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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류공석 목사............... 조회 수 694 추천 수 0 2015.08.14 16: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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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7:15-23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010년 10월 23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분문: 마태복음 7:15-23

   어느 이단에 다니는 청년의 고민을 들은 적이 있다. 자기 교회 목사를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늘 설교 때마다 예수님을 말하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아주 신령한 데 왜 이단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많다. 과거 천부교의 박태선(지금의 신앙촌), 통일교의 문선명, 구원파, 정명석,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는 물론이거니와 지금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안증회(안상홍, 장길자), 신천지의 이만희, 이재록 등을 보면, 예수님을 말하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예언도 하는 이른바 신령한 모습을 보여 왔다.

  박태선이나 문선명, 안상홍 같은 경우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말했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재림한 예수라고 하다가 박태선이나 안상홍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고, 문선명은 자신이 참 아버지며 자기 부인이 참 어머니라고 하면서 실제는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수많은 영혼들을 미혹하여 엄청난 재산을 키우고 결국 자기 왕국을 만들었다. 지금 그 재산 상속으로 시끄럽지 않은가? 거기에는 예수가 없다.

  신천지나 이재록도 마찬가지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재림예수의 영이 자신에 임하여 자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재림예수라는 것이다. 이재록도 보라. 자기가 안수한 손수건을 얹고 기도만 해도 병이 낫는다고 하고 음료로서는 수질 불합격 판정을 받은 무안 단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사기를 친다. 이단으로 정죄가 되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고 주요 일간지에 엄청난 돈을 들여 칼럼까지 쓰면서 자신이 이단이 아닌 것처럼 속이고 있다. 참 교활하다. 그의 설교나 하고 있는 짓을 보면 조금이라도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이단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성경을 부인하는 것 아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말하고 성경 가지고 말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도 같고 좋은 일을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문제는 서서히 예수님에서 자신으로 대체되고 성경은 자신들의 이단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짜 맞추기 식으로 따오고, 교주와 그 핵심 추종자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교세를 확장하는 식으로 간다. 그래서 결국에는 수많은 영혼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요즘은 드러내 놓고 이단짓거리를 하는 이들보다 기성 교회인 척 하면서 이단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도 많아 문제다. 그들의 설교를 가지고 신령하다고 하고 그들이 행하는 기적에 정신이 팔려 기웃거리는 교인들도 많다. 말세에 성도들이 구할 것은 영분별의 은사라고 하셨는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영적 분별력은 설교 중에 전하겠지만 신앙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고, 그리고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아는 것이다. 모르면 미혹된다.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면 미혹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신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을 판단하는 근거로 그들의 열매를 말하신다. 22절을 보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보라. ‘그 날’이란 주님께서 심판하실 날인데,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하면서 자신들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주님의 답은 무엇인가? 23절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내 이름으로 그리 하다니 너희들 대단하구나. 잘하고 충성된 종들아 어서 오라.’고 하시는가? 무어라 하시는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거절과 저주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의 이름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는 것 같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다는 것이다. 왜? 15절에 있는 말씀처럼 ‘양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인데 양의 옷을 입고 있다. 자신을 위장한다. 그럴 듯하게 보인다. 사탄은 속이는 영이다. 속이고 위장하는 데는 최고다. 그렇게 속이려면 진짜처럼 해야 한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수많은 영혼들을 미혹하여 파멸의 길로 이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셨다.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고 경계하라’는 뜻이다. 어느 집 앞에 ‘개 조심’이라고 쓰여 있을 때는 정말 사나운 개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무시하다가는 큰 낭패를 치를 수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분명히 있다. 요한일서 4:1 말씀에도 강조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은 분명히 있다. 있어도 아주 많다. 그러기에 성도들에게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분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분별력 없이 말씀이 신령하다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그 사실만 가지고 따라다니다가는 거짓의 영에 미혹되고 사로잡혀 파멸의 길로 갈 수 있다. 거짓 영들,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고 또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이런 이단 같은 거짓선지자들도 문제지만 또 다른 문제는 기성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부인하고 싶지만 그러하다. 이들은 이단은 아니다. 그 설교의 내용을 보면 이단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을 보면 신앙의 본질이 없다.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는데 그들의 열매를 보면 과연 이들이 참된 선지자들, 참된 주의 종들일까 의구심을 갖게 한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열매를 보면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거짓 선지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 교회의 오늘날의 문제는 한국 교회가 맺은 열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좋은 열매를 더 많이 맺었지만 반대로 나쁜 열매도 맺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회개를 통해 시작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났었다. 그보다 3년 전인 1904년에 원산에서 선교사 하디(DR. R.A. HARDIE)가 자신이 학벌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한국인들을 무시했다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원산의 부흥이 시작되었고, 3년 뒤 1907년 1월 14일 평양 대부흥도 길선주 장로가 친구의 돈을 가로챈 것을 공개적으로 회개하면서 시작 되었다.

