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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의 황금률

마태복음 류공석 목사............... 조회 수 529 추천 수 0 2015.08.14 16: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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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7:12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그러므로의 황금률
2010년 10월 9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7:12


  오늘 본문은 매우 유명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짧은 본문을 사람들은 황금률이라고 부를 정도로 종교와 문화를 뛰어넘어 유명한 말씀이다. 교회 밖에서도 쉽게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본뜻을 오해하거나 악용하거나 제대로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인간중심적이고 이기주의에 기초한 이해들이다.

  그 첫째는 문자 그대로 본문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매우 윤리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 비윤리적인 면에 적용을 한다. 이런 경우다. ‘너의 범죄행위를 다른 사람이 신고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너도 다른 사람의 범죄행위를 신고하지 말라.’는 식이다. 이런 경우가 실제로 있지 않은가?

  내 친구가 군대 있을 때 행정병으로 있었다. 처음에는 보급이었고 나중에는 경리를 보았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군대에는 눈먼 돈이 참 많았다. 매달 더 많이 소비한 것으로 기록해서 남는 쌀과 기름을 몰래 내다팔고 실제보다 더 많은 금액의 영수증이 비일비재했다. 그것을 챙기는 사람들은 간부들이었지만 실제로 장부에 기록하고 정리하는 사람들은 행정병이었다. 내 친구가 경리를 보았을 때 보급을 본 사람이 동기였다. 참 고민이 많았단다. 그러다가 터진 것이 새로 부임한 인사과장 때문이었다.

  그 전에는 중대장이 지시를 내린 경우가 많았고 그런 경우에만 인사과장이 그런 일을 했는데, 이 사람은 그 외에 자기 몫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거의 매일 지출되지 않은 영수증이 올라오는데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입장에서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가 보급을 보던 동기와 함께 이 사실을 중대장에게 알리게 되었다. 중대장도 자기가 먹은 것이 많았지만 인사과장이 따로 해먹은 것이 너무 많아 노해서 징계를 내렸다.

  바로 그날 인사과장이 그 둘을 부르더니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매달 쌀 팔고 기름 팔면 행정반 회식하게 해주었고, 너희 둘이 휴가 간다고 하면 용돈도  챙겨주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도 먹은 셈이었다. 이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 줄 리가 없었지 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런 경우다. 비윤리적인 행동에 대해서 나도 눈감아 줄 테니 너도 눈감아 달라는 경우다. 이런 경우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가?

  두 번째 잘못된 이해는 이 말씀을 다른 문화권에서 적용할 때이다.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대우 받고 싶은 대로 할 때 오히려 그것은 상대방에게 무례한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벤허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인 유다 벤허가 노예에서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한 후에 로마에서 유대 땅으로 돌아오는 중에 아주 좋은 경주용 말을 가진 아라비아 상인을 만나게 된다. 네 마리의 백마인데 말은 아주 좋은데 길들여서 경주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채찍을 쓰면 안 되는 그런 말들이었다. 그런데 벤허가 이 말들은 채찍 하나 쓰지 않고 훌륭하게 다루었다.

  이러한 벤허가 탐이 난 아라비아 상인은 저녁 식사에 벤허를 초대하고 근사하게 대접을 한다. 식사 후에 벤허에게 잘 먹었냐고 묻는다. 벤허가 아주 훌륭한 식사였다고 하는데 상인은 양이 안차는 표정이다. 왠가? 벤허가 트림을 안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문화에서는 끄윽 하고 트림을 해야 잘 먹었다는 인사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눈치 챈 벤허가 억지로 트림을 하고 나서야 상인은 흐뭇한 표정을 짓게 된다.

  실제로 그 상인의 문화가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 식사 중에나 후에 소리를 내어서 트림을 하거나 코를 풀거나 하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서양의 경우 코를 푸는 것은 괜찮지만 기침을 하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듯이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경우에 내 입장에서 내가 받고자 하는 대우를 기대하면서 상대방에게 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결례나 무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 번째는 나 중심의 이기주의에 기초한 이해이다. 사실 이것이 제일 일반적인 오해이고 문제이다. 즉 give and take의 사고방식이다. 공정한 거래다. 공정하게 내가 주었으니 나도 너에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해주었으니 나도 너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그런 말들이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이것은 단순히 말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남에게 좋게 해야 남도 자기에게 좋게 한다는 뜻이다.‘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말도 그렇다. 누구에게 잘 해주면 그쪽에서도 그만큼 잘한다는 뜻이다.

