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감옥 그리고 [죄]-3

갈라디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30 추천 수 0 2015.08.08 23:24:54
.........
성경본문 : 갈3:2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5.5.11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감옥 그리고 [죄]-3
갈3:28

첫 시간에 우리는 바울의 ‘그리스도로 옷 입다’는 문제 의식적 표현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어법은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이라는 종교적인 장치아래 태어났으므로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율법이 장치한 죄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는 인간이 제도적으로 만들어 낸 통제와 감시 그리고 처벌의 장치로서의 [죄]가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주변부 사람들에게 얼마나 뿌리 깊게 각인되어 왔는지를 확인하려 했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제압하려고 할 때 ‘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이러한 율법종교와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의 죄인 아니면 선민이라는 메커니즘이 단순히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신앙 체제라기보다는, 더욱 정결한 사람과 더욱 부정한 사람을 가르는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예수 운동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같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사회적 주변인이 하나님 앞에서도 주변인이 되게 하는 종교적 장치로 유대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제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부존재의 존재들이 된 주변인들(이방인, 노예, 여자, 아이들, 병든 자, 가난한 자)대한 차별을 특별하게 문제시합니다. 갈라디아서 3:28을 읽어봅시다. 그래서 첫 시간 4절의 논조처럼 유대주의의 율법관을 해체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당시의 유대종교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난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을 스스로 저주스런 운명에 복종하도록 하는 장치와도 같았던 겁니다. 그게 바로 유대의 죄 시스템입니다.

이래서 바울은 죄의 시스템에 대해서 해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 제기는 두 가지 방향을 갖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린 죄의 시스템을 없애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주의적 선민 메카니즘을 없애는 겁니다. 아마도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런 시스템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는 시스템입니다. 한 쪽은 빛의 자식이고 다른 한 쪽은 어둠의 자식쯤으로 생각하는 고정된 생각 말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은 이런 경직된 틀을 반대하십니다. 이런 이분법적 방식은 당시 유대주의가 쓰던 것입니다. 죄인-의인, 남자-여자, 어린아이-어른, 자유인-노예와 같은 분류의 틀입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차별 아님)를 없애기 위해 바울은 ‘옷 입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론 이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죄의 담론에 묶어 차별화했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같은 옷을 입어 보세요. 다 똑같죠? 군대에 간 우리 아들들이 차이가 왜 없겠어요. 그러나 군복이라는 유니폼을 입으면 그 차별은 사라지고 차이만을 인정하는 균등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국가 앞에서 군복을 입은 아이들이 평등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든지 차등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질적 존재라는 것은 ‘옷’이 드러낸다는 것을 함축하는 언어가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조금 깊은 말씀입니다만, 바울의 이런 지배와 억압 그리고 처벌의 장치로서 유대의 죄 시스템에 대한 해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종의 장치’가 남아 있기는 겁니다. 물론 바울은 그걸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했을 때 여전히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군가 보아야 하는 거잖아요,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말입니다. 바울은 고육지책으로 유대주의의 율법관을 해체하기 위해서 그런 표현을 썼겠지만, 여전히 시선의 권력아래 신앙인의 정체성을 논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 식의 ‘옷 입음’론은 ‘보는 이’와 ‘보여지는 이’라는 이분법을 가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죄라는 페높티콘으로 서로를 규율했는데, 이제는 서로 옷 입음을 보는 규율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바울의 이 말이 왜 또 위험스러운가 하면, 종교 시스템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보아주는 이가 하나님이면 좋겠는데, 그걸 하나님이 직접 보아주시지 않고 신성화된 종교 권력이 그걸 대리하여 본다는 겁니다. 