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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1: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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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주일예배설교
20140622(일)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창세기 21:8~21
1.
살다보면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맞닥뜨린 문제 앞에서, 뭔가를 해야 하는데,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힘겨웠던 기억이 아마 누구에게나 한두 번쯤은 있었을 것입니다. 제게도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군에 입대하여 갓 이등병 계급장을 달았을 때의 일입니다.
드디어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벅찬 심정으로 집에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이제 며칠 뒤면 위암 수술을 받게 되는데, 그간에는 훈련 받는 제가 너무 걱정할까봐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수술결과가 어찌될지 몰라 알고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이제 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도리어 제 마음을 위로하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었는데 참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수술 소식에도 마음이 괴로웠지만, 그 소식을 듣고도 당장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더 힘들었습니다. 이제 갓 부대에 온 이등병의 처지에 수술을 받는 어머니에게 갈 수도 없었고, 고참들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 놓고 걱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숨어서 변기의 물을 내리며 그 물소리 뒤에 숨죽여 울던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제게 선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기억, 여러분에게도 아마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것이고, 혹 어떤 분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오늘 우리는 성서일과에 따라 창세기 21장 본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은 이 자리 있는 우리뿐만 아니라,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는데요, 아브라함과 하갈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들의 곤경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시작이 됩니다.
본래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삭의 탄생이 모든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사라는 행복에 겨워 ‘하나님이 나에 웃음(이삭)을 주셨다’고 즐거워했지만, 그런 이삭의 존재가 이복형인 이스마엘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녀를 약속해 주시지요.
하지만 사라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날이 오기를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자기 남편과 동침하게 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니 그런 출생의 사연을 가진 이스마엘에게 이삭의 존재가 뭘 그리 기쁨이고 웃음이겠습니까? 그래서였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8절과 9절은 우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창 21:9~10)
본문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 모습을 보았던 사라가 불같이 분노했던 것으로 보아, 그것은 분명 가벼이 어린 동생을 놀리는 정도가 아니라, 꽤 심각한 수준의 괴롭힘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이스마엘은 십대의 청소년입니다. 충동적인 십대의 성향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간에 이스마엘이 당해온 설움을 생각할 때, 그렇게 괴롭혔다 해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라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자신의 남편을 불러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9절) 사실 엄밀히 말하면 하갈은 여전히 여종일지 몰라도,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 불려야 합니다. 하지만, 사라는 이에 대해 정확히 선을 그으며 아브라함의 아들은 오직 이삭 하나이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여종의 아들이라고 언급하며, 어서 빨리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보내라고 아브라함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사라의 이 거센 요청 앞에 선 아브라함, 그는 그야 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요청한 바로 그 다음 날 먹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들려주며 그 날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보냅니다. 물론 우리가 이미 본문에서 읽은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떠나보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의 그 말씀 떨어지자마자 그 날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실상의 자신의 아내와 아들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몰고 있는 아브라함의 행동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뭔가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함에도 그러지 않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 너무나 무책임해 보입니다.
그럼 하갈은 어떻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이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하갈은 지나치게 무력합니다. 지금 사라와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서 뭔가 중간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이 속수무책 그저 사라가 이끄는 데로만 끌려다니고 있으니 하갈에게 무슨 다른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장 떠나라는 사라의 거센 요구에 떠밀려 그녀는 별 수 없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황량한 빈들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실 물은 다 떨어졌고, 이스마엘은 사경을 헤맵니다. 그리고 결국 하갈을 그렇게 그곳에 주저앉아 통곡하게 됩니다. 이런 하갈의 모습은 하나같이 너무나 무력한 모습들일 뿐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지금 만난 아브라함와 하갈, 이 두 사람은 지금 그들이 가진 힘으로 뭘 어찌 할 수 없는 곤경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중 한 사람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무책임하기까지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너무나 무력하게만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요? 아브라함, 그가 지금 사라의 요청에 떠밀려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떠나보낸 일, 그것이 과연 그저 무책임하기만한 일이었을까? 뿐만 아니라 속수무책으로 떠밀려 광야 한가운데서 울 수밖에 없었던 하갈의 그 행동이 정말 그저 무력하기만한 일이었을까? 본문을 잘 살펴보면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
먼저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아브라함이 왜 하갈과 이스마엘을 그렇게도 단호하게 광야로 내보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두 모자를 향한 아브라함이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사라가 그 두 모자에게 품었던 마음이 아브라함의 마음이기도 하다면, 그들을 광야로 보낸 아브라함의 행동은 그저 무책임한 방관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 두 모자를 향한 그의 마음이 그 누구보다 애절하고 애틋했다면, 그래서 그들을 그렇게 쉽게 보낼 수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이 두 모자를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사라의 요청이 있었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11절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이 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창 21:11) 아브라함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이유는 본문이 말하듯이 이스마엘도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창세기의 여러 곳에서 우리는 이스마엘을 진정한 자신의 아들로 대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온 집안의 할례를 요청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때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너와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 세우는 나의 언약, 곧 너희가 모두 지켜야 할 언약이다.” (창 17:10)
