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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2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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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놀라움과 권위의 차이
2010년 11월 6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7:28-29
오늘로서 산상수훈 강해를 마무리하게 된다. 기간으로는 거의 일 년인데 중간 중간 수련회나 절기 등이 있어서 회수로 치면 오늘까지 총 44번의 말씀을 전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면서 나 개인적으로 참 많은 은혜를 받았다. 깊이 있는 연구와 묵상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여러분들도 그러했는지 모르겠다.
산상수훈을 준비하고 전하면서 내가 갖는 느낌이 있다. 바로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간 느낌이다. 이 말이 이해가 되는가? 정말 높은 산 정상에 올라온 느낌이다.
높은 산에 오른 경험이 있는가? 나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산은 있는데 등산을 할 만한 산을 그리 많지 않다. 교회를 담임하기 전에는 예루살렘에 살았는데, 산 위에 살면서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희한한 곳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이 좋다. 한국에 있을 때 그리 자주는 아니었지만 종종 산을 탔다. 그 가운데 지리산이나 한라산, 설악산, 치악산처럼 꽤 높은 산에 오른 적도 많다.
한번은 지리산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지리산은 정말 큰 산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올라가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올라갈 때는 참 힘들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그러나 마침내 산 정상에 올라가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너무나 좋다. 너무나 상쾌하고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높은 곳 위에서 발 아래 구름 아래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 좋다. 이 기분에 산에 간다. 누군가 산이 있어 오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기분에 가는 것이다.
산상수훈이 바로 그러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주 상쾌하게 시작한다. 산에 처음 오를 때의 느낌이다.
참으로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말씀도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들의 꽃과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얼마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나는 말씀인가? 산에 오르면서 힘겹고 지칠 때 만나는 달콤한 약수터와 같다. 광야 같은 인생에서, 염려 걱정에 끌려가던 인생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와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때로는 봉우리들도 만난다. 그 가운데는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것들도 있다.
“구제할 때, 기도할 때, 금식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적으로 하지 말라. 은밀한 중에 하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비판하지 말라.”
이런 말씀들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보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때로 너무나도 높은 봉우리를 만나기도 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이러한 높은 봉우리 앞에서는 단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내 능력 밖이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있는 것이 바로 산상수훈이다. 마치 높은 산에 오르는 느낌이다. 산을 오르기 전까지는 산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산상수훈은 그 의미를 깊이 깨닫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하지 전까지는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산상수훈을 강해하면서 나는 산위에 선 느낌이라고 했는데, 뭐가 보일까? 참된 복이 무엇인지가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보인다. 세상을 살면서 참다운 인생의 의미와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에게 무엇이 참다운 복인지를 보게 해주고, 그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에게 무엇이 인생의 참된 목적이고 의미이고 가치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산상수훈이다.
팔복을 보라. 사람들은 팔복하면 돈, 건강, 자녀, 명예, 등등을 넣고 그것을 복이라 하며 그 복을 얻기 위해 무던 애를 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팔복을 보라. 차원이 다르다. 사람들은 복을 소유로 생각하지만 참된 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고 태도에 있음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가 복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있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복을 happiness라고 한다. 이 말은 happen에서 왔다. happen, 무슨 뜻인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다. 돈이 생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돈이 생기면 happy하고 성공하면 happy하고 무언가가 주어지면 happy한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다. 그러니 없어지면 unhappy해 진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은 happiness가 아닌 bless, beatitude이다. bless는 우리말로 축복으로, beatitude는 지복(至福)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 어원을 보면 어떠한 복인지를 잘 알 수 있다.
bless는 bleed에서 나온 단어이다. 피를 흘린다는 뜻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말한다. 피흘림 없이 bless, 축복은 없다. 피흘림 없이 죄용서의 축복, 구원의 축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은 없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축복의 사람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당신은 축복된 사람이다. 믿는가?
beatitude도 마찬가지다. 이미 강해를 하면서 말씀드렸지만 beatitude라는 단어는 be와 attitude가 합쳐진 단어이다. attitude가 무엇인가? 태도이다. 마음가짐이다. beatitude, 이러이러한 마음자세와 삶의 태도가 되어서(be) 살아가는 것이 복 중에 복, 지복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beatitude, 복 중에 복, 지복이 무엇이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을 향한 깨끗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팔복이 beatitude이다. 마음의 태도, 삶의 자세와 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되어야 그 사람은 beatitude, 복 중에 복, 지복을 소유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이다.