  다 무엇을 말하는가? give and take다. 내가 한 것처럼 너도 해주길 바란다는 것 아닌가? 왜 힘든가? 나는 너에게 그렇게 했는데 너는 나에게 그렇게 안했다는 것이다. 혹은 네가 나에게 이런 것을 해주길 바라고 너에게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이다. 주는 정은 있는데 받는 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 때 힘들어 하고, 서운해 하고 준 것을 후회하고, 상대방을 괘씸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바라고 남을 대접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 그런데 상대방에게서 그러한 보상이 오지 않을 때 기분 상해하고 마음을 닫아버리거나 괘씸하게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험담을 하는 경우도 있다.

  왤까? 그 기준이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give and take, 무언가를 공정하고 비슷하게 주고받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본문을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했으니까 이것도 결국 give and take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가? 아니다. 본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자 하신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에서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는 접속사를 주목해서 봐야 한다. 무엇인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이다.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을 받아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는 문장은 앞의 내용을 요약하고 강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바로 본문이 그러하다. 그냥 이 본문만 따로 떼어놓고 이해해서는 참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러므로’가 받고 있는 내용이 무엇일까? 바로 앞의 구절들이다. 가깝게는 11절이고, 크게는 산상수훈 전체이고 복음서 전체이고 성경 전체이다. 크게는 복음서 전체이고 성경 전체인 이유는 산상수훈이 복음과 신구약 성경을 요약한 복음 중에 복음, 성경 중에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게는 바로 앞의 11절을 받고 있고, 크게는 산상수훈 전체와 복음서 전체, 그리고 성경 전체를 받고 있는 것이다.

  먼저 11절을 보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본문은 이 내용을 받고 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우리가 그것들보다 훨씬 더 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그분께서 보실 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 남에게 무엇을 받을까 하지 말고 남을 섬기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으면서 살고 있으므로 ‘그러므로’ 너희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섬기면서 사는 그런 삶을 살라는 것이다.

  산상수훈 전체와 복음서와 성경 전체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것이 성경 전체의 요약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너희들이므로 ‘그러므로’ 너희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지를 알려주신 것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인 되시고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그 나라를 확장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인정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마음과 삶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의 주인이시고 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은 원수 갚음이 아니라 용서이다.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다. 인색함과 탐욕이 아니라 넉넉히 나누어주는 것이다. 대접받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고 섬기는 것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너희가 받았으므로, ‘그러므로’ 실제의 삶에서도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받았음으로,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그러므로’실제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 요약이 바로 오늘 본문인 것이다.

  단순히 give and take가 아니다. give and take를 뛰어넘는 것이다. give and take에는 우리의 인간적인 계산과 이기적인 마음과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담겨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다. 본문을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본문을 황금률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하신데서 유래한다. 율법은 모세 오경을 말한다. 즉 토라이다. 선지자는 선지서, 예언서를 포함한 다른 부분들을 말한다. 즉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쓰여 지기 전이니까 성경은 구약성경뿐이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이 보통 성경을 말할 때는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부분을 영어 성경 가운데 ‘the essence of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번역한 것이 있다. 엣센스가 무엇인가? 식물이나 약물에서 뽑아낸 순수한 정수 아닌가? ‘the essence of the law and the prophets’ 이 말은 본문의 내용이 성경 전체의 엣센스라는 말이다. 성경 전체의 정수요 핵심이요 요약이라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22:37-40절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을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어느 율법사가 와서 어느 계명이 제일 크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이 둘을 말씀하시고 나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다. 원어의 뜻은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의 내용이 이 두 계명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다 걸린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7:12 말씀처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즉 성경 전체의 엣센스라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22:37-40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는데, 이 둘을 잇는 아주 중요한 말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면서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무슨 뜻인가? ‘둘째도 그와 같으니’ 당시 유대교에서는 하나님 사랑을 최우선으로 두고 그 다음으로 이웃 사랑으로 해서 차등을 두었는데, 예수님은 이 둘을 동일선상에 올려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을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처럼 네 이웃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그 뜻이 아닌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 말씀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하면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선상에 올려놓으셨는지, 그리고 왜 본문이 성경의 엣센스, 황금률인지를 알게 된다.

  여러분들에게 묻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 교회 다니는 것? 주일 성수 하는 것? 십일조 하는 것? 봉사하는 것?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 그리고 무엇이 더 있는가?

