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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류공석 목사............... 조회 수 626 추천 수 0 2015.08.14 16: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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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7:24-27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힘이 있습니까?

2010년 10월 30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본문: 마태복음 7:24-27

  요즘 베스트셀러 중에 이어령 교수가 쓴 책이 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으로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맛깔스런 밥을 먹는 느낌이 든다. 언어학자요 최고의 지성이라 뽑는 사람답게 그 표현력이나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보면 참 맛깔지다. 책의 제목처럼 어떻게 해서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을 보면서 갖게 되는 소망은 이런 지성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특히 무신론자였거나 비기독교인이었다가 이어령 교수나 C.S 루이스처럼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영성의 길로 들어서는 거듭난 지성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불신의 세상에 선한 영향력, 영적 영향력을 많이 끼쳤으면 좋겠다.

  이어령 교수가 이 책에서도 그렇고 강연에서도 늘 지성의 한계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면서 영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평생을 이성과 지성 사이에서 방황했는데, 거기에는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의 근본적인 고독과 한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영성으로 나아가는 눈을 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성의 한계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지성을 갈구하며 영성을 놓치는 이 시대가 안타깝다고 한다.

  이어령 교수의 예를 들었는데 요즘 우리가 많이 듣는 말이 바로 영성이다. 21세기를 영성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미 오래전에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제 5의 물결은 영성이라고 전망한 적이 있고, 하버드 대학의 하비 콕스 교수 역시 영성의 시대를 전망했다.

  여기서 질문해 보자. 무엇이 영성인가? 21세기를 영성의 시대라고 하고, 영성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하는데 도대체 영성이란 무엇인가? 참다운 기독교 영성은 무엇인가? 그저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알고 주일성수하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이런 것인가? 아니면 방언과 병고침과 귀신 쫓아내고 예언하는 등의 은사주의인가? 무엇인가?

  물론 기독교 영성에는 기도, 말씀, 예배, 성령의 은사 등이 포함한다. 이것 없이 영성을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영성의 기본 요소들이다. 그러나 참다운 영성은 단순히 기도하고 말씀보고 주일성수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 이상의 것이다.

  영성은 힘이다. 그 내면에서부터 갖추어지는 힘, 그것이 인격과 삶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힘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에 영향력을 끼치고 영적 각성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또한 무엇이 영성의 기초냐고 하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눔으로서 이루어지는 연합이다. 이러한‘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영성의 기초이고 출발점이고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가르침과 정신, 가치관을 가지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영성이고, 여기에서 나오는 힘이 바로 영성이다. 단순히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고 인격과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간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그에게는 힘이 있다. 그 힘이 나타나게 된다.

  그 한 예를 용서와 사랑이자 하자. 용서와 사랑은 예수님의 영성이고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다. 아무리 기도 잘하고 직분을 맡고 있고 놀라운 은사를 갖고 있다 해도 정작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영성이 없다. 힘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기도도 서투르고 대단한 은사는 없다 할지라도 용서할 수 있고 나아가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영성이 있는 사람이다. 영성의 힘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를 잘 안다. 6.25 전쟁 때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 청년을 용서하고 자기의 양아들로 삼은 사람이다. 또한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며 목회했던 분이시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했을까.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고, 나병환자들을 자기 가족처럼 대하며 돌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가 훌륭해서? 성인이어서? 아니다. 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역시 용서보다는 미움이 지배했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힘이 있었다. 무슨 힘? 용서할 수 있는 힘,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힘이다. 이 힘이 있었기에 그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용서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과 깊은 연합을 이루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용서와 사랑을 닮아가기 위해 애쓰고, 용서와 사랑을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쓴 그것이 힘이 되어 그러한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가? 당신에게는 용서의 힘이 있는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용서와 사랑은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휴머니티로 하는 것 아니다.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다. 이 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주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에서 주어지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힘이 있냐는 질문이다.