당신은 행복한가? 당신의 행복은 happiness인가 bless, beatitude인가? 참다운 복인 bless, beatitude를 누리는 사람은 소유와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참다운 복인 bless, beatitude를 모르면 그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bless의 사람, beatitude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한다. 그러기 위해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많이 묵상하라. 설교도 다시 들어보고 묵상도 하고 그 말씀 가지고 기도도 해보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말씀대로 살아가보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산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때로는 힘들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해보라. 힘들어도 해보고 엄두가 안 나도 해보라. 그러다보면 우리는 어느 샌가 정상에 가까워질 것이고,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눈에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 곧 참된 복이 보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신 수준은 매우 높다. 높을뿐더러 우리의 본성과는 반대되는 것들이다. 우리의 뿌리 깊은 죄성과 탐심과는 다른 방향이다. 그래서 힘들다. 예수님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말 잘 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수준들을 높이뛰기에 비유한다. 지금 내가 넘을 수 있는 높이는 1미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수준은 10미터라고 하자. 도무지 엄두가 안 난다.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원수를 사랑하라니? 내 마음에는 미워 죽겠고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뿐인데...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왜 이런 높은 수준을 우리에게 주셨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예수님은 당장 우리에게 10미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넘을 수 있는 높이는 1미터라면 거기서 조금 더 높게 넘기를 원하신다. 애써 연습하고 노력하면 조금 더 높이 넘을 수 있지 않겠는가? 2미터는 안되고 1미터 10센티나 1미터 20센티는 넘을 수 있단 말이다. 그것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한다. 당장은 10미터를 넘을 수 없지만 그것을 목표 삼아서 다시 마음먹고 기도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노력하고 애쓴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넘을 수 있게 된단 말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아무 것도 안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못해, 안돼, 싫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야 하면서 아무 것도 안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문제다. 이런 사람은 절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늘 산 아래에 있던가, 산기슭에 머물러 산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산의 깊고 풍부한 맛과 높이 올라갈수록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을 볼 수 없다.
그렇게 해보라. 당장 원수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용서해보고 사랑해보라. 내게 상처 준 사람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 한번 품어보라. 사실 힘들다. 미워하고 등을 돌리고 저주하고 원수를 갚는 것은 쉽다. 그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용서하고 용납하고 그 사람을 품고 기도하고 축복하고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힘들어도 아파도 그렇게 해볼 때 나는 훨씬 더 높이 뛰어 넘을 수 있다. 용서의 높이뛰기, 사랑의 높이뛰기에서 훨씬 더 높이 뛰어 넘을 수 있게 된다.
섬김에 있어서도, 구제에 있어서도, 다른 모든 말씀에 대해서 해보라. 지금은 내 쓸 것에 바쁘고 마음도 안가고 인색한 마음이 들지만 조금씩 조금씩 물질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나는 물질의 높이뛰기, 섬김의 높이뛰기, 이웃사랑의 높이뛰기에서 훨씬 더 높이 뛰어 넘을 수 있게 된다. 섬김과 이웃사랑의 높이뛰기 선수들이 되라. 용서와 사랑의 높이뛰기 선수들이 되라.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는 절대 주님과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수준에 다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keep going하길 원하신다. 주저앉지 말고, 타성에 젖어서 습관에 젖어서 혹은 무심하게 그저 교회만 다니는 종교인 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믿음의 길, 축복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만점이라고 하신다.