  원산과 평양, 이 두 곳에서 세계 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는데, 둘 다 공통점은 회개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였다. 특히 평양의 경우 길선주 장로가 집회 때 공개적으로 앞에 나와 자신의 죄를 눈물로 고백하며 회개하면서 그 집회에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퍼져 한국 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평양대부흥이라는 말 대신에 평양대회개라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회개를 잃어버렸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회개를 잃어버렸고 교인들 역시 회개를 잃어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강단에서는 예수 천국만 강조되고 예수 축복만 선포되기 시작했다. 예수만 믿으면 천국가고 축복 받는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나 그 본질을 놓쳤다. 교인들도 그러한 설교를 선호한다. 예수 믿어서 천국 가고 축복 받고 성공하고 삶에 안정을 유지하고 평안을 얻는 것을 교인들이 선호하고 목사들 역시 그러한 교인들의 입맛에 맞춰 그런 설교들이 선포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십자가가 사라졌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 영광의 면류관은 없다. 그런데 십자가는 싫고 영광만 받겠다는 것이다. 면류관만 받겠다는 것이다. 점점 십자가가 사라지고 회개가 사라지고 거룩이 사라지고 사랑의 희생이 사라지고 주님을 닮아가는 제자도가 사라졌다. 그 열매가 무엇인가? 오늘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문제들 아닌가?

  이 시간 진지하게 질문해 보자. 누가 이단인가? 누가 거짓 선지자인가? 회개가 사라진 교회이다. 회개가 사라진 목사, 회개가 사라진 교인, 이들이 바로 이단이고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단들의 특징은 회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더 자신들의 탐욕을 추구하게 된다.

  회개가 사라진 교회, 회개가 사라진 목사, 회개가 사라진 교인이라면 이단과 다를 것이 무엇이며, 거짓 선지자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회개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단 말이다. 회개하지 않는 그 순간이 바로 이단이지 무엇인가? 그 모습 자체가 거짓 선지자지 무엇이겠는가?

  회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가슴 깊이 눈물로 회개하며 돌이키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인격과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것이 회개이다.

  이 회개가 사라지고 그저 축복만 원하고 성공과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거짓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목회자도 마찬가지고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회개 없이는 인격과 삶의 변화는 없다. 그러면 교회를 다녀도 예수를 믿어도 그 방향은 여전히 나의 죄성과 탐심을 이루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럼 그 열매가 무엇이 되겠는가? 지금 그러한 열매들이 보이지 않는가?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셨는데, 거짓 선지자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 안에 회개가 다시금 회복되기를 축복한다. 한국 교회 안에 눈물의 회개가 다시금 회복되고, 그래서 다시금 주님께로 돌아오고 말씀으로 돌아오고 십자가로 돌아오는 개혁, 참된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회개는 U턴이다. 잘못된 방향을 완전히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이러한 회개가 나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회개가 내 삶 가운데 채워져야 한다. 내 기도를 채워야 한다. 내 예배와 내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회개가 거룩한 삶의 출발점이고 성화의 길이다. 회개 없이 어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으며, 회개 없이 어찌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한다. 우리 안에 회개가 회복되고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로 채워지기를 축복한다.

  회개는 본질을 다시금 붙잡는 것이다.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본질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 주님이시고 주님의 십자가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목회의 본질이고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죄는 이 본질을 놓치게 만든다. 우리 안의 죄성과 탐심은 이 본질을 싫어한다. 멀어지려 한다. 이 본질을 놓치면 교회를 다녀도 예수를 믿어도 자신의 죄성과 탐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게 되고 그 탐심을 이루기 위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되고 만다.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약해진다.