여러분 중의 누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는지(쉽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누가 봅니까? 목사가 봅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신령하다는 이가 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바울이 없애려던 게 다시 새로운 양태로 설치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니 이미 기독교는 이런 장치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건 일종의 종교적인 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시즘이란 권력을 신성화해서 거기 순종하게 하는 메카니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려는 사람들은 이걸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바울은 예수님을 승계한 가장 유력한 예수 운동가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 표현을 여러분이 뇌 속에 저장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예수 운동가’란 말  말입니다. 그럼에도, 위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다른 시각에선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를 오독하게 하는 하나의 빌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실천하고자 했던 당시의 실천의 의미가 생략되거나 오해된 채 바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를 근거로 해서 ‘너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았다’고 규율하고 통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에도 권력이 있는 겁니다. 이게 눈에 보이지 않게 종교 안에, 사회 속에 그물처럼 설치되어 있는 겁니다. 바울과 예수는 이런 무형의 사회의식과 종교 안의 패악을 걷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혁명적 운동가들과 예수는 바로 이런 점에서 차별성을 가집니다. 다른 혁명가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변혁을 도모했지만 예수님은 사회, 문화, 종교 전반에 걸쳐 깔려 있는 이런 배제주의와 분리주의의 전복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마치 새 그물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사람들을 그 그물에서 건져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 하시는 예수님의 기적 사건들은 바로 그런 투쟁의 한 단면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주로 질병에 걸리거나 악령에 들린 이들을 고치는 게 아니었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기적 사건, 이 치유라는 게 현대 의학에서처럼 ‘기능적인 치료’로만 국한 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나 질병 현상은 동시대의 건강관리 체제를 전제합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건강관리 체제는 유대주의의 정결-부정의 체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적 의미의 지배적인 계열화가 만들어 내는 비정상의 영역에서 질병 걸린 자나 악령 들린 자가 주로 만들어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요즘은 질병이라 할 때 국가가 정한 질병 관리 시스템이란 게 있잖아요. 이건 무슨 병이고 저건 무슨 병인데,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고 국가가 질병의 체제를 만들죠. 그래서 어떤 건 어느 시대 격리해야 할 병이었다가 어떤 때는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수도 있잖아요. 이런 시스템은 그래도 과학적이죠. 과학적이라는 말은 보편적인 이해와 가치 안에서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규정되는 질병은 지극히 보편적이지 않아요. 힘센 사람이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거였어요. 질병 관리라는 게 이러다 보니 사회 구성원의 보건 예방 차원이 아니라 배제-박탈이라는 제계가 되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의 기적사건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질병에 걸렸다는 것과 악령이 들었다는 것은 그를 [감옥]에 넣는 거였어요. 격리하는 거죠, 우리도 과거에 한센씨병 환우들에 대해서 소록도에 가둬 두었잖아요. 고치는 게 아니라 가두는 겁니다. 그걸 예수님이 ‘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래도 일상은 사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풀어 놓은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죠. ‘한센씨 병은 천형이다’이렇게 해서 그들을 가뒀는데 ‘아니다’하면서 풀어 놓아주면 국민이 편안하겠어요, 불안하겠어요? 우리식대로 말하면 예수님이 질병을 고친 기적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그걸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법에 따라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회적인 코드를 교란 시킨 겁니다. 