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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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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4.24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감옥, 그리고 [죄]-1
갈3:27
감옥은 누가 가는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죄’진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을 뭐라고 부릅니까? 그렇습니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단어를 이렇게 구성하여 사회적인 가치화를 이룹니다. “죄지은 사람은 감옥에 가둬야 한다. 그래야 죄 짓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 할 수 있고, 죄인들을 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셀 푸코라는 이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정신병원과 감옥을 달리 말합니다. 그는 말하길,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이성중심적인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하는 장소로서, 인간에 대한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억압적 수단이라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감옥도 정신병원과 같아서,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단순한 수용소가 아니라 권력의 사회 통제를 위한 전략으로 필요한 기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푸코에 의하면 ‘감옥’이나 ‘정신병원’은 ‘억압’하는 곳이 아니라 뭔가를 생산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뭘 생산 하는가 하면 바로 ‘권력’을 생산한다는 겁니다. 권력은 뭡니까? 지배하는 것입니다. 지배하는 곳에는 규율이 있고, 감시가 있고, 처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배 권력을 생산하는 항목들 즉 규율, 감시, 처벌은 개개인의 무엇으로부터 출발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모두 ‘죄’에서 출발합니다.
이제 우리의 주된 관심사로 자리를 옮겨야 하겠습니다. 푸코가 말하는 근대적 권력의 특성이 바로 ‘억압과 감시와 처벌’에서 나왔다고 본다면, 이걸 우리는 기독교적 담론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도 이미 수 천 년의 역사를 통해 ‘교회권력’을 휘둘러 왔습니다. ‘휘둘렀다’는 말에는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현상 모두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튼 교회의 권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죄론]입니다. 죄에 대한 해석과 설교, 주석과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결국 교회의 권력은 ‘죄’의 담론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다시 ‘구원의 어법’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왜 ‘죄’에 대해서 물음을 가졌나요? 그것은 ‘악의 해석’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악에 눈길을 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간 존재의 위기가 어디서부터 오는가’에 관한 문제 때문입니다. 악이 작동해서 생존에 위기도 생기고 나쁜 결과도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악’은 ‘인간과 신의 거리’나 ‘인간과 인간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고, 구원이란 바로 그 멀어진 간격을 좁히거나 없애는 것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악이라는 게 들어와서 사이가 멀어지게 했다. 그런데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둘로 갈라졌던 인간과 하나님이 다시 하나가 되는 길이 열렸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작용된다. 이처럼 둘 사이의 거리해소를 구원이라 한다.”
이상과 같은 패러다임들은 모두 죄에 관한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즉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위기 상황을 죄와 연관 지어 해석함으로써 위기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래되었고, 오래 갈 기독교적 담론의 본질인 [죄]에 대한 이야기들을 종교권력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두 시간에는 다 말씀드리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러니 빼먹지 말고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죄를 다루는 성서는 바울서신입니다. 이 말은 복음서는 죄에 대해서 어떤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바울 서신중에서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을 펼쳤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세례를 받는다는 것,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옷 입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로마서에서는 구원의 때가 가까웠으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라’고 하면서(13:12)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죽음으로 귀결되는(여기서 죄로 인한 죽음은 곧 ‘감옥에 갇히는 형벌’과도 같은 의미)죄의 권력에 매인 ‘이 썩을 몸’이 그리스도라는 ‘불멸의 옷’을 입고 있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도 동장을 하는데 이는 바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골3:8을 보세요.
“여러분은 모든....부끄러운 말을 벗어 버리고, 묵은 사람의 행실도 벗어버리시오. 그리고 새 사람을 입으시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을 벗고 그리스도의 새 사람을 입다’입니다.
에4:22-24은 또 이렇습니다.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으라.”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바울의 갈라디아서와 골로새, 에베소서의 차이가 있다면 바울은 종말이 임박했다는 의식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반면, 대략 갈라디아서보다 50년 뒤에 나온 골로새나 에베소서는 종말이 한정 없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적어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옷 입다’혹은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다’로 정의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란 누구냐?’ 하면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정도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이 ‘옷을 입고 벗다’라는 표현은 옷을 입고 벗는 당사자의 시선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시선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했을 때 그건 그를 보는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규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누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있느냐’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판단을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입고 벗음’이라고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인을 보고 있는 관찰자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내 밖에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 규정되는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규정에는 바울이 이해하는 ‘죄’의 이해와 연관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의 문제는 의지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원초적인 재료’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5:12에서 ‘죄는 인간 존재의 구성 요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보십시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일을 행하기를 원하는 내게서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합니다. 바로 악이 내게 달라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내적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법에 가까이 동의하지만, 나는 내 지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내 이성의 법을 거슬러 싸우며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 안에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는 나와 더불어 죄의 법이 내 안에서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주의 신앙을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옷을 입고 있긴 해도 또 한편으로 그를 구성하고 있는 유대주의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동화되어 있지만, 무의식에는 유대주의의 ‘죄인-의인’논법에도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을 말할 때 ‘내가 싹 바뀌어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다만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에게 구원이란 완전한 존재자체의 변형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3:12에서, “내가 그것을 벌써 얻은 것도 아니고 이미 완성된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당장은 옷 입음에 불과 하다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불완전한 존재는 종말의 때가 되어야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존재의 완전한 변형은 종말의 대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빌3:21),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다면(롬8:9) 현재도 변형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아직 몸이 분열되어 있지만,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영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나는 법의 아래 있는데, 그래서 불완전한 존재인데 어떻게 내가 영적인 존재인 것을 아느냐 하면, 두 가지 법 중에서 하나의 법을 외면하고 다른 하나의 법 즉,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기 때문에, ‘아, 네가 나의 옷을 입었구나’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바울의 이런 시선,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를 보기는 왜 생겼습니까? 그것은 그를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는 유대주의의 율법 관과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의 죄인-의인의 논법을 거부하기 위해서 ‘옷 입음’을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교 활동의 주요 무대였던 유대 회당 체제의 권력에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당 체제의 권력 장치는 ‘율법주의’이죠. 그리하여 율법을 통한 죄-의인 논법으로 순종의 메커니즘을 작동 시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단순한 반기가 아니라 그런 율법적인 권력의 시스템을 해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의 무의식에 깔려 있는 유대주의와 결별할 수 있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오랜 율법의 제도적인 장치로 작동하고 있었던 ‘죄’와 ‘배제’의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뿌리를 파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시간 안에서 율법적 권력의 장치인 ‘죄인-의인’를 제거 하려는 바울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유대주의의 율법 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유대주의가 어떤 권력의 장치를 갖고 있었는지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죄’는 유대주의가 깔아 놓은 종교권력을 유지하고 신앙 대중을 지배하려는 기초 장치라는 것만을 말씀 드리고, 바울은 그걸 걷어 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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