  회개는 다시금 본질을 바라보고 그 본질을 붙잡고 그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무엇이 교회의 본질인가? 무엇이 목회의 본질인가? 무엇이 신앙생활의 본질인가? 예수 그리스도시고 주님의 십자가다. 이 본질을 붙잡고 이 본질에 집중하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첫째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목회의 주인이시고 나의 주인이시다. 이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정하면서 교회를 운영하고 목회를 하고 교인들이 살아간다면 어떨 것 같은가? 어떤 열매가 맺어질 것 같은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뜻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본질임을 알게 된다.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뜻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에 힘쓰고, 목회자가 그러하고 교인들이 그러하다면 어떨 것 같은가? 어떤 열매가 맺어질 것 같은가?

  또한 예수님을 닮은 거룩과 사랑의 실천이 본질임을 알게 된다.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들이 이러한 거룩과 사랑의 실천에 힘을 기울인다면 어떨 것 같은가? 어떤 열매가 맺어질 것 같은가?

  기억하고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분의 십자가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목회의 본질이고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이 본질을 바라보고 이 본질을 붙잡고 이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그럴 때 한국 교회의 열매가 달라지고 목회의 열매가 달라지고 우리 모두의 인격과 삶의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목사로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특히 일부 목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같은 목사로서 죄스러운 마음이고 그 마음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목사인 나 자신에게 회개가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연약하기에 흠이 많기에 실수할 수는 있겠으나 회개가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언제고 다시 본질을 바라보고 본질을 붙잡고 본질에 집중하는 목사가 되기를 기도한다. 한국 교회의 목사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하고,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하고, 교인들을 위해서도, 특히 여러분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한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마음으로 권한다.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회개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특별히 주님의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때 자신의 부족함과 순종하지 못했음과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음과 주님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지 못했음을 가슴 깊이 회개하는 회개, 그래서 다시금 주님 바라보고 십자가 바라보고 일어서고 변화될 수 있는 회개가 불 일 듯이 일어나기를 축복한다.

  성경에서 회개는 곧 순종을 뜻한다. 내가 이전에 하던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곧 회개다. 그리고 이 순종이 곧 성경에 말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회개와 순종과 믿음은 같은 의미를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가지고 이런 의문을 가진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말씀하시는데 왜 주님께서는 행위를 이토록 강조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열매는 행위, 즉 그 삶을 말하는 것이다. 왤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맞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진리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순종의 믿음이다.

  히브리어에서 듣는다는 말을 ‘샤마’(שמע)라고 한다. 이 단어는 단순히 귀로 듣는다 는 말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듣는다는 말이다. 귀로만 듣고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것이 아니다. 사무엘상 15:22-23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여기서도 보라. 순종이라고 했는데, 이를 듣는 것과 동일하게 쓰고 있다. 듣는 것이 곧 순종이다. 히브리어로는 שמוע בקול이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귀로는 듣는데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 즉 고집을 부리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는 것이다.

  신명기 6장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들으라 하셨다. 그것이 쉐마 아닌가? 귀로만 들으라는 뜻이 아니다. 귀로 잘 듣고 행함으로 들으라는 것이다. 귀로 잘 들어 행함으로 순종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고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믿음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행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순종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다. 순종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믿음은 곧 순종이다.

  실제로 나는 교인들의 믿음을 그들이 얼마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가에서 본다. 물론 귀로 듣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를 하면서 보면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더라. 딴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들어도 마음에 담지 않는 경우도 있더라. 이런 경우를 들을 귀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귀로 듣기는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지는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듣지 않은 것이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잘 듣고 순종하는 이들이 있다. 잘 듣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잘 순종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런데 애를 쓴다. 씨름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 순종의 길로 가려고 한다.

  지난 전교인 수련회 때 이십여 명의 우리 교인들이 집회 후에 남아 기도제목을 나눈 일이 있었는데, 다들 그 고백이었다.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한다. 순종은 믿음의 차원이다. 그러면서 순종하기를 원한다며 이를 눈물로 고백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 그때 함께 했던 분들을 보면 거의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순종하려고 애를 쓰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목회자로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래서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우리 주님께서 더욱 더 순종의 힘을 주시고 믿음의 능력을 달라고 간구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지만, 믿음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는 것이지만 귀로 듣고 행함으로 순종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순종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듣는 것이고 믿음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침을 받은 우리들에게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다. 그를 위해 회개가 있어야 하고 순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에 따라 아름답고 좋은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귀로 잘 듣고 행함으로 순종하는 참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나무와 열매에 비유하셨다. 16-20절을 보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결론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떠한 열매를 맺느냐를 보면 그들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좋고 아름다운 열매는 맺으면 그들은 참이고 나쁜 열매를 맺으면 그들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열매는 그냥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바로 나무다. 좋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는 이유는 그 나무가 좋기 때문이고, 나쁜 열매가 맺어지는 이유는 나무가 못된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 나무에 그 열매가 맺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못된 나무는 원어의 의미를 살리면 썩은 나무다. 겉은 멀쩡하게 보이는데 그 속은 썩은 나무이다. 이 나무가 앞의 거짓 선지자에 대한 비유니까 양의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인 것과 마찬가지다. 겉은 다른 나무들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은 썩어 있다. 그러니 그 열매가 좋을 수가 없다.