  또 예를 들자. 염려의 문제다. 우리의 삶은 염려다. 늘 문제가 있고 염려꺼리가 있다. 그런데 이 염려에서 자유한 이들이 있다. 분명 그의 삶을 보면 문제가 있고 염려꺼리가 있다. 그런데 실제의 그를 보면 그 문제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염려에 사로잡혀 지내지 않고 불평불만이 아닌 오히려 감사이고 평안이다. 이것이 어찌 가능한가?

  힘이 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 안에는 그런 힘이 없다. 그러니 늘 염려다. 그러나 우리 안에 힘이 있으면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다. 삶의 문제는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이 힘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에서,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과 삶에서 주어진다.

  당신에게 이 힘이 있는가? 염려를 이겨내는 힘이 있는가? 염려에서 자유하는 힘, 염려를 감사로 바꾸는 힘이 있는가? 의심을 신뢰로 바꾸는 힘이 있는가?

  또 예를 들자. 분노의 문제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문제다. 분노에는 그 원인이 있다. 그것이 상처이든, 마음이 상했던, 염려든 그 원인이 있다. 그래서 화를 낸다. 짜증을 낸다. 그런데 아는가? 그것은 내 안에 힘이 없다는 증거다. 힘이 약해졌다는 증거다. 내 안에 힘이 있을 때는 화내는 일이 적어진다. 짜증도 사라진다. 분노가 사라진다.

  이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안에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사람 착한 것은 한계가 있다. 착한 사람들이 갑자기 터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힘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다.

  사도 요한이 그런 예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별명이 있다. 보아너게다. 우레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질적으로 보면 요한은 다혈질이 아니다. 우울질이다. 매우 분석적이고 예민하다. 조용한 것 같은데 갑작스레 쌓였던 감정이 터지거나 욱하는 성격인 경우가 많다. 요한은 그런 예가 많았던 것 같다. 상처가 많은 우울질이었다. 그래서 매사에 불만스럽고 욱하고 공격하는 그런 성격이었던 것 같다. 혹은 정의감의 불타 불의한 일을 보고는 못 참는 그런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어진 별명이 우레의 아들, 보아너게다.

  그런 그가 후에 어찌 달라졌는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의 서신인 요한 일, 이 삼서를 봐도 그가 얼마나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갔는지 알 수 있다. 예전의 상처 많고 불만 많아 자주 욱하고 화를 내던 보아너게가 아니었다.

  무엇으로 가능했을까? 그에게 힘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없었던 힘, 즉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고, 분노의 감정까지도 덮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안에 충만함과 말씀 그대로 사랑을 실천함이 그를 보아너게에서 사랑의 사도로 바꾼 힘이다.

  화를 자주 내는가? 짜증을 자주 내는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가? 기억하라. 내 안에 힘이 없다는 증거다. 내 안에 지금 힘이 약해졌다는 증거다.

  섬김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또한 어느 곳에서거든 잘 섬기는 이들이 있다. 반면 오래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묵묵히, 한결같이 잘 섬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감정과 상태에 따라 달라지고,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것이 참된 섬김인가?

  왜 이러한 섬김, 묵묵히 한결같이 섬기는 이러한 섬김을 잘 못하는 것일까? 다른 것 아니다. 내 안에 힘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섬김, 상대방의 긍정적인 반응 때문에 하는 섬김은 어렵지 않다. 그건 그리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한결같고,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지속적인 섬김을 할 수 있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이 힘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감에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섬김을 실천하는 데서 주어진다. 이 힘이 있는가?

  이번에는 거룩의 문제를 이야기 하자. 교회를 다니면 참 많이 듣는 것이 거룩이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가? 거룩한 삶을 사는가? 정말 죄와 탐욕과 거짓과 불의와 음란함에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왜 그리 못 사는가? 힘이 없어서다. 거룩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어야 한다.

  당신에게 거룩의 힘이 있는가? 죄에서 구별되고, 탐욕을 따르지 아니하고, 거짓과 불의를 물리치고, 성적인 음란함에서 구별될 수 있는 거룩의 힘이 있는가?

