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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부활은 없다.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452 추천 수 0 2015.08.08 23: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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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2:18-2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5.3.31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그런 부활은 없다.
막12:18-27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 제사와 관리를 맡았던 사두개인들은 말하길, 어떤 집안에 형제가 여덟 명쯤 있습니다. 제일 큰 형이 형수를 얻었는데 그만 형이 죽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통에 따라 동생이 형수를 취해 살다가 그만 동생도 죽어요. 이러기를 여덟 째 에게까지 큰형수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이들 죽은 여덟 형제가 모두 부활하는 날에는 이 여자가 누구의 부인이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이 질문을 자세히 보세요. 이런 극단적인 상황의 예시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내세론적인 지식’즉 ‘앞으로 될 부활’을 생각할 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랬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을 하셨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 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너희의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27) 이러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런 부활은 없다’아닙니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뭡니까? 예수님과 사두개인 사이에 벌어진 부활 논쟁은 바라보는 시선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두개들은 부활 신앙을 내세에 초점을 맞추어 질문하고 있죠.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을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은 내세적인 부활신앙을, 예수님은 현세적인 부활신앙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신앙은 죽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속에 삶의 어떤 구체적인 현실과 꿈이 담겨 있는지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두개는 부활을 내세적인 지식으로 이해하는 반면, 예수님은 부활을 현재 사람들의 ‘소망’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부활은 이런 거였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그리스도교 역사에 이 사두개식 부활이해가 깊이 뿌리내려 갔습니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을 비난하는 기성기독교도 내세론적 부활신앙을 전파하고 있다는 데는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 남반구와 북반구 할 것 없이 교회가 서 있는 곳이라면 예외 없이 드러나는 부활신앙의 유형이 되어 왔습니다. 신학도 부활 신앙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와 무관한 예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로 꾸몄다는 말입니다.

엘리엇(T.S. Eliot)의 ‘황무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 서두에 ‘쿠마의 무녀’라는 기원후 1세기 그리스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인용됩니다. 이 무녀의 이름이 시빌인데 그녀는 아폴로 신에게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아폴로 신은 그녀를 영원히 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미처 ‘늙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 주세요’라는 대목을 까먹고 기도를 하는 바람에 영원히 살기는 사는데 자꾸 늙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시빌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병약한 모습으로 ‘영생’을 살게 됩니다. 결국 그녀의 영생은 보람차고 행복한 영생이 아니라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영생이 되었습니다.

‘영생’이라는 개념은 본시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간직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꾸마의 무녀’이야기는 그런 우리의 인식을 조롱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아마도 이런 식의 냉소는 사두개가 냉소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부활신앙을 펼쳤던 그리스도교의 어긋난 발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긋난 그리스도교의 내세론은 흉물스런 욕구와 결합을 해 갑니다. 이 내세론에 근거해서 ‘천국과 지옥’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집니다. 죄를 조금도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베푸는 교회의 권력에 승복하게 한 겁니다. 이로써 세례를 베푸는 권한을 쥔 교권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의 지위를 확보합니다. ‘천국 대 지옥’이라는 도식은 중세에 이르러 한층 정교해집니다. 그리고 그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걸 만듭니다.      

쟈크 르 고프(jacques le Goff)라는 역사학자가 쓴 ‘연옥의 탄생’이라는 세계적인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연옥으로 상징되는 신앙은 민간신앙에서 유래를 한답니다. 그걸 12세기에 교회로 들여오면서 하나의 신학으로 확립을 합니다. 이런 신학은 교회 안에서 인간을 길들이는데 사용되었다는 거죠. 왜 이런 신학을 교회가 만드는가 하면 이때 갑자기 신흥 부자들이 생겨납니다. 특히 고리대금업을 하는 졸부들이 생기는데, 그들이 사악하게 벌어들인 재산을 교회가 소득하기 위해 연옥신학을 만든 것입니다. 내세론적 부활신앙은 이런 세계 종교분위기 속에서 적절하게 변모하면서 재생산되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신앙을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내세론이 아니죠. 죽은 뒤에 세계에 관한 지식을 전하면서 현세를 준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서의 갈구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삶, 부활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지금을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극복하지 못하는 그 무엇을 향한 갈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그런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한 여자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한지 여덟 명의 형제와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겪었을 삶의 무게와 고통을 단지 운명이 기구하다고 하고 끝내야 하는 겁니까? 여덟 명의 형제와 사는 동안 그녀가 겪었을 폭력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세론은 그런 그녀의 현실은 관심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런 현재는 덮어두고 내세에 그녀의 운명을 던져 버립니다. 지금 이 여자처럼 무자비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유념하지 않는 신앙, 체계, 바로 그런 세상에서 죽어간 이들, 아니 죽음을 예감하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살아 있는 이들에게 주는 선물이 바로 ‘예수 부활’이요,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부활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예외 없이 고난의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거기에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습니다. 평생이 온갖 고초뿐이었다고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술회합니다. 이 고백은 비단 야곱의 인생 고백만이 아니죠. 그의 할아버지 이삭의 고백이기도 하고, 아브라함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인생을 살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목적지 모르는 유랑생활을 한 겁니다. 예수님은 사두개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희망인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내세에 대한 약속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야곱, 이삭, 아브라함의 유랑 인생에서 하나님이 희망으로 계셨듯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 염원의 최대치를, 우리 소망의 극단을 강조하여 이야기하려는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온전한 의미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정말 내세에 부활이 우리에게 없느냐? 그건 시간의 미래에 해당하는 부분이므로 그때 가서야 말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떼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소식을 여인들로부터 듣고 그들은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좀 전 까지 좌절에 빠졌던 이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고는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그들은 목숨을 내던지며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예수님이 실천했던 것들을 전하는 삶을 살기에 두려워하지 않았고 겁내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로 ‘나의 내세가 보장되고 약속되었다고 믿었다’면 뭐하러 그렇게 고난속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았겠습니까? 제자들이 인식한 예수님의 부활은 ‘내세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현재 삶에 대한 희망으로 작동한 게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이 ‘내세에 내 부활을 약속’하는 것이라는 어긋난 ‘내세론적 지식’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온갖 생명의 위협을 헤쳐 나가며 예수를 드러내는 삶을 살았듯이, 우리에게 부여된 삶이 그렇게 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희망, 힘, 담대함, 결단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게 발현되어 우리의 생존에 변혁이 일어날 때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두개파가 말하는 부활, 누가 과연 그녀의 남편이 되는 지와 같은, 그런 ‘내세론적 부활’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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