  우리 자신을 나무로 본다면 우리는 좋은 나무일까 못된 나무, 썩은 나무일까? 우리는 본질상 좋은 나무가 아니다. 못된 나무요 썩은 나무다. 뿌리 깊은 죄성과 탐심으로 인해 완전히 썩은 나무들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좀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 우리는 그 속이 완전히 썩은 부패한 죄인일 뿐이다. 그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자신의 탐심에 따라 사는 존재일 뿐이다. 교육을 통해, 도덕과 윤리를 통해 조금 괜찮아진 것 같고, 학력과 교양과 사회적인 지위로 괜찮게 포장되어 있을 뿐이지 그 속을 들여다보면 추악하고 썩은 내가 진동하는 죄인일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 스스로 맺을 수 있는 열매는 좋은 열매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가능성이 없는가? 아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놀라운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주셨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은 본래 좋은 나무가 아니며 따라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접붙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은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이 말씀이다.

  이 가지는 원래 포도나무 가지가 아니다. 원래 엉겅퀴나 가시나무였는데, 잘라내어 포도나무에 접붙인 나무다. 그래서 이제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된 것이다. 이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그런 존재들 아닌가? 원래는 엉겅퀴 나무였고 가시나무였다. 그러니 인생이 괴롭고 허무하고 가시로 찔리고 찌르지 않았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아 포도나무에 접붙인 바 되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제 가능성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붙어 있어야 한다. 접붙인 나무 가지가 제대로 열매를 맺으려면 붙어 있어야 한다.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고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관계다. 주님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접붙임이 우리의 구원이라면 그저 구원에 만족하고 있어서는 절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되신 주님께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접붙임은 받았는데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서서히 말라 죽거나 원래 나무의 성질대로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 확고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인생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돈? 성공? 아니다. 관계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당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질문해 보았다. 첫째가 관계였다. 성공이나 돈이 아니었다. 인생의 행복은 성공이나 돈에 있지 않다. 관계에 있다.

  결혼의 행복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달려 있다. 가정의 행복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 달려 있다. 한 공동체의 안녕은 구성원들의 관계에 달려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행복은 그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달려있다. 주님과의 관계가 행복의 시작이고 그 관계가 얼마나 확고해지고 깊어지느냐에 따라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인격의 열매가 달라진다.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인격의 소유자가 되고 그런 삶을 원하는가? 당신의 좋은 나무이신 예수님과 확실하고 깊은 관계를 맺으라. 우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라. 이것이 접붙임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깊고 확실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라. 주님 안에 거하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주님 안에 거하라.

  그럴 때 가지된 나에게 예수님이라는 영양분이 흘러 예수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엉겅퀴나무였고 가시나무였던 내가 포도 열매, 곧 작은 예수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기가 막히고 황홀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예수님께 접붙임된 바 되어서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가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말씀과 사랑과 은혜를 받고 그래서 내 인격과 삶과 행동과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 닮은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심판을 받는다. 그때 주님의 판단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이름을 불렀느냐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들었느냐, 아느냐도 아니다. 우리가 어떤 직분을 받았고, 어떤 일을 했느냐도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이적을 행한 것도 아니다.

  주님의 판단 기준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는지, 즉 포도나무 되신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얼마나 예수님 닮은 열매를 맺었는지를 보시는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라 하셨다.

  지금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라. 그동안의 인생을 돌아보며 나는 어떠한 열매를 맺었는지 돌아보라. 그리고 지금 어떠한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라. 이것은 인생의 성공이나 부나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앞에서 과연 어떠한 영적인 열매, 순종의 열매, 인격의 열매, 삶의 열매, 사역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돌아보라는 말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소망을 가지고 결단하자.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 본질이신 주님 바라보고 붙들라.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함으로 들으라. 그것이 믿음이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깊고 확실한 관계를 맺어가라.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라. 그래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영양분을 받아 예수님 닮은 인격과 삶과 사역의 열매를 맺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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