그래서 죽을 사람을 고쳐 놓아도 유대인들이 시비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율법 종교의 정당성을 와해시키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고, 바울이 그런 예수를 바로 알아챘고 그래서 예수처럼 바울도 지배적인 코드를 교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라는 말입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예수의 기적 사건이나 바울의 선언에서 우리는 [예수 운동]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권력, 지배를 정당화하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 심지어는 그런 코드를 허용하는 욕망의 선을 따라 쾌락을 느끼고 결국 그 권력에 순응하게끔 하는 것을 발본적으로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그렇게 하는 게 옳아?’하고 묻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와 바울은 당시 유대주의의 율법관을 그래서 문제시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겁니다. 이게 성육신인데, 왜 전능하신 분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 왔는가 하면, 이런 세상의 사건에 참여하고, 그 속에서 지배 권력에 의해 배제당하고 박탈당한 자를 끌어내려면, 감시하고 심판하는 자가 아니라 친구이자 대화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육신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 따름’의 신앙은 신에 대해서, 아니 권력에 대해서 순종하라는 게 아니라 반대로 순종의 메커니즘에 대해 저항하라는 겁니다. 그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겁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2407 히브리서 십자가의 삶은 승리한다 히12:2  강종수 목사  2015-08-09 779
12406 요한복음 누가 바르고 누가 그른 지도자인가 요10:12-13  허태수 목사  2015-08-08 393
12405 요한복음 인식의 코드, 센서 혹은 [눈] 요9:35-41  허태수 목사  2015-08-08 542
12404 누가복음 세상을 지배하는 의식과 질서를 거부하라! 눅11:52  허태수 목사  2015-08-08 451
» 갈라디아 감옥 그리고 [죄]-3 갈3:28  허태수 목사  2015-08-08 230
12402 로마서 감옥, 그리고 죄-2 롬7:21-24  허태수 목사  2015-08-08 251
12401 갈라디아 감옥, 그리고 [죄]-1 갈3:27  허태수 목사  2015-08-08 299
12400 마가복음 그런 부활은 없다. 막12:18-27  허태수 목사  2015-08-08 452
12399 마가복음 그리스도의 고난을 흉내 내지 말고 막15:42-47  허태수 목사  2015-08-08 380
12398 마가복음 통일을 꿈꾸는 대한민국 막1:14-20  이승남 목사  2015-08-08 370
12397 여호수아 선택은 축복의 통로 수24:14-25  이승남 목사  2015-08-08 964
12396 열왕기하 저주의 끈을 끊어라 왕하24:18-25:7  강승호 목사  2015-08-08 458
12395 빌립보서 은혜의 목적을 따라 살아감 빌1:29  김남준 목사  2015-08-07 715
12394 히브리서 은혜로 승리하는 삶 히4:16  김남준 목사  2015-08-07 842
12393 에배소서 교회의 지체로서 자라감 엡4:14-15  김남준 목사  2015-08-07 564
12392 에배소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심 엡4:15-16  김남준 목사  2015-08-07 524
12391 로마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롬3:23-24  김남준 목사  2015-08-07 590
12390 디모데전 가족을 돌아봄 딤전5:8  김남준 목사  2015-08-07 496
12389 시편 선하신 하나님 시34:8  김남준 목사  2015-08-07 656
12388 에배소서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심은 엡2:10  김남준 목사  2015-08-07 500
12387 시편 마아마큄에 빠질 때 시130:1-8  강승호 목사  2015-08-07 465
12386 전도서 행복한 삶 전1:1-11  조용기 목사  2015-08-06 643
12385 출애굽기 하나님을 아는 지도자 출14:13  조용기 목사  2015-08-06 394
12384 민수기 밥이냐 메뚜기냐 민14:9  조용기 목사  2015-08-06 482
12383 마태복음 나눠야 행복이 온다 마25:31-46  조용기 목사  2015-08-06 450
12382 창세기 나도 꿈꾸는 사람인가? 창37:5-20  조용기 목사  2015-08-06 429
12381 시편 야훼를 찾는 자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다 시34:10  조용기 목사  2015-08-06 456
12380 마가복음 실천적 믿음 막11:12-14  조용기 목사  2015-08-06 538
12379 요한복음 죽음이라는 병 요11:17-26  조용기 목사  2015-08-06 426
12378 시편 사랑과 보호의 품안에서 시145:20  한태완 목사  2015-08-06 723
12377 에배소서 진리 안에서 자라가는 삶 엡4:1-16  강승호 목사  2015-08-06 631
12376 마가복음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막3:1-6  김경형 목사  2015-08-05 318
12375 마가복음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좋으냐? 막3:1-6  김경형 목사  2015-08-05 710
12374 민수기 진정한 위로자 민21:1-20  최장환 목사  2015-08-04 862
12373 창세기 훌륭한 사람 창49:1-12  최장환 목사  2015-08-04 417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