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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세계로!(Into the World of Mysteries)
사도행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798 추천 수 0 2015.08.12 23:58:15성경본문 : | 행2:1-8, 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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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4년 6월 8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신비의 세계로!(Into the World of Mysteries)
사도행전(Acts) 2:1-8, 12-13
1.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영어로는 Pentecost라고 부르고 우리 말로는 '오순절'이라고 부릅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곡식을 처음 추수하고 드리는 감사 축제였습니다. 농사가 주된 생업이었던 우리 나라에서는 가을철에 벼를 추수하고는 '추수감사주일'을 지켰고, 늦은 봄 혹은 초여름에는 보리를 추수하고 '맥추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의미적으로나 시기적으로 오순절은 맥추감사절에 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40일 동안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고, 40일째 되는 날에 승천하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 본 것처럼, 주님이 홀연히 사라진 다음, 사도들과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의 세례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습니다"(행 1:14). 그렇게 여러 날을 기도에 전념하던 중에 전에 없었고 후에도 없을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기록을 누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2:1)
"모여 있었다"라는 표현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tense)는 과거 진행형입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잠시 모여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모인 상태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뜻입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1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1절은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오순절이 되었는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모두 한 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여기 모인 백이십명은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갈릴리 촌 사람들이 모처럼 예루살렘에 와 있습니다. 오순절 축제를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성전에서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침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듣는 것에 전념했습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2-3절)
누가는 목격자들에게서 전해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누가도 그렇고, 그 사건을 직접 체험한 사람도 그렇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인가를 들었는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고, 무엇인가를 본 것 같은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는 듯한 소리" 혹은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지만, 그 사건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4절)
2.
한국 교회에서 '오순절'을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 상 유일무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말씀한 '성령의 세례'가 일어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물이 머리에 부어지듯,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방 안에 신비로운 기운이 들어찼습니다. 너무도 신기해서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데, 입과 혀가 풀려서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입과 혀가 움직이는 대로 그대로 놓아 두니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말이 나옵니다. '방언', 즉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어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는데 성령에 사로잡히자 영어로 말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사도들은 연거푸 터지는 이해못할 사건들로 인해 멘붕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불과 두 달 사이에 십자가 처형, 부활 그리고 승천이라는, 인간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사건들이 연거푸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건들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이 갔습니다. 그 모든 혼란과 충격과 의문을 말끔히 해결해 준 것이 바로 오순절의 성령 체험입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도들과 갈릴리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락방 문을 활짝 열고 세상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그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분,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온 우주의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분, 그분이 구원이요, 그분이 생명이요, 그분이 길이라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복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분을 통해 목숨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을 교회의 탄생 사건이라고 말하고, 오순절을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딱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사도들과 초기 신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생겨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기독교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왜 하필 오순절에 이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더 없이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주님께서 오순절을 D-Day로 고르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날이 유월절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듯이, 성령의 세례가 오순절에 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순절은 구약성경에서 '칠칠절'(the Feast of Weeks)이라고 불렀던 감사 축제였습니다. 첫 열매를 수확하고 드리는 감사절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의 사건은 주님께서 그 이전까지 행하신 모든 구원 사역의 열매를 추수하기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씨앗을 뿌린 것일테고, 30년 동안 나사렛의 한 청년으로 사신 것은 씨앗이 나무로 자라는 과정이었을 것이고, 3년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것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었을 것이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은 열매로 무르익는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사도들과 첫 신도들이 그 열매를 손에 얻은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오순절에 사도들이 손에 쥔 열매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만을 보면,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파 중에 '오순절파'(Pentecostal)에서는 방언을 말해야만 성령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국에는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y of God)라고 알려져 있고, '순복음 교회'가 대표적인 오순절파입니다. 이 교파에서는 방언을 절대화시킵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도록 훈련하는 곳도 있고, 방언 받는 법에 대해 가르치기도 합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방언의 현상을 (약간 과장을 하자면) 일상사처럼 보고 자랐습니다. 제가 자랄 시기에 제 고향에 강력한 은사 운동이 지나갔습니다. 