나는 이런 주님이 너무 좋다. 지금 내 점수는 주님 보실 때 한 20점쯤 된다고 치자. 그런데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애쓰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면 그래서 조금 더 나아져서 30점쯤 되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백점이라고 하시면서 기뻐하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눈높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주님 닮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주님은 그때마다 백점, 만점 하시면서 기뻐하신다.
나는 이런 주님이 너무 좋다. 사실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지 못해 완벽주의 증상에 시달리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 아닌가? 내가 원하는 백점을 상대방에게 요구하면서 힘들어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이런 주님을 배워가고 있다. 교인들을 대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주님의 눈높이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부족하고 서툴지만,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고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주님처럼 백점, 만점 하면서 좋아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대할 때 여유가 생기고 더 기도하게 된다. 물론 때로는 반대로 가는 분들도 있지만 그럴 때에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서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주님 눈에 백점인 사람이 되기를 축복한다. 날마다 계속해서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애쓰고 주님 닮아가려고 애쓰는 그런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가 주님 눈에 백점이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bless, beatitude의 사람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바로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이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 곧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되어있다. 이 놀람은 잠시간의 놀람이 아니라 오랫동안 놀라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말씀을 들으면서 놀라기 시작했고 말씀을 다 들은 후에도 놀라고 있는 상태이다.
왤까? 왜 놀랬을까? 29절이 그 답이다.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귄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위는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같은 랍비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 권위를 그들의 선대에 있었던 유명한 랍비들의 말에 두었다. 즉 선대의 유명한 랍비들이나 자신들의 스승 랍비들의 가르침을 먼저 말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창세기 미드라쉬의 첫 부분인데, 이렇게 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먼저 창세기 1:1 말씀을 소개한다. 이어서 이렇게 되어 있다. ‘호사야 랍바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설명하다가 ‘씨크닌의 예호슈아 랍비는 레비 랍비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했다.’이 경우는 자기의 스승의 이름으로 말한 경우이다. 스승에게 권위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말을 하는 경우다. 이어서 ‘탄후마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이런 식이다.
이런 식으로 선대의 랍비들의 성경 해석이나 가르침을 거론하고 그러면서 거기에 권위를 두면서 자기의 가르침을 덧붙이는 식이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양대 유대교 학파인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속한 학파의 스승 랍비의 이름을 대면서, 랍비 힐렐은 이렇게 말했다, 랍비 샴마이는 이렇게 말했다 하면서 그 권위를 스승 랍비에 두면서 가르쳤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나 누구의 제자인데...’하는 식이다. 유명한 석학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더 권위를 부여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셨는가? 그런 적이 있었는가? 없다. 가르침을 주실 때마다 하셨던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였다. 혹은 “나의 이 말은”이런 형식이었다. 한 번도 선대의 유명한 랍비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경우는 없었다. 오직 주님의 말씀뿐이었다.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의 권위는 다른 유명한 랍비들에게서 오는 권위가 아니라 주님 자신에게서부터 나오는 권위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토라 자체, 말씀 자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의 말씀이시다. 주님 자신으로서 권위가 있는 것이지 누구에게 의지해서 주어지는 권위가 아니다.
권위를 히브리어로는 שלטון, סמכות(삼쿳, 쉴톤)이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말이 כבוד(카보드)이다. 이 단어는 영광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그 어원은 כבד(카베드)라는 단어이다. '무겁다'는 뜻이다. 무겁다는 뜻이면서 많다, 중요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무게를 뜻하는 כבד(카베드)에서 나온 단어가 바로 영광을 뜻하는 כבוד(카보드)라는 단어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영광이 무엇이냐? 그 사람의 무게라는 것이다. 왕에게 왜 영광이 있는가? 왜 영광을 받아야 하는가? 왕으로서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왕으로서의 무게가 바로 왕의 영광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하나님으로서의 무게이다.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으로서의 무게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 무게는 엄청난 난 것이다. 온 우주보다 무겁고 큰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리고 그 영광에서 주어지는 것이 바로 권위이다.