  이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감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에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함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거룩의 힘이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세상에서의 영향력, 소금과 빛이 되는 것, 다른 것 아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있어야 세상 가운데서, 내가 살아가는 직업의 현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선한 영향력, 거룩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영적 각성과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교인이라 해도, 교회라 해도 이 힘을 잃으면, 이 힘이 없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가? 이 힘이 있는가? 오늘날 많은 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이 힘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영성은 말하는데 참된 영성이 없다. 영성의 흉내는 내는데 영성의 힘이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없다.

  오늘 우리는 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질문해야 한다. 나에게 이러한 영성의 힘이 있는지, 내게 어떠한 힘이 약해졌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다시금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힘을 갖기 위해 결단하고 노력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그것이다.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두 종류의 집짓는 사람이 나온다. 워낙 유명한 비유여서 잘 알 것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이다.

  먼저 이 말씀의 배경을 보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심하게 무어진다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배경이 있다.

  이곳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역이고, 우기라고 해서 한국에서처럼 아주 큰 비가 오는 곳이 아니다. 장마나 내리거나 태풍이 부는 지역이 아니다. 비가 와도 그리 많지 않고 여러 날 내리지도 않는다. 그런 특징을 갖고 있지만 어느 지역에 집을 짓느냐에 따라 그 안정성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특히 성경시대의 유대인들은 보통 산 위에 집을 지었다. 평지일 경우에도 조금 높은 곳에 집을 지었다. 더운 날씨 때문도 있고, 방어를 위해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산은 대개 돌산, 바위산이다. 흙이 그리 깊지 못하다. 그러한 곳에 집을 짓는 것은 바위를 쪼고 기초를 세워야 하는 수고가 따른다.

  반면에 바위가 별로 없는 곳이 있다. 골짜기나 와디의 바닥이나 그 주변이다. 이러한 곳들은 바위가 별로 없어 집을 짓는데 기초를 세우는데 어려움이 별로 없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주로 살았던 곳은 산이지만 이스라엘의 산은 우리나라의 산과 달라서 산 정상 부분이 원만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 사이에 작은 골짜기가 있다. 우리나라 산처럼 깊은 골짜기가 아니다.

그래서 산 위에 충분히 집을 짓고 마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예루살렘도 산 위에 있는 도시 아닌가? 그런 지형이기 때문에 골짜기에도 집을 짓고 살 수 있다. 그리 깊지도 않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와디도 마찬가지다. 남쪽 네게브 쪽은 우기 때도 비가 거의 없다. 와디 바닥이나 주변이 흙도 부드럽고 좋다. 집짓기에 더 좋다.

  그런데 그런 곳에 집을 지었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우기 때 비가 내리면 전체적인 강수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산의 경우 돌산이기 때문에 나무가 그리 많지 않다. 비가 조금 내릴 때는 석회암이니까 물이 흡수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많이 내리면, 물론 우리나라의 장마 때처럼은 아니지만 비가 조금이라도 많이 내리면 빗물은 땅에 많이 흡수되지 못한 채로 그대로 골짜기 쪽으로 흐르게 된다. 골짜기가 깊지는 않지만 물이 골짜기 쪽으로 몰리면 갑작스러운 홍수가 난다. 작년에도 예루살렘 저지대, 즉 산 위에 있는 골짜기인데, 그런 지역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있었다.