그리고 하나님의 이 할례의 요청이 떨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 할례를 받게 합니다. 물론 할례는 자녀들 뿐 아니라 종들에게도 요청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7장 23절을 보면 본문은 이스마엘의 할례를 종들의 할례와 구분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그 날에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종과, 돈을 주고 사온 모든 종 곧 자기 집안의 모든 남자와 함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포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았다.” (창 17:23) 무슨 말입니까? 이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진정으로 자신의 아들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삭의 출생과 함께 이삭을 향한 축복을 말씀하셨을 때에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창 17:18) 그러니 이 모든 정황을 놓고 보았을 때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자신의 친아들로서 사랑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사라의 요청에 그렇게도 마음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그 지극하고 끔찍한 사랑은 어쩌면 아들인 이스마엘에게 대한 것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하갈에 대한 아브라함의 마음도 남달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21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은 이삭의 탄생을 보도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 지금 아브라함은 그 누구보다 큰 기쁨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 중 어디에도 기쁨에 겨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기뻐하고 있는 것은 오직 사라뿐입니다. 오직 사라만이 아주 노골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기쁨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뿐이고,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 본문이 전해주고 있는 것은 그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준행해야 하는 의무들을 준수하고 있는 모습 뿐 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한 대로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베풉니다. 그는 왜 가장 기뻐야 할 순간에 이토록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본문 12절을 만나는 것이지요. 12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로 인해 괴로운 심경 중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인데요,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인 여종의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데 이 부분을 영어로 읽으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Do not be distressed because of the boy and because of YOUR slave woman.” (NRSV, Gen21:16) 지금껏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의 괴로운 심경을 돌보시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하나님은 하갈을 사라의 여종이 아닌 아브라함의 여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것은 그저 실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하나님의 이 말씀은 하갈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시기에 사용하셨던 표현은 아니었을까요?
이 모든 정황을 통해서 우리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본문이 그것을 드러내놓고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 행간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그 두 모자를 향한 연민의 정이 아브라함 안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을 광야로 보낸 아브라함의 행동을 그저 무책임한 행동이었을 것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데도 그렇게 보냈다면,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단호한 모습으로 그들을 그렇게 광야로 보냈다면, 뭔가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본문을 살펴보니 13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사라의 말대로 이스마엘을 떠나보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정리하면 무슨 말이 됩니까? “이스마엘을 떠나게 하라.
그러면 내가 그 아들을 통해 큰 민족이 이루겠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창세기 12장 1절과 2절의 말씀, 처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이 이루게 할 것이다.” 지금 이스마엘을 두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그 옛날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님께 들었던 그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옛날 자신이 받은 약속이 지금 어찌 성취되었는지를 이미 갓 태어난 이삭을 통해 생생히 목격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 옛날 자신에게 하신 약속으로 이스마엘을 장래를 약속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약속이 아니라, 그 무엇보다 든든하고 분명한 약속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옛날 자신이 하나님께서 그 말씀 앞에서 그 즉시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던 것처럼, 그 다음날 주저하지 않고, 두 모자를 광야로 떠나보냅니다. 그렇다면 그의 이 행동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습니까? 그의 행동은 무책임한 방관이 아니라, 책임 있는 순종이었습니다.
4.
그렇다면 하갈은 어떻습니까? 속수무책으로 광야로 나가서 그저 주저앉아 울고 있는 하갈, 그의 모습은 너무나 무력해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갈의 통곡이 그렇게 그저 무력하기만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하갈의 광야경험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갈이 처음 이스마엘 가졌을 때, 사라의 학대로 인해서 하갈은 이미 광야로 도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망간 그곳 광야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하갈은 광야 그 곳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너무나도 생생한 축복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하갈은 감격에 겨워 그 경험이 이후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하나님을 두고 “보시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또 그 장소를 두고 “브엘라헤로이” 보시는 하나님이 계신 샘이라고 불렀던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발로 도망 나온 그곳, 자신을 학대하는 사라가 있는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을 만큼 하나님의 임재 경험과 그를 통해 받은 약속이 너무나 생생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갈이 지금 다시 광야 한가운데서 울고 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 다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차마 지켜 볼 수 없어 멀리 떨어진 곳에 마치 시신을 내려놓듯이 그렇게 내려놓고 아들 있는 그곳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울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갈이 흘리고 있는 이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 그저 지금 상황에 절망하여 우는 자포자기의 눈물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우는 눈물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 아닙니다. 지금 하갈이 흘리고 있는 그 눈물은 이전에 광야에서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기억하며 우는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약속을 신뢰하며 온갖 구박을 다 받아도 그 약속 때문에 모든 설움을 다 참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도대체 그 약속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 우는 울음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울음은 무력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우는 울음이 아니라 그 옛날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는 울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의 울음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바라보며 쏟아낸 통곡이었다면 그것은 그저 단순 통곡이 아니라 기도였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의 탄식과 울음을 기도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신음과 탄식을 두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병들어 죽게 된 히스기야 왕의 눈물을 두고도 하나님 뭐라 하셨습니까? 내가 그 눈물을 보고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주저앉아 울고 있는 하갈의 통곡은 겉보기에는 그저 무력하게 흘리고 있는 자포자기의 눈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기도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하게 됩니다.