  다른 것 아니다. 바로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 그 증거이다. 다른 사람들을 용납할 줄 알고 용서하고 낮아져 섬기려 하고 사랑하며 도와주는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실제적인 증거이다.

  아무리 기도를 몇 시간을 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십일조를 하고 주일 성수를 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용서할 줄 모르고 오히려 비방하고 험담하고 상처주고 미워하고 저주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직분을 맡아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한다할지라도 실제의 삶에서 용서와 섬김과 이웃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 사랑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은혜 받고 눈물 흘리거나 찬양하면서‘하나님, 사랑합니다.’ 라는 것으로 끝나는 감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며 산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는 것이고,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용납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베풀며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것을 핵심적으로 가르치신 것이 산상수훈이고 그 정신을 요약해서 담은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황금률이라 부르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교에서도 이미 언급된 것이라고 말이다. 어느 정도는 맞다. 구약 외경 중에 토빗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 그리고 이것을 좀 더 확장해서 랍비 힐렐은 ‘네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모든 율법에서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공연히 예수님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데, 생각해보라. 구약성경의 핵심을 요약하신 것인데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을 왜 덧붙이는가? 예수님께서 성경에 없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다. 성경의 핵심과 참 정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신 것이지 없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독창적이지 않다. 그러면서도 독창적이다. 왜? 당시 유대교의 성경해석을 뛰어넘고 바로 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본문도 마찬가지다. 비슷하게 보이는 말이 구약 외경과 랍비 힐렐의 말에서 언급되었지만, 그 방향성을 보면 다르다. 외경 토빗서와 랍비 힐렐의 경우는 소극적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말 종종 하지 않는가? 어떤 아이가 누가 자기보다 어리거나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보면, ‘야, 너보다 힘센 애가 너한테 그렇게 하면 좋겠냐?’하면서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적극적이다. 단지 내가 싫어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그저 내가 싫어하는 것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섬김을 받으면 참 기분 좋을 그런 섬김을 남에게 하라는 것이다. 외경과 랍비들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적극적인 섬김이다.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웃 사랑이다. 이 섬김과 이웃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섬김에 있어 훈련을 해야 한다. 섬김을 받는 것에서도 훈련이 되어야 하고 섬기는 것에서도 훈련을 해야 한다.

  먼저 받는 훈련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받는 것을 잘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는다. 받기만을 원할 때도 있고, 누군가에서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고, 받을 때 별 것 아닌 것처럼 당연하게 받기도 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받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한다. 어떤 경우는 자존심 상해하고 내가 받았으므로 나도 그 사람에게 비슷한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된다.

  이 둘은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하게 받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해야한다.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 내게 도움을 주고 섬긴다면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나를 도우시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러한 사랑으로 섬기는 그 사람에게도 감사해야 한다. 또한 자존심 상해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으라. 지나치게 부담스러워하고 거절하는 것은 강박관념이다. 잘 주는 것만큼 잘 받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훈련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는 것이다. 잘 섬기고 잘 주는 훈련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주고 잘 섬기는 것일까는 성경에 나와 있다.

  첫째는 잊어버리는 훈련이다.

  산상수훈 중에 마태복음 6:3-4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다. 이는 남에게 칭찬받기 위해 가식적으로 하지 말라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잊어버리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보면 대개 받은 것은 기억을 잘 못하는데 준 것은 기억을 잘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들은 거꾸로 되어야 한다. 받은 것은 잘 기억하고 대신 준 것은 기억을 잘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준 것을 기억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언가 보상을 원하는 것 아닌가? 무언가 나에게 되돌아올 무언가는 기대하는 것 아닌가? 그냥 주라. 그리고 잊어버리라.

  마태복음 25:31-46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사람들을 구분하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거기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그러자 이들이 무어라 하는가? 굉장히 당황해하면서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냐는 것이다.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무어라 하시는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신다.

  반면에 다른 부류들을 보자. 주님께서 동일한 내용인데, 너희는 그렇게 한 적이 없다고 하신다. 그러자 이들이 무어라 하는가?

“주여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절)

  이들의 하는 말을 보면 주님께 따지는 내용이다. 우리가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역시 동일한 내용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보라. 한 쪽은 자신들이 한 것이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당황하는 데 다른 한 쪽은 우리가 안한 것이 무엇이냐며 따진다. 이 둘 중에 주님께 칭찬받고 영생에 들어간 사람들이 누구인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며 사랑했던 사람들, 그러나 그것을 잘 기억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했다는 것이다. 무언가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잊어버리는 훈련을 하라. 주고 나서 잊어버리고 섬기고 나서 잊어버리라. 그러면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서운할 것도 없고 괘씸할 것도 없다.

