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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5:4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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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3.24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그리스도의 고난을 흉내 내지 말고
막15:42-47
이번 주간이 고난 주간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지금까지 고난 주간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고난에 대한 ‘퍼포먼스’를 해 오곤 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금년에 ‘휴대폰 금식’이라는 퍼포먼스를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직후, 이미 숨진 예수님을 향해 나아갔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에게로 나아갔던 일은 우리네와 같은 퍼포먼스처럼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앞으로 나서야 하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분위기로는 전혀 가당하지 않는 일을 그들이 감행한 것입니다.
막15:42-47절, 이에 바로 이어지는 16:1-4절에는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이후에 일어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니 두 사람들의 처신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는 무덤 제공자가 나타나 반역의 죄목으로 무참하게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시체를 안장하는 이야기이며, 나중 것은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여자들이 무덤으로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의 결정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니까, 예수님에게 무덤을 제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리마태아 사람입니다. 그는 지체가 높은 귀족이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15:43). 이것은 다른 귀족과는 달리 현세의 권력을 추구하기보다는 이 세상을 개탄하고,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날을 기다렸다는 사람이라는 대중적인 평판을 제시하는 겁니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간청합니다. ‘의인’예수의 시체를 자기에게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장사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반적인 관행은 십자가 처형자는 무덤에 묻지 않고 들판에 내던져 버림으로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죄수에게 주는 마지막 모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골고다인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시민들에게 시신에 대한 불손함을 갖게 하려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시신을 보고 그런 처형을 한 권력과 권력자들을 두려워 해야하고, 그렇게 죽어간 죄수를 향해 비웃음과 비난을 퍼 부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체를 달라는 겁니다. 아무리 높은 양반이라도 아니 높은 양반일수록 자신의 거취에 영향을 받을까 두려워 꺼리고 삼갈 일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총독에게 가서 시국 사범인 예수의 시신을 안장하겠다는, 그것도 자기를 위해 장만해 둔 무덤에 안치하겠다는 청탁은 고난의 수준이 아니라 목숨을 내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큰 돌이 무덤 입구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마태에 따르면 그것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시신을 탈취해갈 것을 막으려던 빌라도의 용의주도한 예방조치였다고 합니다(27:64). 동굴 입구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곳을 여자들이 갑니다. 제자들도 예수의 사태가 무서워서 다 도망을 쳤는데 여자들이 갔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복음서에는 이런 상황에 여자들이 느꼈을 공포가 드러나 있지 않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 주간이라고 밥 몇 끼 굶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공포상태였을 겁니다. 아무리 예수에 대한 흠모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크다고 해도 엄청난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들이 칼날을 번뜩이며 지키는 그곳으로 간다는 건 단순성을 훨씬 넘어서는 사태입니다. 그들은 이미 극단적인 봉변을 감수하려는 마음을 먹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두려움과 여인들의 두려움이 중첩이 됩니다. 성서는 그녀들이 무덤에 당도했을 때 장벽이 열려있었다고 합니다. 필경 있어야 할 그 두려움의 대상들이 제거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마가는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 합니다. 아니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요셉과 무덤으로 나갔던 여인들의 부활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슬쩍 내 부활로 끼워 넣습니다. 그러나 요셉이나 여인들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에 얹어가는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여인들과 요셉은 예수께로 나아가는 두려움을 넘어 진정한 그들만의 부활을 맞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 각자 앞에 놓인 두려움을 넘어설 때,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 부활의 진정함을 알게 되었고 또 그들의 부활도 맛보게 된 겁니다. 남의 부활을 내 부활로 하지 않고 자발적 부활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공포라서 피할 길을 하나님께 아뢰지만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두려움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곧 ‘예수의 부활’이 일어난 것처럼, 요셉과 여인들이 감내하기 어려운 공포와 두려움을 향해 그들 자신을 던져 넣자 곧 큰 장벽이 사라지고 진정한 자신의 부활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부활이 요셉이 부활’이 되는 것이요, 예수의 부활이 여인들의 부활이 되는 겁니다.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부활하신 게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의 부활입니다. 그가 받은 고난은 그의 고난이지 우리의 고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과 고통을 무릅쓰고 행진했습니다. 그러자 그 앞에 가로 놓여 있던 무시무시한 장벽이 사라지는 순간 부활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활 하셨다고 우리에게 부활이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부활을 맛보려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려면 그들만의 두려움과 고난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듯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진정 나의 부활이 되게 하려고 예수의 부활을 푯대 삼아 앞으로 우리를 둘러싼 두려움을 넘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 나의 존재 세계 내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가장 큰 두려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누구나 부활이 거저 주어진다면 그게 무슨 참 가치가 되겠습니까? 거저 주어져도 부활이 예수만큼 가치 있어 진다면 요셉이나 여인들처럼 목숨을 내던지고 두려움 앞으로 나갈 이유가 있을까요? 일찌감치 예수를 버리고 도망쳐버린 예수의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부활이 요셉이나 여인들의 부활과 같을까요? 그렇다면 훗날 도망쳤던 제자들이 돌아와 그리스도를 위해 목을 베이고 거꾸로 매달림을 당하는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차 얻게 될 부활을 부끄럽지 않게 하려는 게 아닙니까? 어떤 생존 양식을 갖고 살던지, 조금 비겁하고 약삭빠르게 남을 속여먹고 산다고 해도 예수님의 부활이라면 그건 아주 값싼 부활이 되지 않겠어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향해 두려움과 싸우지 않으면 부활이 있어도 진정한 부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끄러운 부활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포기하고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지낸 요셉이나, 해골로 뒤덮이고 시체가 나뒹구는 골고다로 나갔던 여인들의 부활하고, 생존을 건 두려움에 대한 도전 없이 살다가 늙어서 맞게 되는 부활이 어떻게 똑 같겠느냐는 말입니다. 진정한 부활이 되려면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맞이한 요셉의 부활, 여인들의 부활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굴복시키려는 게 너무 많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심리 정치와 문명의 이기적인 사회적 장치, 욕망의 구조들이 우리를 점점 더 큰 두려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타살하고, 우울증에 걸려가고 있습니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정신과적 질병 상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교묘한 속임수에 굴복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굴복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고난을 흉내 내어서는 안 됩니다. 직면한 세상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요셉처럼,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내 부활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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