왜 예수님이 권위가 있는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 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이 예수님께 있는 것이고, 그 영광의 무게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권위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카보드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이다. 그에 합당한 경배이다. 믿음은 주님의 카보드를 인정하는 것이다. 불신은 주님의 카보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의 카보드, 예수님의 카보드를 인정하는 마음이고 행위이다. 그래서 예배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순종이다. 그 권위 앞에 엎드려 순종하는 것이 바로 권위를 인정하는 마음자세이고 삶의 태도이다.
주님의 가르침에 놀라는 사람은 많다. 하비 콕스가 산상수훈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만일 산상수훈이 없었다면 서양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무슨 뜻인지 아는가? 만일 산상수훈이 없었다면 인류 역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죄악과 탐욕과 미움으로 가득 찬 역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건 헤겔의 변증론인 정반합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인간의 끊임없는 죄악과 탐욕의 흐름이 정(正)이라면 산상수훈이 반(反)이 되어서 그 죄악과 탐욕과 미움의 역사를 그나마 바로 잡아 가는 合의 역사를 이루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놀라는 이들은 매우 많다. 유대인 학자들 가운데서도 많고, 랍비 중에서도 많다. 일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Philip Sigal도 그런 사람이고 히브리대학의 교수였던 David Flusser가 그런 경우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다른 랍비들과는 다른, 그만의 독특하고 탁월한 가르침이 많다는 것이다. 아주 탁월한 할라카 교사였다는 것이다. 랍비들 가운데서도 여럿 있다. 얼마 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랍비인데 예수님을 뛰어난 랍비, 율법 교사라고 했다가 정통파 유대인들의 반발 때문에 그 말을 철회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놀라는 것일 뿐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행하는 순종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것이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매주 수요일마다 하고 있는 제자훈련에서 매주 생활숙제가 주어진다. 지난 주 경우는 순종의 삶이었다. 한 주간 동안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경험을 적어오라는 숙제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만 숙제를 할 수 있다. 제출한 숙제들을 보니까 정말 그렇게 살았더라.
직장에서, 유대인들을 상대해야하는 쉽지 않은 상황에서 말씀을 기억하며 순종하고, 인간관계에서 힘든 것이 있었으나 말씀에 순종해서 그 사람을 품고 섬겼다는 순종, 몸이 아프고 힘든 상황에서 교회를 섬기고 다른 교인들을 섬겼던 순종, 가정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순종했다는 고백들이다. 그러면서 쉽지는 않았지만 순종을 통해 순종이 주는 기쁨과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고백들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사가 나오는지...
바로 이것이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삶의 모습이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내 본성과 반대되기 때문이고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순종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본성은 나를 위하는 것이고 편한 것을 원하고 내 감정대로 내 이익을 따라 내 욕심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되고 불순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고 풍성한 기쁨과 능력을 얻게 된다. 순종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순종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결론부에서 무어라 말씀하셨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놀라는 사람으로 끝나길 원하지 않으신다. 듣고 행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놀라기만 하다가 그것도 익숙해진다. 타성에 빠진다. 나와 상관 없는 말로 듣고 만다. 혹은 놀라다가 두려워 예수님을 죽이려고 든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렇지 않았는가? 혹은 놀라다가 두려워 예수님을 부정하게 된다. 이슬람이 그러하고 이단들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예수님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은 이단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놀라움이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삶으로 바뀌고 열매 맺어지기를 축복한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높은 산으로 힘 있게 올라가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한다. 그 안에 놀라운 복, bless, beatitude가 있고, 올라가면 갈수록 이전에 몰랐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보게 되고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복과 능력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그리고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권세 있으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류공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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