4.
뭘 어찌할 수 없어 보이는 시련의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은 무책임해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너무나 무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장 책임적인 순종을 하나님께 드렸고, 다른 한 사람은 가장 절박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 같은 모습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도 그리고 하갈도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그들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그래서 차마 그렇게 보낼 수 없었던 이스마엘과 하갈을 하나님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하갈도 지금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자기 자신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아브라함의 가족의 문제는 너무나 얽히고설켜 있어 인간의 그 어떤 힘과 노력으로도 풀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사라와 하갈 사이에서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서 번민해야 했던 아브라함의 그 고민이 그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었겠습니까? 사라와의 관계 속에서 곪을 대로 곪은 하갈의 아픔과 상처가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그 모든 문제가 그들 중 그 누구의 노력으로도 풀리지 않을 문제들이고 심지어 노력을 하면 할수록 얽히고설킬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결과적으로 그 모든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삭은 이삭대로 약속받은 축복을 누리게 되었고 이스마엘은 이스마엘대로 자신에게 약속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뭐래도 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심을 그 하나님께 두고 그들은 기도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 기도와 그 순종을 통해 일하셨던 것입니다. 실상 아브라함과 하갈, 그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이들이 된 것입니다.
5.
2001년, 저는 서울의 한 교회의 청소년부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여름수련회가 강원도 속초의 한 작은 교회에서 있었는데, 수련회의 일정 중 근처의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놀이를 시작하기 몇 시간 전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쳤습니다. 비가 그친 뒤에 살펴보니 계곡의 수심이 갑자기 불어나긴 했지만, 꽤 멀리 떨어진 곳의 문제일 뿐,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로 정한 곳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저는 몇몇 교사들과 함께 아이들이 깊은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안전요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였습니다. 몇몇 남자 아이들 몇몇이 제 뒤로 와서 장난으로 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몸에 중심을 잡고 일어서는 저를 누군가 또 다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습니다. 다시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 했지만, 거센 물살로 인해 저는 순식간에 물의 깊은 곳까지 떠밀려 온 상황이었고 이미 제 키보다 높은 수심에 저는 깊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온 힘을 다해 허우적거려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겨우 헤어 나와 얼굴을 물 밖으로 꺼내보지만 이내 또 빨려 들어가고, 또 애를 써서 물 위로 올라와보았지만 이내 또 빨려 들어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힘은 빠져가고 이제 마지막으로 사력을 다해 겨우 물 위로 떠올랐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온 힘을 다해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저를 다시 물속으로 확 밀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저는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정신을 잃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 어느덧 뭍 위로 올라와 누워 있는 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함께 사역하던 다른 전도사 한 명이 저를 구조해낸 것입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하게 되었을 때, 조금 전 마지막으로 물속에서 사력을 다해 나왔을 때, 누군가 저를 물속으로 확 밀어 넣었던 기억이 나 물어보니 그 전도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전도사의 설명입니다.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조할 때에는 물에 빠진 그 사람이 사력을 다해 허우적대는 그 힘 때문에 구조하는 사람까지도 그 사람에게 붙들려 같이 물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답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의 몸에도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그 사람을 붙잡고 수영하는 일이 너무나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물에 빠진 그 사람을 물속으로 밀어 넣는 답니다. 그러면 부력 때문에 그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튀어나오게 되는데, 바로 그 상태가 되어야만 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몸에 힘을 빼고 온전히 구조자에게 의존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저를 물속으로 그렇게 밀어 넣었노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고난의 거센 물살과 깊은 수렁에 휩쓸려 있지는 않습니까? 사력을 다해 헤어 나오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거센 물살과 깊은 수렁에서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전능자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곁을 둔 채, 내 힘 가지고 뭐든 해보려고 온 몸에 있는 대로 힘을 준 채 발버둥 치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분의 구조가 더 어렵고 더디어지지 않도록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몸에 힘을 빼고 우리 중심을 그분에게 둔 채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간에 그렇게도 쉬어지지 않던 숨을 이제 편안히 쉴 수 있고, 그러면 그렇게도 죽을 것 같던 우리의 인생이 살맛나는 인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과 하갈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우리 인생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를 만나도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그저 여전히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무력함을 가지고 유력한 그분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 무력함 때문에 오히려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하게 되었다면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분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순종하기로 결단할 때, 우리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때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분은 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죽을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때때로 고난의 깊은 수렁과 물살에
빠져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힘으로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어
그 무력함에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제 곁에 계신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진 힘으로 뭐든 해보려는 교만을 내려놓게 하시고,
아브라함과 같이 또 하갈 같이 우리의 중심을 주님께 두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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