감하는 내용을 기초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8-9).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 당시 은전입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이고, 드라크마는 헬라의 화폐입니다. 그 당시 두 화폐가 다 같이 쓰여졌습니다.
여기 나오는 드라크마는 은전 중에도 예쁘고 모양이 보기에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왜 이토록 드라크마를 귀하게 여겼는가? 어떤 학자들은 '시집갈 때 친정 어머니가 지참금으로 딸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귀하게 간직했다'고 설명하신 분이 있습니다.
어떤 여인들은 이 드라크마 열 개를 예쁘게 꿰어서 목거리를 하고 다닌답니다. 그러다 보니 끈이 풀려서 도르르 굴러 숨어버렸기 때문에 쓸면서 찾고 또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당시 여인들이 들으면 금방 알아채는 그런 비유입니다. 첫 번째 목자의 비유는 남자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드라크마 비유는 여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항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⑴왜 본문의 여인은 열 드라크마 중에서 잃어버린 한 개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썼습니까?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도 매우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학설도 있습니다. 당시에 청년들이 약혼녀에게 열 드라크마로 만든 장신구를 주는 관습이 있었답니다. 그러면 약혼녀는 그것을 잘 간직했다가 결혼식 때 머리에 장식하고 나옵니다. 그래서 장신구에 있는 열 드라크마는 사랑의 정표로 모두 다 소중합니다.
그처럼 우리 각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정표입니다. 그러므로 '한 영혼의 가치'를 우습게 알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우습게 여깁니다. 여러분, 절대로 자신의 가치도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처럼 소중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상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그것을 찾았습니다.
왜 등불을 켭니까? 그 드라크마가 지금 어둠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왜 집을 씁니까? 그 드라크마가 지금 죄악의 먼지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드라크마가 제자리를 떠나면 죄와 어둠에 처하게 됩니다. 그처럼 사람은 제자리에 있어야 가장 복된 삶이 펼쳐집니다.
성도가 있어야 할 가장 소중한 제자리는 어디입니까? 바로 주일에 예배하는 이 자리입니다. 어떤 성도는 주일에 빈자리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만은 어떻게 하든지 주일예배에 자리를 지키려고 애씁니다. 얼마나 든든하고 감동이 됩니까? 큰 능력이 없어도 좋고 큰 헌신을 못해도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제자리를 힘써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복된 태도입니다.
오래 전에 한 개그맨이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는 책을 썼습니다. 사람에게는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가지 말라면 더 가고 싶고. 먹지 말라면 더 먹고 싶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삶을 '재미있게' 살려고 하기보다는 항상 '의미 있게' 살려고 하십시오. 조금 재미없어도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굳게 지킬 때 의미 있는 인생이 시작됩니다.
결국 본문의 여인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서 잔치를 배설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잃은 영혼을 찾아 회개시키는 일입니다(7,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전도보다 주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일은 이 지상에서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전도이며, 우리의 가장 시급한 일이 전도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바로 전도를 위한 생애였습니다. 니고데모에게도 전도하셨고, 수가성 우물가 여인에게도 전도하셨고, 세리 삭개오에게도 전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됩니다. 왜 전도해야 됩니까? 복음은 이 땅에 주어진 오직 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은 오직 이 복음,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성도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어떤 죄가 됩니까?
빚을 갚지 않는 죄가 됩니다(롬1:14). 세상에선 빚을 갚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옥살이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빚진 자들입니다. 무슨 빚입니까? 복음의 빚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의 빚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복음의 빚을 갚으려고 죽기까지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큰 빚을 지고 갚지 않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사람이 됩니다. 빚은 자고 일어나면 이자가 눈송이처럼 불어납니다. 그래서 빨리 갚는 길이 제일 현명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때 미국선교사님들의 복음의 빚을 지었고, 나를 전도해준 사람들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⑵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입니다(마28:18-20). 성도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보다 더 시급한 명령도 없고 이 보다 더 큰 명령도 없습니다. 이런 지엄하신 명령, 간절하신 분부에 불복종하면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을 말로만 하는 죄입니다. 신앙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주님이 유언이신 전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영혼구원에 무관심한 사람은 예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살인죄가 됩니다(겔3:17-18).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입니까? 전도를 받지 못한 사람은 결국 죽게 될 것인데 그 책임을 파수꾼인 우리에게 찾으시겠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말씀인가?
우리도 지금 잃어버린 것이 잇습니다. 지금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파송 하시면서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6)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들을 찾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이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까? 잃어버린 것을 찾으십시다.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어디로 가는가?' 자신을 아는 일은 가장 기본 조건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때만이 자기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고백한 후 속죄의 확신과 함께 소명을 받았으며, 베드로가 고기를 잡다가 주님을 만나고서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하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신의 고귀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자가 있습니다. 인생의 목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요, 둘째는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임을 알고 구원을 준비함이요, 셋째는 복음을 전파하며 이웃을 위하여 살 때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자가 있습니다. 바울은 행20:29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카알 힐터'는 '인간 생애에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충성 되이 보사 사명을 맡기셨다'고 감사했습니다.
군인이 사명을 모르면 큰일입니다. 정치인이 사명을 모르면 큰일입니다. 신앙 인이 사명을 모르면 큰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사명 때문입니다.
본향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중요한 결론입니다. 불 신앙은 고향 잃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영혼의 고향을 잃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는 자유를 원하다가 본향을 잃고 돼지와 함께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잃은 자를 찾는 일입니다. 전도는 잃은 자 찾기 운동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것도 잃은 자를 찾으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올 때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고 있습니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 목자는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도 이웃을 불러 놓고 '나와 함께 즐기자 일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며 아들의 귀향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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