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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그리고 죄-2

로마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51 추천 수 0 2015.08.08 23: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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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7:21-2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5.4.28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감옥, 죄(2)
롬7:21-24

지난 주일에 바울의 ‘그리스도로 옷 입다’라는 용어가 왜 그에게서 나왔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타의에 의해 ‘율법의 옷’즉, ‘죄인과 의인’이라는 메카니즘의 옷을 입어야했던 존재였습니다. 마치 이조시대에 상놈의 자식은 태어나면서 상놈 이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죄’의 옷을 입히는 분이 아니라, 그래서 심판하여 구속하고, 처벌하는 분이 아니라 단지 ‘병든 자를 치료하러 이 땅에 오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해서든지 죄의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옷-죄의 옷’개념 대신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죄’론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습니다. 이걸 보다 잘 이해하려면 유대주의의 율법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드려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식민지 시대 이전까지는, 그러니까 서기전 586년 까지는 ‘하나님의 법’이라는 건 사회통합의 원리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들은 그저 지파들이 연합으로 모인 동맹체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저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힘센 지파들을 중심으로 협상을 해서 마무리를 짓곤 했습니다. 그러니 일반 대중은 ‘하나님의 법’이 뭔지도 알리없는 것입니다. 이게 이른바 사사시대입니다.

그러다가 이들이 이제 군주제를 택합니다. 사사 사무엘 이후에 사울이라는 왕을 세우는 거죠. 중앙과 지방에 왕의 법정이 세워졌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씨족 중심체제의 영향 안에서 예전에 하던 대로 살아갑니다. 몇몇의 왕의 통치를 위한 사제단 정도나 지키는 게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그냥 ‘법 없이 살았다’ 그 말입니다. 법 없이 사니 당연히 ‘죄’의 옷도 강제로 입히지 않죠. 이때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건 뭘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제사 정도나 참석하면 그만이던 시대였습니다. 강제와 규율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실행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이 이제 바벨론으로, 앗시리아로, 이집트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야훼 신앙이 ‘율법 종교’로 자리를 잡습니다. 남의 나라에 망하고 나니까 제사를 드릴 장소도 제도도 허물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환란에 살아남고 흩어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법을 만듭니다. 이게 율법입니다. 이렇게 율법 종교가 태어나자 ‘하나님의 법’은 모든 백성들이 반드시 지키고 실행해야 하는 대 원칙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이 법다운 위세를 가지게 된 시기가 바로 식민지가 되면서 부터다 그 말입니다. 전쟁과 공동체의 패망은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싸우고 끌려가고 하는 사이에 12지파로 이루어진 씨족 공동체는 뿔뿔이 흩어집니다. 전쟁통에 인구도 이동을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에는 본토인 보다 외지인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헬레니즘(로마) 시대에는 국제 무역상으로 또 유대 땅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사회 계층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통적인 사회적 조직이 헝클어지게 되었던 겁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겠어요? 뭔가 구심점을 만들어서 하나로 뭉치게 해야 했습니다.  

이 때 등장 한 게 회당입니다. 서기전 150년 경 입니다. 회당이 생길 무렵엔 이미 씨족 중심의 평등 공동체였던 이스라엘에 소자산가도 생기고 지식인층도 생깁니다. 이게 다 전쟁과 노예로 끌려 다니는 동안에 터득한 것들입니다. 그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결속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바로 문자의 전문가인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과거에 왕실이나 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뀐 세상에서는 회당에 등장을 합니다. 하시딤, 마스킬림, 바리사이, 에세네 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대중들을 동원하고, 교육하고, 통합합니다. 이게 바로 ‘유대주의’입니다. 유대주의의 주된 특성이 ‘율법’이라는 거죠.

나라가 망하면서 옛날 제사 드리던 예루살렘 성전도 사라집니다. 국가 시스템이 사라진 겁니다. 이제 그걸 대신 하는 게 회당이었고,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은 뿔뿔이 흩어지는 이스라엘을 하나로 엮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강력한 통제, 감시, 처벌의 장치가 율법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장치가 생산해 내는 게 바로 [죄]였습니다.

율법은 간단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613개의 법조문은 무수히 많은 주석이 만들어 집니다. 이런 방대한 율법 총서를 주제별로 묶은 책이 [미쉬나]입니다. 그리고 성서 본문별로 해석한 게 [미드라쉬]입니다. 그리고는 미처 미쉬나에 들어가지 못한 것들을 또 엮어낸 게 [토세푸타]고, [미쉬나]를 다시 주석해 놓은 게 [게마라]입니다. 그 [게마라]를 묶어 놓은 게 여러분이 아시는 [탈무드]입니다.

이런 방대한 양의 율법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충실하게 법을 지키려고 해봤자 이 많은 것들을 완벽하게 지키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열성을 다해, 밥 먹고 율법만 지켜도 어느새 그들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율법 앞에 완전해 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다시 최선을 다해 율법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죄도 많아집니다. 바로 여기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라는 게 나왔습니다. 율법을 몰라 죄를 깨닫지도 못하는 이방인과 달리 그들은 비록 율법을 다 지키지는 못하여도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이방인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과 동시에 선민이 되는 겁니다.
주후 3세기가 되면서부터 모든 유대인은 5살부터 결혼할 때인 18세 이전까지 앞에서 말씀드린 어마어마한 분량의 율법들을 공부해야했습니다. 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출발은 곧 율법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하나님의 법’이라는 건 모든 삶에 개입하게 되겠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은 이미 내 속으로 들어와 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율법이 내 속으로 들어왔다는 건,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당신의 눈으로 나를 판단하고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고 계시는데 나는 율법의 절반정도밖에 지키지 못하며 삽니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어 살고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거나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 오시기 직전의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갇혀 있던 ‘감옥’입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율법에 처벌당해서 죄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렇게 ‘죄의 옷을 입고 추방당한’ 사람들의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때로는 죄인이라 칭하는 그 자신의 믿음으로 ‘죄 없음’을 선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간음한 여인의 죄까지도 묻지 않는 파격으로 ‘죄’의 옷을 벗기셨죠. 그러면서 그는 말하십니다. “나는 죄인을 심판하러 온 게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러 왔다.”고 말입니다. 유대의 율법에 따른 통합과 통제의 권력 장치로 인해 입혀진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죄’가 아니라 ‘질병’으로 파악하고 계신 겁니다.    
이런 시선은 예수님만의 시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바울의 시선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이 덮어씌운 ‘죄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다가 결국 저항에 부딪혀 십자가에 죽었던 게 아닙니까? 이게 바울이 보는 예수님에 대한 시선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죄의 종교’와 싸웠듯이 바울도 율법 종교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의 죄인-선민 매커니즘이 단순히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신앙체제라기보다는, 더욱 정결하고 더욱 부정한 사람을 가르는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예수 운동의 문제의식을 바울이 공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니, 바울은 예수를 옷 입고 예수처럼 살고자 했던 겁니다. 바울은 예수를 제대로 보고 그처럼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음 주에 ‘죄’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가 아닌 그 주변의 권력 장치들을 신뢰하고 거기서 믿음을 보증 받으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죄’인데, 바울은 예수님처럼 그런 허접한 것들을 다 걷어내고 예수만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절실히 요구되는 신앙혁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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