거의 매일 밤, 동네의 어느 한 집에서는 가정 예배가 드려졌고, 그 예배는 거의 광란에 가까웠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자주 그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고, 제 집에서 집회가 열린 적도 있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강력한 방언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제 고향의 여성 신도 중 둘에 하나는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로써 병이 낫는 신유,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 환상 중에 천국을 보는 입신, 방언의 뜻을 풀어주는 통역 등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에 저는 그런 현상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절대화시키지도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에 잠길 때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들에 붙들리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이 흔들리듯,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런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을 주목해야 합니다. 흔들리는 풀잎을 보고 바람을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그런 현상들을 보고 성령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오순절에 얻은 열매는 방언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께서 활동하실 때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일뿐입니다. 오순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무르익어 성령의 선물이 모두에게 활짝 열린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의 임재에 눈 뜨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임재 안에 머물러 살아갈 때, 성령께서는그 때 그 때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을 영적인 에너지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공 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우주적인 기운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인격이십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용서하는 인격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했습니다. 히브리말에서 성령을 의미하는 단어는 '루아흐'(ruach)인데, '바람' 혹은 '공기'를 뜻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프뉴마'(pneuma)라는 헬라말을 선택했습니다. 이 비유법을 그대로 반영하여 번역했다면, '성령'(聖靈)이 아니라 '성풍'(聖風)이라고 번역했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을 바람 혹은 공기에 비유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바람처럼 혹은 공기처럼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영어에서는 성령을 the Holy Ghost라고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동화나 전설에서 들은 고스트 이야기에 빗대어 성령을 '거룩한 혼령'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the Holy Spirit으로 바꾸었습니다. 성령은 밤중에 공중에 둥둥 떠 다니는 유령이 아니라,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은 바람처럼 우리가 통제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바람은 불고싶은 대로 분다"(요 3:8)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람을 조종할 수 없듯이 성령은 우리가 조종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바람이 움직이는대로 우리 몸을 맡기듯, 성령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성령은 당신의 판단대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령은 공기처럼 생명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아담을 만드신 다음,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셨다"(창 2:7)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의 기운'이라고 번역된 말이 바로 '루아흐'입니다. 빚어진 흙덩어리에 성령이 들어가자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 머물면 생명력이 약동합니다.
그 성령께서 사도들과 갈릴리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신비의 세계로 그들을 불러 들이셨습니다. 그 신비의 세계는 다른 어느 공간에 있는 세계가 아니라 마음의 눈을 뜨면 보이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적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자신을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전에 보지 못했던 신비로운 일들을 보게 되고, 전에 하지 못했던 거룩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순절에 사도들과 갈릴리 사람들이 거둔 열매였습니다.
4.
오늘 읽은 본문을 계속 읽어 내려가면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사도들과 갈릴리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놀라자 베드로 사도가 무슨 영문인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언자 요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행 2:17)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예언자처럼 특별한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하는 '마지막 날'은 결정적인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때가 되면 사모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지 성령께서 임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언을 하게 되고 환상과 꿈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젊은이들이 거룩한 일을 소망하고, 노인들이 영원한 것을 꿈꾸게 된다고 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았으니 새로운 것을 말하고 꿈꾸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비'(mystery)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신비의 세계가 열리고, 일상 속에서 신비로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비주의'(mysticism)는 위험한 것입니다. 초월적이고 비범한 사건에 집착하는 태도가 신비주의입니다. 그런 것에 붙들리다가 이단에 빠집니다. 반면, '신비'는 좋은 것입니다. 영어 사전은 mystery를 'something that is difficult or impossible to understand or explain'이라고 정의해 놓았고, 한글 사전은 '일이나 현상 따위가 사람의 힘이나 지혜 또는 보통의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함'이라고 정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적인 삶 속에 들어왔다면, 신비의 세계 안에 들어가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드러낸 감정에 대해 누가가 여러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 어리둥절하였다. (6절)
a crowd came together in bewilderment.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7절)
Utterly amazed, they asked......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12절)
Amazed and perplexed, they asked one another, “What does this mean?”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13절)
Some, however, made fun of them and said, “They have had too much wine.”
성경의 저자들은 등장 인물의 감정 변화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려한다면 누가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기존의 룰을 범하고 있는 셈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의 존재가 성령께 열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신비가 보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성령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면 어리둥절하게 되는, 놀라 신기하게 느끼는, 혹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묻게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게 신비의 세계를 대면한 사람들은 두 가지 길을 갑니다. 그 신비에 자신을 활짝 열고 그 세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혹은 조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신비를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한 사람들처럼, 현실 감각을 잃었다고, 맹목적이라고 혹은 미쳤다고 조롱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신비를 말끔히 걷어내고 오직 이성으로 납득하고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차원 안에 자신을 가두어 버립니다.
5.