  와디의 경우에도 그 지역에는 비가 내리지 않거나 조금밖에 내리지 않는데 갑작스러운 범람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높은 지역, 즉 북쪽의 산지에서 많은 비가 내린 것이다. 그 빗물이 골짜기, 즉 와디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해 쪽 도로가 유다 산지 쪽에서 흘러온 물로 침수가 되고, 남쪽 네게브의 와디에 상류 쪽에서부터 엄청난 물이 몰려 내려오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와디가 범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물 한 방울 없이 말라있는 와디인데 멀리서부터 물이 밀려 내려온다. 그러면서 삽시간에 와디를 덮고 그 주변까지 물이 넘친다. 그때 그 지역에 차량이 있으면 밀려오는 물에 떠내려가고 만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창수가 나고’라는 표현으로 하신 것이다. 우리나라의 홍수로 인한 범람하고는 다르다. 보통 때에는 안전한 곳으로 여겨지고, 비가 오는 우기 때에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다. 그러나 비가 조금이라도 많이 내리면 골짜기로 몰려드는 빗물로 인해 순식간에 범람하는 지역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배경을 가지고 본문을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이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금방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매년 홍수가 있는 지역에서는 상습범람 지역에 좋은 집을 짓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일들이 드물게 일어나기에 이런 곳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드물지만 그러한 범람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결코 그런 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분다는 것은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두 가지 위기다. 종말론적 위기와 삶의 위기이다. 종말론적 위기는 지난주에 보았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심판을 말한다. 더불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럴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살 때는 폼 나게 산 것 같고 괜찮게 산 것 같고 나름대로 인생의 집을 잘 지은 것 같은데 그 자체가 와디의 모래 위에 지은 것과 같아서 창수가 나서 무어지는 것처럼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반석 위에 지어서 심판을 견디어 영생의 길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어떤가? 당신은 주님 앞에서 서게 될 때, 심판의 때에 무너지지 않고 견디어 영생의 문으로 들어갈 확신이 있는가? 내 인생의 집이 심판의 때에 잘 버틸 것 같은가? 우리 모두가 심판의 때에 영생의 길로 들어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인생의 위기에서는 어떠한가? 누구나 삶의 위기가 찾아온다. 크고 작은 문제가 있고 위기가 있다. 작은 위기는 그런대로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큰 위기 앞에서도 이겨낼 자신이 있는가? 사실 이것은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다. 힘의 문제다. 다시 묻자. 인생의 큰 위기 앞에서, 창수가 나는 그런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어떤가?

  그 사람에게 정말 힘이 있는지, 즉 믿음의 힘, 영성의 힘이 있는지는 문제를 보면 안다. 문제 상황에서, 위기의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하는 지를 보면 안다. 크고 작던 문제의 상황, 위기의 상황에서 보여주는 그 모습이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예를 들었기에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 나는 한국 에서 아주 한심한 경우를 많이 봐왔다. 교인들 중에서, 그것도 중직자들이 자녀들의 결혼을 앞두고 사주팔자, 궁합을 보고, 이사를 가는데 있어 손 없는 날을 보는 것을 종종 봐왔다. 보통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중요한 일 앞에서는 그리 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식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디 이뿐이랴? 앞서 말한 것처럼 물질의 사용에 있어서, 용서와 사랑에 있어서, 염려, 정직, 거룩한 삶에 있어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고통 앞에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니다. 힘이 있는 자만이 인생의 위기 앞에서, 고난 가운데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극심한 위기와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고 견디어 내어 마침내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고난이라는 용광로에서 영혼의 불순물이 빠져나가 정금 같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이 없으면 고난이라는 용광로에서 다 타버리고 만다. 이 힘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느냐의 질문이고, 더불어 이런 힘을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고 키울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신다. 어떻게 해야 이런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무엇인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모든 말씀들을 말하지만, 이 부분이 산상수훈의 결론부분이니까 특별히 산상수훈을 통해 하신 말씀들을 잘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안에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순종이 우리에게 힘을 준다. 믿음을 자라게 한다. 순종 자체가 힘이다. 그 힘은 인생의 위기에서 이겨내는 힘, 종말론적인 심판의 때에 구원받아 영생의 길로 들어가는 힘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갖추어지는 힘, 우리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나는 힘을 포함하는 것이다. 곧 영성의 힘이다. 이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는 ‘나의 말을 듣는’것은 같았다. 즉 본문을 보면 둘 다 주님의 말씀은 들었다. 귀로는 들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그러나 무엇이 달랐는가? 그 다음이다. 한쪽은 듣고 행했고, 다른 한쪽은 듣고도 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인생의 창수가 났을 때 무너지고 이겨내는 차이다. 심판의 때에 무너지고 이겨내는 차이다.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귀로만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들은 것이 아니다. 들었는데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순종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다.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당장 완벽한 순종을 하기는 어렵지만 듣고 행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이 힘이 되어 우리의 인격과 삶의 힘으로 나타나고, 인생의 위기에서 이겨내는 힘이 되고, 종말의 심판 때에 견뎌내고 승리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경건의 모양만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경건의 능력, 영성의 힘이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그토록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경건의 모양만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도 다니고 직분도 맡고 나름대로 봉사라는 것도 하고 신앙적인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경건의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 안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체험적 신앙이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고 계속해서 인격적인 교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 연합도 없고, 그러니 더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삶도 없다. 겉모양은 신앙인데 그 속은 여전히 자신의 죄성과 탐심을 따르는 삶이다. 주님의 말씀은 많이 듣고 많이 아는데, 정작 그 말씀의 정신을 잘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실천은 없다. 그러니 겉모양은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속은 여전히 자신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다. 그러니 그 열매가 무엇이겠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고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에게 힘이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주님과의 연합에서 주어지고, 주님을 닮아가는 데서 주어지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데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힘이 주어지고 그 힘이 위기에서 승리하는 힘이 되고, 그 힘이 내 인격과 삶의 열매로 나타나 그것이 영향력이 되고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적인 영성이고 우리가 추구해야할 영성이다.