  나는 목사로서 섬김의 통로가 되고 싶다. 섬김의 종착역이 아니라 섬김의 출발점이 되고 싶다. 섬김은 돈이 많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섬기고 싶다. 말씀과 기도로 심방으로 상담으로 섬길 뿐 아니라 물질로도 많이 섬기고 싶다. 나는 이 욕심이 있다. 그리고는 그 섬김을 기억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 되기를 축복한다. 섬김을 열심히 하되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중에 누군가 나에게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하면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요 하면서 당황하는 사람이 되길 축복한다.

  둘째는 비밀의 훈련이다.

  이도 마태복음 6:3-4,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은밀한 중에 하라는 말씀으로 적용할 수 있다.

  비밀은 어떤 사실을 조용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때로 비밀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밀을 이상하게 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하거나 죄를 지은 것은 비밀로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은 떠벌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내가 잘못하고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부부관계에서도 그렇고 가족 간에도 그렇고 교우 간에도 그러해야 한다. 가정과 교회 공동체가 힘들어지는 것은 자신의 잘못과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기기 때문이다.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고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건강해진다.

  그렇다면 언제 비밀을 지켜야 하는가? 누가 나에게 자신의 죄나 잘못을 고백했을 때이다. 그 사람이 직접 당사자에게 고백하기 전까지는 비밀을 지켜줘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구제하는 그런 일에서도 비밀을 지켜야 한다. 우리의 선행과 우리의 재능 같은 경우이다.

물론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이 알 필요도 있고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선행이나 성과를 자랑하듯이 떠벌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 아닌가?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 아닌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하고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정직해야 하지만, 선행과 구제와 섬김과 같은 일에 있어서는 비밀의 훈련을 해야 한다. 그 비밀의 선행과 구제와 섬김을 사람들은 몰라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 다 기억하시고 후에 그것 다 나에게 한 거야 하시면서 크게 칭찬해주실 것이다.

  셋째는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사려 깊은 섬김의 훈련이다.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려 깊은 섬김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섬겨주고 대접을 해주면 내가 참 기분이 좋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라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경우 주기는 하는데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는 섬김으로 인해 상대방이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있다.

  분명 무언가를 받았는데 기분이 좋질 않다. 왜? 나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보아도 남아도는 것, 자신이 먹고 쓰기에는 좀 그런 것을 나에게 주었다는 느낌 때문이다. 남에게 무언가를 줄 때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는 사려 깊은 섬김이 필요하다. 그런 섬김이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나의 섬김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느낌으로 전해지게 된다. 쓰던 것을 줄 때도 그런 배려와 존중이 있으면 기분이 좋다. 그러나 아무리 새 것을 주어도 그런 배려와 존중이 없으면 기분이 상한다.

  얼마 전 어느 집사님 부부에게서 식사 대접을 받았다. 참 기분이 좋았다. 그저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가 아니라 그분들을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의 종에게 고마워하면서 섬기고자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말 한마디, 배려해주는 그 행동 하나 하나에서 그 마음을 느꼈다. 참 기분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런 것이다. 내가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 무언가 남아돌아서 주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 아까워 주는 것이 아니라, 인색함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는 그런 섬김과 대접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렇게 섬기고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섬김을 하고서는 비밀로 하는 것이다. 멋있지 않은가? 이런 섬김이 정말 그리스도인다운 섬김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가까운 이웃도 그렇게 섬기고, 교우들도 그렇게 섬기고,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 가난하고 재난을 당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도 그렇게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사도행전 20:35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소개되고 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내가 신앙이 성장했구나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 말씀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이 정말 옳구나 깨달아지는 것이다. 이 말씀이 옳다고 깨달아 지고 정말 마음에 와 닿는다면 내 믿음이 많이 성장한 것이다. 어떤가? 이 말씀이 옳다고 깨달아지고 마음에 와 닿는가?

  신앙생활은 다른 것 아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분의 섬김과 사랑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받는 것을 좋아하고 give and take라는 공평한 거래에 익숙하다. 그래서 섬기고 주는 것이 힘들고 어렵고 때로 서운해 하고 괘씸해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섬김을 실천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한다. 섬김을 받기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섬기는 것이다. 섬기러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도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섬김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우리의 calling이고 우리의 사명이다.

  이 섬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고, 이러한 구체적이고도 지속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말에 있지 않고 사랑의 실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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