지난 주말에 저는 아주 특별한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목회 사역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신비들을 경험합니다. 목회자로 사는 삶의 여정에 걸림돌도 많고 험한 길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정에서 경험하는 신비 떄문에 "좁은 길을 가면서도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신비의 세계는 목회자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지난 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송요택 권사님 이야기입니다. 4년 전에 간암 수술을 받으신 후, 권사님은 큰 불편이나 고통 없이 살아오셨습니다. 교회에서 뵐 때마다 환한 미소로 인사를 해 주셨습니다. 3주일 전까지만 해도 지팡이를 들고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서너 달 전까지만 해도 성가대에 서셨구요. 그런데 일 주일 사이에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무너졌습니다. 병원에서는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송 권사님은 암 수술을 받으신 후에 자주 "내가 80을 넘겨 살았는데, 이 나이에 뭘 더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나? 할 수 있는만큼 하고 때가 되어 가면 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말씀하신 그대로, 권사님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믿으셨는지, 생명 연장을 위한 모든 조치를 사양하고 지난 토요일에 집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토요일에 부인되시는 이도실 권사님과 통화하면서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교우들과 모여 임종 예배를 드리자고 약속했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토요일 오후 내내 그리고 저녁까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월요일까지 기다려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은 우리 교회 예배에 더하여 오후 5시에 애쉬번 한인교회 1주년 예배에서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그 일정을 다 소화하려면 중간에 잠시 쉬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로 미루고 싶었는데, 불편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주일 아침, 예배당에 와서 준비 기도를 드리는데, 저의 불편한 마음이 성령께서 주시는 사인이라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도실 권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오후 2시에 임종 예배를 드릴 것이니, 오실 수 있는 교우들을 초청하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권사님도 잠시 당황하셨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3부 예배를 마치고 차를 몰아 권사님 댁으로 갔을 때, 많은 교우들이 소문에 소문을 듣고 모이셨습니다. 송권사님은 정신이 맑은 상태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시 경험하기 어려울 감동적인 임종 예배를 드렸습니다. 송권사님은 목소리 없이 입을 쩍쩍 벌려 가며 찬송을 따라 하셨고,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 품에 안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애쉬번 교회로 향하면서 저는, '주말 즈음이면 떠나시겠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일 일정을 모두 마치고 월요일 아침에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연락이 왔습니다. 권사님이 새벽에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제 온 몸에 전율이 퍼졌습니다.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마터면 인성에 끌려 때를 놓칠 뻔 한 나를 흔들어 깨워 주신 것에 대해 감사 드렸습니다. 기도를 드리면서 "자격 없는 저를 왜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너 때문이 아니라 송권사 때문이다"라고 답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머쓱했습니다만,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제가 도구로 쓰여진 것만도 충분히 감사할 일입니다.
이런 것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성령의 임재에 자신을 열고 맡기고 살아갈 때 이같은 신비가 눈에 보입니다. 그럴 때 어리둥절해지기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하며, 놀라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질문하기도 합니다.
무슨 일은 무슨 일입니까? 성령께서 추시는 춤을 본 것입니다. 그 춤을 따라 춘 것입니다. 성령의 춤을 보고 나니, 이 세상이 신비의 세계요 인생이 신비 덩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하는 말을 듣고 말할 것입니다. "그건 우연이야!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눈을 멀게 한 거야." 과연, 누가 눈 멀었을까요? 모든 것을 이성의 그물로 걸러내어 신비를 모조리 걷어내고 세상 만사를 오직 우연과 사고의 연속으로만 보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성령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따라 신비의 세계를 사는 사람일까요?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들로 인해 어리둥절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놀라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질문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 중에 혹은 예배 중에 받은 은혜로 인해 놀라고 설레고 감격했던 적이 있습니까? 일상사 중에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손길을 멈추고 경외감에 사로잡혀 고개 숙여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까? 전에는 입에 올려보지 못한 사랑의 말을 누구에겐가 던져 놓고는 놀랐던 적이 있습니까? 전에 없던 거룩한 생각을 하게 되고, 전에 꿈꾸지 않던 거룩한 일을 꿈꾸는 자신을 보고 '내가 미쳤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도들과 갈릴리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입니다. 언제나 그 때 일어났던 것처럼 극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동일한 성령께서 그 때나 지금이나 역사하고 계십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성령께서는 오늘도 부드럽고 신비롭게 춤을 추시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의 손길에 눈 뜨고 그분의 손길에 맡기라고 말입니다. 신비의 세계 안으로 들어 오라고 말입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부디, 여러분의 눈이 더 맑아지고 여러분의 춤이 더 흥겨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마음 설레게 하고 놀라게 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부디, 주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하셔서 온 천지에 가득한 성령의 임재에 눈 뜨고 그분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예민해지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사모하시고 또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정성을 다하시고, 마음 모아 찬양하시며, 차분히 그리고 깊이 말씀을 묵상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생활이란 마음의 눈을 맑게 하여 신비의 세계를 보고 그 신비를 누리게 살게 하는 힘입니다. 이제 시작된 성령 강림절 기간 동안 더욱 성령을 사모하시고 또한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때가 무르익었을 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신 주님,
저희도 그 은혜를 입게 하소서.
온 우주에 충만하신 성령이시여,
또한 내 안에 계신 성령이시여,
저희의 존재를 온전히 사로잡아 주시어
이 땅에서 하늘을 보게 하시고
일상 속에서 신비를 보게 하시며
시간 속에서 영원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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