  하비 콕스가 하버드 대학을 정년퇴임하면서 쓴 책이 있다. ‘종교의 미래’라는 책인데, 그 책에서 기독교의 2천년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예수님 이후 기독교가 313년 로마로부터 공인받기 이전 약 300년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최고의 신앙덕목으로 생각하였고, 그 신앙을 실천하는 가운데 박해도 순교도 감수하던 시기이다. 오늘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 힘이 있었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하비 콕스는 “신앙의 시대”라고 이름을 붙였다.

두 번째 시기는 기독교가 313년 로마의 종교로 공인된 후 20세기 까지 약 1700년 동안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신앙은 교리화 되었고, 성직자계급이 성장하면서 조직화 되고, 그러면서 초대교회의 신앙적인 역동성이 약화되어 화석화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시기를 일컬어 인지적인 측면의 믿음, 곧 “믿음의 시기”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비 콕스는 21세기에 들어서 우리는 새로운 세 번째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령의 시대’이다. 이 성령의 시대는 예수님 당시, 초대교회 당시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의 말씀을 묵묵히 믿고 실천하는 시대이다.

  아주 잘 지적한 것인데, 하비 콕스가 말한 성령의 시대가 곧 영성의 시대이다. 예수님 당시의 신앙,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시대라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묵묵히 믿고 그대로 실천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힘이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가 다시 열릴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영성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비 콕스나 많은 학자들의 전망대로 이러한 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한다. 21세기가 영성의 시대인 것은 맞지만, 지금의 영성은 매우 혼탁하다. 다원주의적인 영성이 난무하고, 기독교 내에서도 무엇이 참된 영성인지가 혼란스럽다. 바라기는 예수님 당시의 영성, 초대교회의 영성이 회복되어 참된 영성의 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한다.

  참된 기독교적인 영성은 본질을 붙잡고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분의 십자가이며, 그분의 말씀이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다. 그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영성이 있기를 축복한다. 참된 영성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키워지질 바란다. 그 힘이 우리의 인생의 위기와 심판의 때에 이겨내는 능력이 되기를 축복한다. 더불어 우리의 인격과 삶과 관계 가운데 열매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상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소금과 빛이 되어 영적인 영향력,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영적 각성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진정한 영성의 힘이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한다.

류공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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